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1편 ㅡ https://arca.live/b/yandere/150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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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 잊어버린 거에요?…여보?"

애절한 표정으로 터무니 없는 말을 내뱉은 그녀를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여보? 무슨 말을 하는거지? 그녀와는 오늘 처음 만난 게 분명한데. 혹시라도 말을 잘못 꺼낸 게 아닐지 그녀가 정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긴 속눈썹에 맺힌 눈물 방울을 닦은 후, 손을 뻗어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이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없어요... 얼마나 그리워 했는데...”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오래 전 헤어진 뒤, 겨우 재회한 연인에게 던지는 듯한 말을 했다.
그녀는 쉽게 부서지는 유리 조각을 만지는 것마냥, 손끝으로 조심스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밤바람이 차갑게 식힌 내 뺨 위에, 따스한 온기가 담긴 그녀의 손가락이 올라왔다.내 뺨을 만지는 그녀의 다섯 손가락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을 조심스레 떠올려보며,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나와 만나자마자 나를 세게 껴안으며 울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치기에는 그녀의 행동이 꾸준히 일관됐다 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기... 사람을 잘 못 보신거 같은데요.”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뱉은 말에 그녀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 말을 들은 뒤, 잠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으며, 그 뒤에는 어디가 괴로운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잠깐 감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방금 내 말을 통해 받은 고통이 엿보여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갑자기 주저 앉아 털썩 고개를 떨궜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이 밑을 향해 그녀의 표정을 숨겼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줬다. 흰 원피스와 어울려 그녀의 모습이 처량해보여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하지만, 진짜 당신과는 오늘 처음 만났단 말이에요. 정말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나는 그녀에게 드는 미안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단호하게 다시 물었다. 그녀의 행동에 담긴 애절함이 마치 그녀가 주장하는 말들이 사실이라고 나타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상황이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인지, 그녀가 주장하는 것들이 실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미쳐버렸나 싶은 마음에 나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목빠지게 기다렸다.

여성은 내 말을 듣고도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홱 치켜 들고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인형같은 이목구비와 흰 눈같은 피부가 내 시야를 가득 매웠다. 약간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입과 코하고는 다르게 갈색 눈망울은 무척 컸고,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있어서 귀여운 인상을 받았다. 그런 아름다운 얼굴이 무척 억울한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어서 나는 뜻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거의 맞닿을 듯한 거리를 남겨둔 채 그녀는 내 어깨를 잡고는 시선을 내 시선에 정확히 맞추었다. 나는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하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가 내 어깨에 살짝 힘을 줘서 시선을 마주볼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기억안나세요…?"

그녀는 눈썹을 내리고 눈을 살짝감아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갑작스레 쑥스러워졌다. 그래서 그 마음을 숨기려 애써 나는 고개를 내리고는 빠른 어조로 말을 했다.

"정말로 기억안나요…"

말을 한 뒤, 잠시 바닥을 바라보고 있자 순간 갑작스레 불안감이 들었다. 어느샌가 질문의 주도권을 그녀가 가져가버려 이 황당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이곳은 어디인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이 건네준 반지는 무엇인지. 그러나, 그녀가 꺼낸 말들이 충격적이어서 물어볼 생각이 어느샌가 없어져 있었다. 나는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한 질문을 생각해내어 고개를 든 뒤에 말했다.

"저, 정말로 사람을 잘못 보신게 아니라면 혹시 제 이름 아세요?"

내 기억이 옳은지, 아니면 그녀가 주장하는 사실이 진짜인지 알기 위해 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 질문을 받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서로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 뒤, 그녀가 대답했다.

"제가 잊을 리가 없잖아요… 리온… 리온, 혹시 어디 아파요?"

리온? 내가 리온이라고? 내 흔한 한국 이름과는 동떨어진, 어딘가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름을 듣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내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리온… 당신 지금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아까전에는 들어보 적도 없는 언어로 말을 하더니… 도대체 저를 떠나간 뒤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손으로 내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조심스레 움직이는 그 손길은 왠지 교태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멍해진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들어본 적도 없는 언어로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나만 그런게 아니라, 그녀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 꼬인 듯 했다.

내가 살고 있던 삶은 사실 가짜였던 게 아닐까? 사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논리를 초월한 현상에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기어나왔다. 내가 경험했던 현실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상황에 나는 알맹이가 빈 추론들을 이어나가다, 문뜩 섬뜩한 생각이 들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거울, 가지고 있으세요?"

갑작스레 거울을 찾는 내 모습에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전 질문
인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아뇨. 갑자기 거울은 왜…"

그녀의 대답을 흘려보낸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몸을 자세히 관찰했다. 예전 중세시대 때나 입었을 법한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 몸은 내 기억속의 것과 비교해 더 컸고 근육이 붙어있었다. 그 탄탄한 몸을 본 나는 뒷통수에 서늘한 느낌이 났다.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과 몸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단서를 찾자, 방금 떠올렸던 그 가설이 더욱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멍하니 서있있다.

갑작스레 입을 다문 나를 그녀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내 뺨에서 손을 때고는 내 옆을 지나가 출구로 향해 걸어나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놀라 재빨리 뒤돌아보자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출구에 도착하더니, 문이 아니라 벽에 손을 짚었다.

"거울은 없지만… 대신 이런거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봤다. 무엇을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돌연 그녀의 손 주변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놀라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손을 감싸듯이 빛을 발하는 고리 모양의 무언가가 둥둥 떠있었다. 그 고리 모양 주변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과 기하학적인 모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고 나서 금방, 그녀가 손을 대고 있던 벽이 갑자기 푸르고 투명한 무언가에 덮어졌다. 쩌저적, 하며 퍼지는 그 모양을 보고나서야 나는 그것이 얼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있는 이곳이 지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녀가 나에게 신비한 반지를 건네줬을 때 부터 떠올렸다. 그러나,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야말로 물리법칙을 초월한 마법을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진짜 이곳은 다른 세계가 맞구나. 그녀가 쓰는 기이한 현상이 무엇보다도 큰 증거였다. 얼음이 거의 벽면을 다 덮을 때 까지, 나는 경이로움과 놀람이 섞인 시선으로 그 신비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다 됐어요."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며 내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 떠있던 고리들이 사라지자, 그녀는 벽에서 손을 땠다. 그녀는 지친 기색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대수롭지 않은 과제를 손쉽게 해결한 듯 했다. 똘망한 눈망울로 나를 그녀는 바라봤다. 방금 전에 그녀가 한 일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나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가 얼음으로 뒤덮은 벽으로 다가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내 모습을 얼음에 비췄다. 처음에 상이 일그러져 몇번 위치를 고치고 나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걱정했던 게 진짜였구나 싶어 허탈했다.

