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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기차가 동대구역에 도착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자 버렸던 모양이다.


잠시간 눈을 붙였더니 개운해진 정신을 추스려 몸을 세웠다.


서둘러 내리지 않으면 부산에서 다시 대구행 기차를 타야 한다.


그러잖아도 돈이 빠듯하다. 그런 식으로 멍청하게 낭비할 여유는 없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파 속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


역을 꽉곽 채우는 낮의 모습과는 다르게 늦은 시간의 역은 한산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퍼져 있지만 그렇게 밀도가 높지는 않아서 조금 관심있게 둘러본다면 그들 한명한명의 얼굴을 다 구별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발길을 서두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기다리던 이를 만나서 안부를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을 거리낌없이 표현하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으로, 혹은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러 가는 모습들을 보는 것은 썩 편치 않은 일이다.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생각도 없다.


차라리 미어터질 듯한 인파로 정신없는 것도 괜찮다.


지금처럼 어중간하게 사람이 많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의 품에 안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나의 모습을 비교하게 된다.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해 주는 건 나밖에 없을걸.


항상 듣던 말이 새삼스럽게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그 말이 맞다. 아무리 되돌아봐도 그 녀석 말고는 나를 찾던 인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나에게 괴로운지는 알지 못했다.


녀석이 친히 우리 둘 사이의 차이를 상기시켜 줄 때마다 나는 잎새에 바람이 이는 듯이 괴로워했다.


어떤 시인이 바라기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뒤돌아본 내 인생은 부끄럽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또한 시인이 다짐하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죽을 듯이 아플 때에, 나를 사랑해 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진 길만을 걸어가야겠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말이다.


역에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웠다.












친정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불은 꺼져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해보고 싶었기에 굳이 인사말을 남기면서 집에 들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티비도 없고 소파도 없는 집안은 1년 전에 본 것 그대로 살풍경했다.


생활감이 느껴지는 것은 오랫동안 개지 않은 듯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 뿐이었다.


집에 가기 전에 잠시 일이 있어서 병원에 들렀더니 피곤하던 차였다.


마침 잘 됐다. 나는 그대로 이불에 몸을 던지고 다시 눈을 감았다.


목이 말라서 눈을 떳더니 새벽 세시 반이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집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빈 컵을 식탁에 내려놓고 나니까 휑한 느낌에 약간 오한이 들었다.


아무래도 앞으로 혼자서 살기에는 집이 다소 넓은 것 같다.


이 집도 그냥 처분하는 걸로 하자.


내일부터는 바빠질 것 같다.








얼마만에 아무런 방해 없이 아침잠을 잤는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여섯 시 십오 분마다 정확히 걸려오던 전화가 없어서 열시까지 실컷 잤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몸이 좀 찌뿌둥하다.


정신을 차리려고 찬물에 몸을 헹궜다.


샤워를 하고서 정신이 조금 들자 배가 고팠다.


다행히 냉장고에는 냉동만두가 가득했다.


그릇에 만두를 담고 물을 조금 부은 뒤에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만두가 데펴지는 동안에 할 것도 딱히 없어서 휴대폰을 들었다.


그 녀석을 차단해놓은 덕분에 내게 온 연락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읽을 메시지가 없으니 나도 모르게 갤러리를 열게 됐다.


갤러리에는 온통 녀석의 사진이 가득했다.


전체선택을 한 다음에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잠시 손가락이 멈칫했다.


마침 전자레인지의 알람이 울려서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끄고 일어났다.


결국 녀석의 사진은 지울 수 없었다.


더운 만두를 들고 자리에 돌아와서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한 손으로 만두를 먹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사진을 한장 한장 넘겨보았다.


어쩌면 지금 녀석도 이렇게 내 사진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가 코웃음을 치고 휴대폰 화면을 껏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민정이는 참 한심해.


녀석의 말버릇이었다.


"새삼스럽게 맞는 말이네"


사진 한장도 제대로 지우지 못하는 놈한테는 딱 맞는 평가였다.


그 녀석이 지금 어떨지 상상하는 것도 구차할 뿐이었다.


오늘은 할 일이 많다.


나는 서둘러서 만두를 꾸역꾸역 입에 쟁여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