베스트 라이브

어찌됐든 간에 후배의 맞선임은 나였으므로, 난 그녀에게 여러 일을 가르쳐주었다. 후배는 멍한 얼굴로 신입은 커피 배달이나 복사같은 잡일을 하는 걸로 시작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대답했다.


"우리 회사같이 조그만한 곳에서 그런 걸 시키겠어? 안 그래도 직원 수에 비해 들어오는 일은 많은데. 너도 고등학교 시절처럼 농땡이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해."


내 말에 후배는 그 시절처럼 볼을 부풀리고 날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후배의 약아빠진 표정에 난 슬며시 웃어버렸다.


'그래, 이 녀석은 나와 달리 여전하구나.'


그런데 후배는 내가 가르쳐준 일을 잘하는 거 같으면서도 수시로 날 부르거나 내 자리에 찾아와 몇 번이고 물었다. 주위에서 보는 시선도 그렇고 능률도 떨어지니 메모장에 써서 건네줘도 10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며 찾아오기 일수다.


결국 후배가 온 첫날은 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르치기만 하다가 끝나게 될 것 같았고, 그건 사실이 됐다. 고등학생땐 빠릿빠릿했던 녀석이었는데..


퇴근 시간. 우리 회사는 일할 땐 일하고 쉴 때는 확실히 쉬자는, 다른 회사 같았으면 그냥 말로만 끝나는 철학을 확실히 실행하는 곳이기에 시침이 오후 6시 정각을 가리키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은 유난히 더 피곤했기에 남은 서류도 가져가지 않고 일어설려는 찰나에-


"선배! 저, 여기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데 좀 데려다주세요." 오늘의 피곤함의 주범이 내게 다가왔다.


얘는 또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걸까. 난 미안함을 무릅쓰고 짐을 챙기는 동료들에게 후배에게 지리를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러나 대부분은 약속이 있다며 거절하거나, 알겠다면서 다가오는 일부는 내 뒤를 보곤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자기도 저녁에 할 게 있다며 거절을 했기에, 하는 수 없이 내가 가르쳐 주기로 하였다.


후배는 내 마음도 모르는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함께 정장과 가방을 챙기고 나오면서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거장으로 걸으며 가끔씩 눈을 옆으로 돌리면 후배는 그저 싱긋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우린 올라탔다. 내가 어디에 사냐고 물어보자 후배는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켰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의 끝이 향하는 걸 보고 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 바로 근처에 있는 정거장이니. 우연도 이 정도면 필연이지 않을까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후배가 먼저 내린 뒤, 내가 먼저 내렸다. 후배는 춥다며 얼른 가자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내 오른팔에 손을 집어넣으려 했다. 뜨거운 것을 만진 것처럼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피하자 후배는 짐짓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절처럼,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으면 늘상 짓는 그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다시 든 생각으로는, 후배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이다. 분명 몇 년 전 그녀가 내게 고백하고나서 나와 후배는 의도적으로 서로를 멀리 했고(지금도 후배가 괜히 상처받지 않게 행한 것이란 믿으니 전혀 후회가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 한번도 서로에게 연락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 막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나만의 자리를 찾아 딛고 설려는 시기에, 후배가 찾아왔다. 발상하는 게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쪽으로 가는 거 같다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앞을 보면 후배는 또 기분이 나빠졌는지 저만치 혼자서 빠르게 걷고 있다. 난 뛰어가 후배 바로 옆에 섰다.


"뭐에요.. 방금 전까진 팔짱도 안 끼워줄려고 했으면서, 또 나 혼자 먼저 가니깐 내 옆에 오고."


그건 그거고 가로등도 별로 없는 거리에서 혼자 걷는 여자를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하자, 후배는 작게 속삭였다.


"음? 뭐라고 했어?"


"아뇨. 그냥 선배도 참 특이한 사람같다고요." 후배는 혀를 싹 빼며 웃는다. 참 약아빠진 녀석이다.


입 모양은 그게 아니였던 거 같지만, 어쨌든 기분은 풀어진 거 같아 다행이다. 이것도 후배의 특징 중 하나다. 평범한 걸로 화내고 평범한 걸로 풀고 평범한 걸로 웃고. 호르몬이 마구잡이로 분비되는 건가.


그나저나 기시감이 든다. 아니 아예 오늘 아침에 걸었던 길이다. 게다가 보이는 것도. 고장나서 길가에 덩그로니 놓인 자전거,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대나무평상, 동네에서 자주 보이는 뚱뚱한 감색털의 고양이. 마침내 후배의 집 앞으로 왔다.


"데려다 주셔셔 감사합니다!" 후배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고작 같이 걸어온 것 정도로 과분하게 받은 거 같아 나도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근데 어떻게 동네만 같은 게 아니라 집도 같을 수가 있냐.." 혼잣말에 후배가 네?라며 의문을 표하자 난 키카드를 바로 옆의 문걸이에 댔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후배의 턱도 풀렸다. 이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녀석이었나.


"난 들어간다. 잘 자." 문을 닫으며 말했다.


"네! 선배도 안녕히 주무세요!"


다짐을 또 스스로 어겼네.. 난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입은 뒤에 침대에 퍼졌다. 휴대폰이 울리기 했지만, 지금은 여러가지로 피곤한 관계로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기다려줘서 고맙고 늦은 주제에 짧아서 미안하다.. 그래도 1.5화 분량은 썼으니깐 내가 늦장만 안 부리면 이번 주에 1~2편 더 올릴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