얼음에 반사된 모습은 내가 아니었다. 잘생긴 용모도, 탄탄한 체격도, 키도, 모든 것이 달랐다. 도대체 누구지 싶어 기억을 떠올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내 모습 자체가 한국인과는 동떨어진 외모였다.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의 몸에 빙의 된 건가? 가만히 벽을 바라보며 여러 가설을 떠올리고 있자, 내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마치 내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짐작한 듯한 말투에 나는 놀랐다. 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저를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당신의 기억에 어떠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방금 깨달았어요..."

마치 그녀는 나를 상냥하게 위로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숨을 죽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이 몸에 내가 빙의하게 됐다는 사실을 눈치챈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양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은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여보, 당신을 제가 잘못봤을리는 없어요... 분명 당신은 저와 함께 지내던 리온이 맞아요..."

그렇게 말한 뒤에 그녀는 손을 내려 내 손을 맞잡아 쥐었다. 마치 기도를 하듯이 양손을 서로 가까이 붙였다.

"분명 당신이 어딘가로 떠난 동안, 무슨일이 있었던 것이겠죠...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당신의 기억에 해를 가한 것 같아요... 저를 잊어버리고, 예전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뒤, 갑자기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를 안았다.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강압적인 포옹과는 달리 이번에는 어딘가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내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녀의 사랑하는 남편의 몸을 뺐었다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자신의 남편이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갑작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법같은 행위가 가능한 다른 세계에서 발버둥쳐봤자 다시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기억을 잃은 척 하는 게 나에게 좋지 않을까? 내가 갈등을 하고 있자, 그녀는 포옹을 풀고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그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곳은 지금 당신에게는 무척 위험한 곳이에요. 여기서 대화를 하기 보단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우선이에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놀라 반문했다.

"여기가 위험하나요?"

내 물음에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찾으러 왔는데... 설마, 당신이 기억을 잃을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원래 무척이나 강해서... 아무런 걱정없이 왔는데..."

말끝을 흐린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 뒤, 내 손을 붙잡더니 호소했다.

"부탁이에요... 당신이 지금 기억을 잃어 혼란스러워 하는 심정도 이해가 되지만... 지금은 제 말을 듣고 따라와줄 순 없나요? 이곳에 계속 머무르면 위험해요..."

그녀의 말을 듣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고,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손을 잡고 믿어달라며 나에게 호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울어서 빨갛게 부은 눈과, 그 밑에 남은 눈물 자국이 보였다. 그녀를 믿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다시 갈등했다. 갈등의 결론은 금방나왔다. 나는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녀의 말이 의심스러워 거절했다고 했을 때, 나는 이곳에 남겨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에게 의지하기로 결론이 났다.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주고 도움 줄 수 있는 게 가능한 사람이 그녀밖에 없어서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 반지가 내 생각을 굳혔다. 이게 없다면, 나는 정말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나에게 몇번 더 물으며 내 대답을 세번정도 받아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본 뒤에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밑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확인을 하고 와야겠어요."

그녀의 말에 내가 혼자남겨질 다음 상황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질리자, 그것을 눈치챈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타일렀다.

"괜찮아요... 확인만 하고 올게요... 이래뵈도 여기까지 올 수 있을 정도의 강함은 지닌 몸이에요. 걱정하지 말아요. 금방 돌아와서 당신을 지켜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나는 아까 전처럼 만지는 줄만 알고 가만히 있자, 그녀는 갑작스레 얼굴을 내 뺨에 가져다댔다. 뺨에 말캉말캉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꾹 눌리는 감촉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입술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몸을 움찔 하고 떨었다. 그녀의 고운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동안 그대로 그녀는 내 뺨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있다가, 천천히 얼굴을 떨어트렸다. 그녀의 뺨이 짙게 물든 복숭아마냥 붉어져있었다. 그녀는 쑥스러움과 만족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리온, 제 말을 믿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사랑하는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으니,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당신을 지켜줄게요... 그리고 기억을 다시 되찾아 줄게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맹세를 하는 그녀를 나는 멍하니 지켜봤다. 아름다운 이성에게 호의를 받아 기쁘다는 감정같은 건 들지 않았다. 대가 없는 그 사랑에 대한 경외심과 그녀의 희생에 미안함이 내 마음속에 생겨났다. 더욱 이 몸에 대해 사실을 말하기가 꺼려져, 답답했다.

"리온, 절대로 여기서 움직이지 말아요... 제가 돌아올 때 까지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그녀는 방금 전 까지 짓던 환한 미소를 지우고는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명령했다. 애초부터 겁이 나 그녀의 말대로 할 생각이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몇번이나 내쪽을 돌아보며 그녀는 내 모습을 눈에 담으려 했다. 이윽고 문이 부서져 훤하게 뚫린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레 걷는지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 그녀의 충고를 떠올리자 겁이나서 나는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혹시라도, 이곳에 있는 누군가가 전망대에 서있는 내 모습을 볼까 싶어 몸을 숨기듯이 난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기어갔다. 예상했던 것 보다 혼자 남겨진 공포는 무척 거대했다. 처음봤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보랏빛 밤 하늘도, 이제는 어딘가 괴기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그녀가 사라진 출구를 바라보자 시커먼 어둠이 보였다. 그 어두움이 내 부정적이고, 공포스러운 상상들을 부추기는 것만 같아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거의 눕듯이 바닥에 몸을 붙인 뒤, 나는 그녀가 재빠르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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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공포스러운 망상과 싸우고 있던 나는 다급히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무척이나 빨리 계단을 오르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몰라 나는 겁이 났다. 이대로 어딘가에 숨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소리의 주인이 출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였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온, 지금부터, 무슨일이 있더라도 큰 소리를 내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며 그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내 목숨을 위협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다시금 솟아오르는 공포와 긴장감을 무마시키려 나는 애써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 지금부터 이곳을 빠져나갈거에요. 나가는 곳은 제가 여기 들어왔을 때 사용한 입구를 다시 이용할 거에요. 당신을 위협하는 것들이 밖에 있어요. 그러니 제 뒤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저를 따라와주세요."

그녀의 말에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갑자기 출구 너머에서 무언가를 밟는 듯한 소리가 났다. 사람의 발소리도 아닌 기묘한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아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옆에 서있자,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붙으라고 말하며, 나를 자신의 등 뒤로 걸어가도록 밀었다. 그녀도 긴장하고 있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의지하는 대상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 나도 덩달아 발작하는 것 마냥 숨을 내쉬었다.

서로 긴장하며 출구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순간, 갑작스레 출구 너머에서 검은 무언가가 삐져나왔다. 마치, 출구 안의 어둠이 번지는 것 마냥 허공에 검고 긴 형체가 안에서 뻗어나왔다. 그것이 무언가의 팔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서히 검은 무언가가 어둠을 뚫고, 빠져나왔다. 마치 그 안에서 태어나는 듯한 기묘한 움직임에 내 온 몸의 털이 다 솓구쳤다.
그 검은 형체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오자, 내 앞에 선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검은 형체는 마치 살아움직이는 그림자 같았다. 머리, 두 팔, 두 다리, 몸통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것들은 두께가 평평하고 끝이 다 날카로웠다. 그 기괴한 그림자의 형체를 내 머릿속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안돼!"

내 앞을 가로막은 그녀가 그렇게 소리 친 뒤, 그림자가 재빨리 움직였다. 우리를 향해 그 가는 두 다리의 날카로운 끝 부분으로 바닥을 찍으며 달려오더니 내 앞에 선 그녀에게 팔을 휘둘렀다.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그만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녀를 쓰러트린 그 그림자는 곧장 내게로 달려와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쓰러트렸다.

눈을 감은 것 처럼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로 쓰러진 충격에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곧 내 앞을 그 그림자가 가로막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붙잡힌 팔에서 차가운 쇠를 가져다 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그림자는 나를 쓰러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의 얼굴로 추정되는 것을 내 얼굴 앞에 가까이 들이민 후 가만히 있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머릿속이 꽉 찼다. 손가락 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공포에 질린다라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도 들었다.

그것이 나를 들여다보는 끔찍한 시간도 얼마 가지 않았다. 돌연 그것이 내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림자를 밀쳐낸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내 손을 붙잡더니 나를 강제로 일으켰다. 그녀가 힘을 세게 줬는지 손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일어서서 잠시 멍하니 있던 나를 바라본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외쳤다.

"따라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내 손을 붙잡아 출구를 향해 뛰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도 그녀를 따라 뛰었다. 중간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 앉을 뻔 했지만, 그녀가 팔을 잡아 지탱해줘서 간신히 일어섰다. 나는 그 그림자가 우리에게 뛰어왔던 속도를 생각해봤다. 사람이 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속도였다. 내가 제대로 뛰지 않는다면 잡힐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출구를 지나 나선형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꼬불꼬불 꼬인 구조의 계단이라 방향감각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속도가 내려갔다. 다행히도 벽면에 횃불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시야가 확보됐고, 계단 옆에는 돌로 된 난간도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을 풀고 말했다.

"나도 뛰어서 따라갈테니깐 먼저 앞장서줘! 안 그러면 잡힐 것 같아!"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잠깐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며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를 배려해 아까 전보다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던 도중, 위에서 무언가가 바닥을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등에 소름이 쫙 끼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더 빨리 뛰어줘! 괜찮으니깐!"

뒤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떠밀려 그렇게 말하며 호소하는 눈초리릴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술을 꾹 깨물고는 넘어지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넘어지지 않게 난간에 손을 올리고서 흐릿한 횃불에 의지해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갔다. 그림자도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지 탁탁,거리는 소리가 짧은 주기로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길을 아는 것이 그녀라 그녀가 앞장설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며 떨리는 다리를 재촉해 그녀를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정말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계단의 끝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둥그런 방 앞에 출구로 추정되는 낡은 문 하나가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간 그녀는 따라오세요 라고 나에게 말한 뒤, 그 문을 거칠에 열고는 밖으로 뛰처나갔다. 드디어 계단을 다 내려온 나도 재빨리 그녀를 따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전망대는 성 옆 쪽에 있었다는 걸 나오자 마자 알아챘다. 내 시야에 창이 붙어있는 성 옆면이 보였다. 아무래도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은 윗층이었는지, 내가 보고 있는 일층의 창들에서는 불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출구로 빠져나오자 밟힌 것은 짧게 자란 풀들이었다. 옆을 바라보자, 나뭇잎에 달빛이 막혀 어둠이 드리운 숲이 보였다. 그녀는 성의 옆면을 따라 뛰며 나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쫓아갔다. 슬쩍 뒤를 바라보자, 그 그림자는 계단을 내려오는 데 꽤 고전하는 듯 출구에서 나올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리를 벌린 것에 대해 안심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성 벽면을 따라 쭉 달리더니 어느 한 방의 창문에서 멈춰서고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달린 창틀을 제자리에서 뛰어 잡더니 그대로 몸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창틀에 발 앞부분으로 지탱해 잠시 서있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려 꺼냈다. 그녀가 소매에서 꺼낸 그것은 달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나는 그게 크기가 손만한 조그마한 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칼을 창살에 댔다. 그러자, 아까전 전망대에서 본 그 신비로운 고리들이 칼 주변을 감샀다. 그녀가 그 작은 칼을 몇번 휘두르자, 얇은 창살의 윗부분이 금방 잘려나갔다. 그렇게 창에 달린 모든 창살을 다 자른 그녀가 창틀 윗부분을 붙잡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들어간 뒤에 잡아드릴테니 저처럼 여길 넘어오세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모습을 다시 보이기까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 뒤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자, 전망대 출구에서 빠져나온 그림자가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쫓아오는 그림자의 속도는 이상하게도 느렸지만, 그녀가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녀가 배신했나싶어 그냥 도망칠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가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서요!"

그녀는 허리가 보일 정도로 창 밖으로 몸을 내밀며 팔을 뻗었다. 나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벽을 발로 밟아 지탱한 뒤,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그녀는 여자가 가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힘으로 내 체중을 끌어올렸다. 나는 손쉽게 올라가 창틀을 붙잡고 어두컴컴한 방안으로 몸을 던졌다.

딱딱한 바닥에 부딪힌 내 손을 잡고 그녀가 일으켰다.
방안은 횃불조차 없어 달빛이 조금 스며드는 창 말고는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무척 어두웠다. 어렴풋이 시야에 낡은 테이블, 침대, 책장 같은 것들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가구들을 보아 누군가가 살던 방 같은데,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있었다. 쾌쾌한 공기를 마신 나는 그녀를 보았다.

"여기부터는 어두우니 제가 손을 잡고 안내해드릴게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속도가 떨어져 붙잡히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그래도 괜찮아?"

내 걱정을 들은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이 태평하게 방 출구를 향해 나를 이끌고 걸으며 말했다. 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그녀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그녀를 따라갔다.

"네, 저 괴물은 창을 넘어서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니, 정문을 통해서 이곳에 들어와야 해 시간이 걸릴 거에요."

이윽고, 출구에 다다른 그녀는 문고리를 돌렸다.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서서히 문이 다 열리자 그녀는 내 손을 당겨 재빨리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를 뒤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방에서 나오자 그곳은 넓고 커다란 홀이었다. 까마득히 고개를 올려다보자 저 먼 곳에 천장이 보였다.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테이블이나,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가 보였다. 홀 중앙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그 옆으로 기둥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아무래도 기둥 뒤에는 방들이 있는 듯했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홀에 발을 내딛자 발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울려펴졌다. 그녀는 그걸 듣고는 지금까지 꼭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말했다.

"잠시만요."

나를 멈춰세운 그녀는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어두워서 그녀가 꺼낸 물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꺼낸 물건을 꼭 쥐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자, 또 신비로운 고리들이 이번에는 그녀의 몸 주변을 감쌌다. 잠시동안 맴돌던 그 고리들이 사라지자 그녀는 이번에 뒤를 돌아서 나에게 무언가 사각형 큐브같은 것을 건네주었다.

"받아요. 남은 손으로 이걸 꼭 쥐고 있어요."
나는 그녀가 건넨 것을 받아들고는 자세히 보았다. 그녀가 쓰는 마법으로 추정되는 고리에서 본 기하학적 모양들과 비슷한 것들이 이 큐브에 새겨져있었다. 나는 한손에 간신히 쥐어지는 그것을 손으로 감쌌다.

"소리를 지워주는 마법이에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다시 내손을 잡고는 저기로 라고 말하며 다시 나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법을 썼다는 말과 달리 그녀가 걸을 때 마다 발소리가 들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발소리가 아직도 들리는데 괜찮은거에요?"

내 물음을 들은 그녀는 빠른 보폭으로 걸으며 말했다.

"범위 마법이에요. 일정 거리 붙어있는 사람에게는 들려요."

판타지 소설에서나 들을 법한 설명을 들은 나는 어떻게든 납득했다. 그녀는 뒤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뛰죠. 얼마 멀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바닥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하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는 홀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끝부분에 있는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계단 앞에 도착한 뒤, 그녀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놀라서 나도 방향을 틀고, 무언가 있나 싶어 고개를 내밀고 바라봤지만, 가까이 있는 벽면에 문은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 뒷편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벽에 손을 대더니 힘을 줘 밀었다. 그러자, 벽 한가운데에 세로로 금이 가고 두 짝으로 나뉘어지더니, 안쪽으로 밀렸다. 마치 숨겨진 문 같았다.

"여기서부터, 지하에요. 이 밑에 있는 문을 지나면 동굴이 나오는 데, 거기서 제가 들어온 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품에서 작은 보석 같은 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쥐자, 갑자기 보석에서 노란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밑이 어둡고, 계단 폭이 좁으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따라오세요."

내가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그녀는 다시금 문을 밀어 닫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보석으로 밑을 비추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그림자가 이 성에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기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좁은 계단을 조심스레 그녀의 뒷통수만을 보며 오랜시간 내려가자, 갑자기 그녀가 멈춰섰다. 앞에 무언가 있나싶어 바라보자, 그곳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 문은 단단해보였고, 이상한 문양같은 것들이 새겨져있어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보석을 잠시 땅에 내려둔 뒤에 양 손을 각각 문 한쪽에 대더니 그대로 힘을 주어 밀었다. 그러자, 드드득, 땅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문이 서서히 열렸다. 아까전 홀 천장만큼 높이가 있는 문을 힘으로 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문을 전부 다 연 그녀는 땀조차 흘리지 않고 다시 보석을 집어 앞을 비추었다.
청록색 암석들이 이룬 어둡고 습한 동굴이 보였다. 동굴 안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내 땀을 식혔다.

"발 밑이 불안정할지 몰라요. 조심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는 한번 뒤돌아본 뒤에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넓은 동굴안을 우리 둘은 천천히 걸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색적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왜 이런 성 지하에 이렇게 큰 동굴이 있는거지?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밟으며 나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언뜻 그녀의 보석이 앞을 비출 때마다 동굴의 풍경이 보였는데, 벽이나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앞을 향해 걷다 갑자기 의문이 생각나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하나요?"

딱 봐도 깊이가 상당해 보이는 이 동굴을 설마 몇 시간동안 걸어가야하나 싶어 나는 물었다. 내 물음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보고 한번 웃더니 대답했다.

"안심해주세요. 이 동굴 깊어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금방 도착할 거에요."

금방 도착한다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놀랐다. 그렇다는 말은 이곳을 빠져나가봤자, 얼마 멀지 않은 곳으로 나온다는 말 아닌가. 나는 놀라서 물었다.

"여기서 빠져나가도, 그 괴물, 계속 쫓아오지 않을까요?"

"그럴 걱정은 없어요. 그것은 아마 이 성을 지키는 존재같은 것이라서 여길 빠져나가는 순간 우리에게 흥미를 잃을걸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안심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자,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걸렸다. 어째서 그녀는 그것이 이 성을 지키기 위한 존재라고 추측했을까?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그것을 지웠다. 무언가 마법이나 그런 것으로 파악했던지, 이 성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그 그림자에 대해 알았을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한번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되면 정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 대한 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저... 왜 이곳을 통해 들어오신거에요? 성 밖에 숲이 있던데 거기에는 길이 없나요?"

내 물음을 들은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이더니 미심쩍게 대답했다.

"길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지나갈 수 없는 길이에요. 거기로 가봤자 목숨을 잃을 뿐이에요."

목숨을 잃는다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전망대에서 봤던 숲의 풍경을 떠올렸다.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지고, 달빛이 닿지 않아 어둠에 휩싸인 숲. 그곳에 그 그림자같은 생물이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레 깨어난 곳이 엄청 위험한 곳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걸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궁금한 것이 생겨났다. 그녀는 혼자서 이곳까지 온 것일까? 이런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일 정도로 그녀는 강한 것일까?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믿기 힘든 게 많았다. 마법을 쓰거나, 무거워 보이는 문을 두 손으로 밀어 열거나.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사람일까? 갑자기 그런 궁금증이 생겨났다.

나는 빠른 보폭으로 걷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연인을 위험을 무릅쓰고, 찾으러 온 그녀.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자, 그녀가 내뱉던 말들에 담긴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리온. 그녀의 연인. 그녀는 나를 리온이라고 불렀다. 본래 내 이름과 너무나도 다른 그 이 덕분에, 나는 내가 다른사람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단지 리온은 기억을 잃었을 뿐이라고. 내가 자신의 연인인 리온이 맞다고 믿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그녀를 속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음속에 죄악감이 생겨났다.

내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입을 다물고 그저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그녀가 걷는 속도를 떨어뜨려 내 옆에 섰다. 무슨일인가 싶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보자 아까전 전망대에서 그녀가 나의 뺨에 입맞춤을 한 기억이 떠올라, 나는 부끄러워졌다. 그녀도 무언가 쑥스러운지 힙겹게 나에게 말을 꺼냈다.

"리온... 저... 부탁할게 있는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그런 갑작스런 모습에 나는 당황해 대답했다.

"뭐, 뭔가요?"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쑥스러움을 숨기려는지 작게 미소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까전부터 계속 저에게 경어를 쓰고계신데... 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물론 그... 너무 갑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무 갑작스런 제안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본래 리온은 그녀를 편하게 불렀던 것일까. 마음 한 켠 어딘가에서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 혹시 괜찮다면 저를 부를 때 앨리스라고 불러주실 수 있나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내밀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 압박감이 느껴진 나는 고민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 한번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앞장섰다.
리온은 그녀를 앨리스라고 불렀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죄악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이 기억을 잃고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을 대한다면 어떤 기분이 느껴질까.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녀가 지금껏 나와 대화를 나눴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조금이나마 상상이되어 가슴이 무거워졌다.

"곧 도착할 것 같아요."

앞장서던 앨리스가 걷는 속도를 올리며 말했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앨리스를 따라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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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이에요."

앨리스는 보석을 앞으로 내밀어 구조물을 비추며 내게 얘기했다.
우리가 다다른 곳은 오래된 신전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신전 앞에 나란히 늘어선 기둥들은 부서지거나, 곳곳에 금이 가있었다. 이런 낡은 신전이 동굴 안에 있다니. 괴리감이 느껴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앨리스는 신전의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앨리스가 가진 보석에서 뿜어나오는 빛이 신전의 내부를 살짝 비췄다. 나는 당황해 앨리스의 뒤를 쫓았다.

"여,여기라고?"

신전 내부에 들어선 내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 안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는데, 곳곳이 부서져 바깥이랑 연결되어 있었다. 앞을 바라보자, 그곳은 벽으로 막혀있었다. 막다른 곳이었다. 어딘가 통로나 문이 없나 싶어 둘러봤지만, 어두워서 먼 곳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와주세요."

앨리스는 내 손을 잡고 신전 안을 걸었다. 앨리스는 나를 데리고 벽의 어느 부분에서 멈춰섰다. 앨리스 앞의 벽에는 이상한 문양이 그러져있었다. 앨리스는 그 부분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이곳을 힘줘서 누르면, 문이 돌아갈거에요."

앨리스는 벽에 손을 대고, 살짝 힘을 주는 듯했다. 그러자,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며, 벽의 한 면이 회전했다. 앨리스는 나를 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주세요. 저는 나중에 뒤따를테니."

먼저 들어가라는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먼저 들어가라고? 지금까지 선두는 앨리스가 맡았다. 그녀가 길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만 할 이유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같이 들어가거나, 그녀가 먼저 들어가야 맞지 않나? 그런생각이 들어 나는 말을 골라서 얘기했다.

"앨리스가 먼저 들어가면 안될까? 무서워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얘기하자, 앨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까 전 사라지게 했던 의심의 불씨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안돼요... 이 방에는 각각 한 사람씩 먼저 들어갈 수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마법이 발동하지 않아요..."

마법? 나는 예상을 벗어나는 단어가 나와 당황했다. 지금 이 방에 들어가면 어떤 마법이 작동한다는 말인가? 걸어서 이 성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나는 앨리스에게 물었다.

"마법? 무슨 마법이야?"

"이동 마법이에요. 이 방에 들어가면 저 멀리, 출구로 설정된 곳으로 마법이 우리를 보내줄 거에요."

터무니 없는 방법을 들은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마법? 왜 굳이 방에 들어간다는 행위를 해야 작동하는거지? 앨리스가 그냥 그 마법을 쓰면 안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까 전, 앨리스가 소리를 없애려 마법을 쓰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런 황당한 일이 가능하다면 먼 곳으로 순간이동 하는 일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앨리스가 먼저 들어가주지 않을래? 저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불안함이 남은 내가 앨리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또 다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아니요... 꼭 먼저 리온이 들어가주셔야 해요..."

거절당한 나는 이유를 천천히 생각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먼저들어가야 할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왜 저리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지? 불안해진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왜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해?"

내 물음을 들은 앨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건... 만약 제가 먼저 이동한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어느정도 납득이 됐으나, 그럼에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나를 속여 무언가 장치를 해둔 이곳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은 아닐지. 그런 의심이 속에서 생겨났다.

"아니... 그것도 불안해서...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앨리스가 먼저 들어가줘."

내가 각오를 하고 고집을 부리자, 앨리스는 그럼에도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먼저 들어가주셔야 해요..."

그 대답을 들은 내가 의심스러워서 앨리스에게 다시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을 때 였다. 딱,딱. 그런 소리가 우리들 뒤에서 들려왔다. 짧은 소리였지만, 동굴 안에서 울려 똑똑히 들렸다. 등에 소름이 돋은 뒤를 돌아봤다. 마찬가지로 뒤로 돌아 앨리스는 보석의 빛으로 앞을 비췄다.

청록색 암석을 뾰족한 두 다리로 밟으며 그것은 서있었다. 그림자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한발 움직이자, 공포 때문에 머릿속이 텅비었다. 상황을 파악한 앨리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나에게 소리쳤다.

"빨리 먼저 들어가주세요!"

앨리스가 나를 떠밀었지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굳어있었다. 앨리스가 그런 나를 떠밀며 강제로 밀어붙이고 있던 때였다. 뒤에서 빠르게 무언가가 돌을 때리는 소리다. 달리고 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놀라서 앞으로 움직이려 했을 때, 소리는 이미 우리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한 발 앞으로 내딛은 순간, 내 뺨에 무언가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닿았다. 무엇인가 싶어 그만 뒤를 돌아보자, 앨리스가 허리를 숙이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피였다. 검붉은 피가 앨리스의 어깨 부분에서 흘러 흰 옷을 적시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순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하니 있자, 그런 앨리스 뒤에 있던 그림자가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어오는 그림자의 날카로운 팔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있다. 아, 저걸로 배였구나. 나는 이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무서운 나머지,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검은 형체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나도 죽겠구나. 베여 죽으면 많이 아플 것 같은데. 이상한 생각이 계속 생겨났다.

내가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었을 때. 허리를 숙이고 있던 앨리스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앨리스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팔을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지, 오른쪽 어깨만 내려가 있었다. 앨리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떨리는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가만히 있던 내게 기세좋게 다가온 앨리스는 나를 밀었다. 강한 힘에 밀린 나는 뒷편에 있던 벽에 부딪혔다. 저릿한 충격과 함께 내 등에 닿은 벽이 살짝 밀린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밀고 휘청거리며 쓰러진 앨리스는 내게 말했다.

"어서... 가세요...! 저도 곧... 따라갈테니..."

힘겹게 내뱉은 그 목소리는 쥐어짜낸 것 마냥 흔들리고 불안정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그런 앨리스를 보며 갈등했다. 이대로 내가 가버린다면 앨리스는 저것에게 죽고 만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빨리...!"
그런 나를 재촉하듯 앨리스는 소리쳤다. 검은 그림자가 한발짝 내게 다가왔다. 나는 두려움보다는 앨리스가 더 걱정됐다. 앨리스를 도와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 앨리스와 내 눈이 맞았다. 눈물을 머금은 앨리스의 눈은 나를 필사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재촉을 읽은 나는 벽을 밀었다.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나며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뒷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앨리스를 뒤돌아보며 몸을 던졌다. 앨리스는 내가 떠나는 모습을 고통을 참는 표정으로 애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앨리스가 쓰러진 곳의 바닥에 피가 고여있었다. 그림자가 내가 떠나는 모습을 보곤 앨리스에게 다가가는 풍경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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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 절대로 여기서 움직이지 말아요... 제가 돌아올 때 까지요...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에요."

그 말을 남기고 나는 그를 남겨둔 채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왔다. 방금 들린 소리와 그 기척. 카린이 위에 무슨일이 있나 궁금해진 나머지, 상황을 확인하려 한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내 예상대로 전망대 밑에서는 카린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린이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보고 무언가 말을 하려하는 것을 본 나는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카린은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런 카린의 뒤를 따라 전망대 밖으로 나왔다.

전망대 밖으로 뒤따라 나온 나를 보며 카린은 아무말도 없이 서있었다. 나는 그런 카린을 보며 마법을 썼다. 지금부터 카린과 나눌 대화는 그의 귀에 들어가면 안된다. 거리가 떨어져있긴 하지만, 고요한 밤이라 소리가 들릴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내가 마법을 쓴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지켜본 카린이 내게 눈초리를 보냈다.

"이제 말해도 돼요."

내가 허락을 내리자, 카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도대체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곳에 누가 있습니까?"

카린이 전망대의 옥상을 올려다보며 그런 의문을 꺼냈다. 눈치채지 못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린을 바라봤다. 카린을 믿어도 될까? 지금부터 카린에게 부탁할 것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갈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주인님의 신뢰와 애정을 얻기 위해서는 꼭 그녀가 필요했다. 게다가 기억에 혼란을 잃은 주인님을 이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도 말이다.

주인님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싹튼 욕망에서 비롯한 계획을 나는 다시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이것말고는 수가 없다. 카린이 어떻든, 이 작전은 무조건 성공해야만한다. 괜찮다. 카린은 나를 거역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생각한 계획이 틀어졌을 경우가 상상이되자, 나는 초조해졌다. 손가락을 입에 가까이하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만약 카린이 내 명령을 거부한다면, 뒷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카린이 다른 이에게 이르기라도 한다면, 주인님은 나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배신당한 눈초리로 나를 보거나, 아니면 나를 버리실지도 모른다. 주인님이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생각하자, 순간 배 안이 쑤셨고, 가슴이 먹먹했다.
싫다. 그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다. 차라리 그런 처벌보다는 주인님이 나를 죽여주는 게 훨씬 좋다. 찌르건, 때리건 아무것이나 좋다.

갑자기 초조해하는 나를 본 카린이 당황해 괜찮으십니까? 라며 물었다. 그 말에 위험을 감수하고 각오를 다진 나는 말을 꺼냈다.

"카린, 제가 지금부터 당신에게 말하는 내용은 절대 다른이에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시겠나요?"

손톱을 씹는 것을 그만두고 팔을 내린 나를 보며 카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최대한 순서를 생각해서 꺼낼 말들을 정리했다.

"다른 메이드들에게는 물론이고... 도로시나 안나에게도 절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앞으로 내가 말할 것이 심상치 않은 내용임을 눈치챘는지 카린은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앨리스님의 명령, 다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카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카린에게 할 말을 골랐다.

"좋아요. 우선, 지금부터 제가 당신에게 할 말을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소란스러운 짓을 하면 안됩니다."

내가 그리 이르자,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안함을 숨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처음 내 말을 들은 카린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윽고 경악에 찬 표정을 했다. 카린의 하늘색 눈동자가 크게 커졌다. 카린은 입을 벌리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듯 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카린은 나에게 달려들 기세로 내게 물었다. 나는 의외로 놀라지 않는 카린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네, 주인님이 돌아오신 건 사실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카린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저, 저 위에 있으신겁니까?"

카린은 전망대 위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 그렇지만 지금 주인님에게 문제가 많아요."

내 말을 들은 카린이 다시 한 번 놀랐다.

"네?! 도대체 무슨 일이..."

그런 카린의 모습을 보고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카린은 주인님과 만난 적이 없을텐데. 묘한 불안이 생겨날까 싶어 나는 카린에게 말했다.

"주인님은 지금 기억을 잃으신 상태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카린은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그런..."

이대로라면 시간이 끌릴지도 모른다. 나는 옥상에 남겨진 주인님이 생각났다. 분명 지금 혼자남겨져서 공포에 떨고 계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마음이 편치않았다. 어찌됐건 빨리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카린에게 물었다.

"카린. 지금부터 당신에게 명령을 하겠어요. 제가 하는 명령, 당연히 수행할 것이죠?"

진지한 눈초리로 카린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카린은 주인님의 얘기에 혼란스러운듯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카린의 모습을 미심쩍게 보며 말했다.

"일단 카린, 분열하세요. 여기서 당장."

카린은 갑작스런 내 명령에 놀란 포졍을 지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카린을 바라봤다.

"네? 지금말인가요?"

"그래요. 빨리 하세요."

내가 재촉하자, 카린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로 나를 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만히 카린을 바라봤다. 카린은 잠시 머뭇머뭇 거리더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카린의 팔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은색은 점점 팔에서 번져, 옷위를 감싸기 시작했고, 이윽고 카린의 몸은 전신이 검정색으로 물들었다. 카린의 몸 전부가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그 뒤, 검은색으로 변한 카린의 팔이 꾸물거렸다. 그 팔에서 갑자기 검은색 지렁이 같은 것이 나오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그것은 꾸물거리며 점점 커지더니 카린의 크기와 비슷한 것이 되었다.

"카린 그대로 변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있으세요. 나머지 한 쪽도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슷한 형체의 모습을 취한 검은 형체를 보고 그 옆에 서있는 카린에게 말했다.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카린의 발밑이 칠흑같은 검정으로 뒤덮이더니 이윽고 온 몸을 까맣게 칠했다. 나는 두 검은 형체의 모습에 서로 다른 곳이 없는지 면밀히 살펴봤다.

내가 지금부터 행하려는 계획은 상당히 리스크가 큰 계획이다. 나와 카린외에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순간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보다 더욱 두려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주인님에게 미움받는 것은 끔찍한 방법으로 천천히 고문받는 것 보다 더욱 무서운 처벌이다.

나는 각오를 다시금 다지고 카린에게 말했다.

"카린. 지금부터 당신에게 명령할 일은 조금 꺼림칙하고 이상한 것일 수도 있어요."

내가 말을 끝내자 검은 형체가 허리를 숙였다.

"저는 앨리스님의 어떠한 명령이든 수행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반문했다.

"설령 그것이 주인님을 속이는 일이라도?"

내 말을 들은 카린은 허리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검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하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카린은 주인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녀를 거둔 것은 주인님이 사라지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러나, 나는 주인님이 사라지고 나서 그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을 풀 방도가 없어 카린에게 자주 주인님에 대한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그녀 또한 주인님의 훌륭함과 그분의 존재가 지닌 위엄에 대해 알기에 주저 할 수 밖에 없다.

"무,물론입니다."

덤덤한 척을 하는 카린을 보며 나는 내심 걱정이 됐지만, 여기까지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 카린에게 말했다.

"카린 당신은 연기를 해야합니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완벽하게 수행해야해요."

내 말을 들은 카린은 다시금 놀라 반문했다.

"연기요...?"

"네. 지금 저 전망대 위에는 주인님이 계십니다. 카린, 지금부터 당신이 할 일은 그 모습 그대로 주인님을 덮치는 괴물인척 연기를 하는 거에요."

"네...?"

"제가 말한 그대로에요. 그 모습 그대로 괴물인척 주인님하고 저를 덮치는 거에요. 자세한 타이밍이나 지시는 제가 동조 마법을 통해 지시를 내릴테니 그걸 따르면 돼요."

내 말이 끝났음에도 카린은 그 새까만 형체의 얼굴로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았어요?"

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그제서야 카린은 고개를 숙였다.

"네..."

자신없이 내뱉은 카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화가나서 카린에게 엄하게 주의를 줬다.

"절대로 말을 내뱉어서는 안돼요. 그저 입 다물고 제 지시를 따르면서 연기를 하세요. 격이 낮은 언데드라도 된 것마냥."

"알, 알겠습니다."

카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카린의 분신을 보며 말했다.

"또 나머지 한 쪽 몸은 성 안 창고나 물품을 보관해둔 방에 몰래 들어가서 제가 말하는 물품들 위주로 챙기세요. 절대로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돼요."

"...알겠습니다."

카린은 방금 내 명령으로 내 의도가 무엇인지 약간이나마 짐작한 것인지 대답이 조금 느렸다. 나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카린에게 다가가 그 검은 몸에 손을 대고 마법을 시전했다. 약간의 틈을 두고 마법을 쓴 뒤에, 나는 한발짝 물러나 머릿속으로 말을 중얼거리며 카린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ㅡ들려요?

ㅡ네, 잘 들립니다.

머릿속에서 카린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말들을 나열했다.

ㅡ한쪽은 빨리 성안으로 들어가세요. 절대로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됩니다. 만약 들키지 않고서는 물품을 빼내지 못하겠다면 제게 보고를 한 뒤에 포기하고 그대로 성 밖으로 빠져나오세요.

ㅡ알겠습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울린 뒤에, 검은 형체중 하나가 어둠에 녹아들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 나는 할말을 고르며 남은 것을 쳐다봤다.
과연 카린은... 주인님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고 무사히 내 명령을 따를 수 있을까? 카린은 지금까지 주인님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내 불안을 모르는 것인지 카린은 다시금 내 머릿속에 목소리를 보냈다.

ㅡ이쪽은 무엇을 할까요?

나는 손톱을 씹고 싶은 충동을 견디며 카린에게 명령했다.

ㅡ우선 제가 전망대 위로 올라간 뒤에 신호를 보내면, 저를 따라올라오세요. 그 뒤에는 그곳에 있는 주인님과 저를 덮치는 척 연기를 하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때마다 말해줄테니, 그대로 따르기만하세요. 절대 제가 명령한 행동말고는 어떠한 쓸데없는 짓도 해서는 안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차갑고 축축한 공기로 가득찬 동굴을 나와 주인님 둘이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에 몇몇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어찌됐든 방해를 받지 않고 도착했다. 유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곳에 가서 전송마법을 쓰기만 한다면 일단 한 숨 놓을 수 있다.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나는 뒤를 돌아봤다. 주인님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 모습이 보였다. 가여운 그 모습은 어른 아이가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부모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는 것 같았다. 주인님이 내게 의존하고 계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 몸에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져 얼른 의식을 딴 곳으로 돌렸다.

나는 아까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 올렸다. 카린. 카린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내 명령을 따라 전망대 위로 올라온 카린은 나를 밀치며 연기를 시작했다. 그 부분까지는 다 내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시 명령을 내리기 전에, 카린은 갑자기 주인님을 밀치더니 그 몸을 가까이했다. 도대체 왜? 카린과 주인님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나, 설마 카린이 그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는 바닥에 넘어진 채, 그 장면을 몇초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뒤, 내가 명령을 다시금 전하자 카린은 정신을 차렸다. 그 후로 급박한 상황을 연기해야만 해서 미처 그 때에 대해 카린에게 추궁하지 못했다. 지금 여유가 있는 이 시간에 카린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ㅡ카린 들려요?

내가 머릿속으로 카린을 부르자, 잠시 시간이 지나고 응답이 왔다.

ㅡ네, 앨리스님. 명령대로 부탁하신 물품들은 다 확보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카린이 먼저 화제를 꺼내서 추궁하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카린에게 물었다.

ㅡ보석과 장신구를 제외한 화폐는 어느정도 확보했나요?

ㅡ그…그게… 어, 금화 2매정도 확보했습니다.

카린의 답변을 듣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건지 카린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ㅡ화폐의 보관같은 건 아이샤가 담당하는 일이라서… 들키지 않고서 빼내기는 힘들 것 같았습니다...

아이샤. 듣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이름이 언급됐다. 간사한 여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현금을 더 확보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 년에게 들킨다면 모든 게 끝이다. 현금보다도 더 중요한 게 남아있다.

ㅡ엘릭서나 포션은 몇 병 확보했나요?

바깥에 나갔을 때 주인님의 몸에 무슨일이 생길지 모른다. 카린에게 꼭 많은 수량을 확보하라고 당부한 것들이다.

ㅡ엘릭서는 보관되어 있던 세 병 모두 확보했습니다. 포션은 전체 수량은 30병정도. 질 좋은 것만 센다면 15병 정도 확보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가슴속에 있던 커다란 부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엘릭서를 모두 확보한 것은 크나큰 수확이다. 내가 칭찬의 말을 건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카린이 자신없게 얘기를 꺼냈다.

ㅡ저… 그, 엘릭서를 훔치는 과정에서… 흔적이 크게 남은 것 같은데…

ㅡ상관없어요. 어차피 들키는 건 시간문제에요.

여기 남겨진 불쌍한 년들은 분명 나와 주인님이 이곳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것이 뻔하다.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들킬 것이 뻔하다. 아이샤. 다른 멍청한 년들은 몰라도 그 년은 분명 단서를 잡을 것이다.

어쩐지 초조해지기 시작해서 나는 자신을 타일렀다. 상관없다. 들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그 동안에 흔적을 남기고 거리를 벌리면 된다. 아무런 단서가 없기 때문에 목적지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틀림없이 여기 남겨진 년들은 서로를 추하게 헐뜯고 공격할 것이 분명하다. 시간은 많다. 괜찮아.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처버리고 카린에게 아까전에 있었던 일을 묻기위해 말을 꺼냈다.

ㅡ카린?

ㅡ네?…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카린이 마치 혼나는 강아지마냥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ㅡ아까 전, 전망대에서 주인님에게 한 행동은 뭔가요? 저는 분명 주인님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명령을 했는데.

ㅡ아…

가시돋힌 내 말을 듣자 카린은 말문이 턱 막힌 듯 했다.

ㅡ그… 죄송합니다.

ㅡ그건 당연하죠. 제 말은 이유를 물어보는 거에요. 왜 그런 짓을 했죠?

ㅡ그…그게…

카린은 내 추궁에 말을 잊지 못하고 침묵했다. 나는 점점 열이 받기 시작해 카린에게 짜증을 내려 할 때에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ㅡ저… 주인님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ㅡ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거죠?

변명조차 되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카린에게 열이 받아서 퉁명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잠시 후 카린은 다시 말을 꺼냈다.

ㅡ그… 저…

카린이 말을 끌자 당장 일갈하고 싶었으나 꾹 건뎠다.

ㅡ가까이서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ㅡ네?

얼빠진 대답을 들은 나는 황당한 나머지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뻔해서 흠칫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고? 말이 안된다.

ㅡ아니, 아. 그건 말이 안돼요. 아니,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왜 주인님을 밀친 거에요? 제가 분명 주인님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ㅡ그… 죄송합니다. 그때는 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서 정신이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카린의 말을 들으며 나는 감정을 추스렀다. 대답이 예상을 벗어난 것이라 화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카린의 해명은 마치 그녀가 주인님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카린이 주인님에게 해를 가할 마음을 먹고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예민하고 상상을 부풀렸을 수 있지만 도저히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카린에 대한 불신감과 짜증이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어떻게 네가 감히.

ㅡ카린?

ㅡ…네.

ㅡ주인님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ㅡ네?

ㅡ당신이 주인님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요? 그 감상을 듣고 싶어요.

ㅡ저… 음… 그 뭐라고 해야되지… 잘 생기셨고… 또 무척 상냥해보이시고…

카린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를 곱씹을 때 마다 불안한 상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았다. 당장 카린에게 욕을 퍼부으며 그녀를 모욕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유일한 협력자다. 원래 바깥에 나간 뒤에도 카린에게 조력을 구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어떻게… 주인님과 같이 시간을 보낸적도 없고, 말도 한번 섞어본 적 없으면서 감히… 그녀가 주인을 접할 수 있던 순간은 오로지 내가 주인님에 대해 얘기할 때였다. 나에 대한 배려을 잊어버리고 본인 입장에 대해 망각한 채 주인님에게 호감을 가지다니. 게다가 그것을 충동적인 행동으로 발산해 주인님을 다치게 하려 하다니… 머리에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ㅡ카린?

ㅡ네.

ㅡ우선 물품을 확보한 쪽을 움직여서 지하 입구에 있는 나머지와 합류하세요. 합류한 뒤로는 제가 지시하면 한 쪽만 그것에 따라서 움직이세요.

ㅡ네. 알겠습니다.

나는 화를 억누르며 카린에게 침착하게 명령했다. 아무리 그녀가 마음에 안들어도 지금 내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주인님은 여전히 내 뒤를 불안한 걸음으로 뒤따르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자 지금은 참고 견뎌야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모든 건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난 뒤에 시작된다. 카린에 대한 대처는 그 뒤에 생각하자.

그전에… 지금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과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귀중한 시간을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취한 것 마냥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추악한 년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이런 경험을 할 순 없다. 지금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헛되게 날릴 수는 없다.

그는 갑작스레 멈춘 나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감과 근엄함이 넘치던 표정도 좋지만 저런 색다른 일면 또한 무척 좋았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은 꿈에도 모를 저런 일면을 혼자 봤다고 생각하면…
그러나 좋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약간 아프기도 했다. 그가 아직까지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신뢰받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

나는 뒤돌아서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지금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천천히, 착실하게 그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키워나갈 수 있게끔 만들 시간은 충분하다.

"리온... 저, 부탁할게 있는데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주인님과 나는 무사히 유적에 도착해서 전송 마법이 담긴 방 앞에 도착했다. 이제까지 가졌던 긴장감이 풀리고 나는 주인님에게 방에 먼저 들어가실 것을 요구했다.

"먼저 들어가주세요. 저는 나중에 뒤따를테니."

내 말을 들은 주인님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담겼다. 역시. 주인님은 아직도 내가 배신할 가능성을 마음 한 속에 담아두고 있구나. 예상은 했었지만 가슴이 찌르는 듯이 아팠다.

"엘리스가 먼저 들어가면 안될까? 무서워서…"

주인님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속이려했다. 슬슬 그 방법을 써야겠구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안돼요… 이 방에는 각각 한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마법이 발동하지 않아요…"

"마법? 무슨 마법이야?"

"전송 마법이에요. 이 방에 들어가면 저 멀리, 출구로 설정된 곳으로 마법이 우리를 보내줄 거에요."

주인님은 내 설명을 듣고도 황당한 표정 그대로였다. 주인님은 몇초간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흔든 뒤에 내게 다시 제안했다.

"그러면 앨리스가 먼저 들어가줄래? 저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주인님에게 불신이 담긴 말을 듣는 것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것 만큼 아팠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주인님에게 필사적으로 말했다.

"아니요… 꼭 먼저 리온이 들어가야해요…"

"왜 내가 먼저 들어가야해?"

드디어 주인님은 의심이 담긴 말을 숨기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꺼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카린에게 말을 보냈다.

ㅡ카린. 아직도 저희 뒤에서 제대로 대기 하고 있나요?

ㅡ네. 입구 뒷편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ㅡ그럼, 제가 신호를 주면 그때 모습을 드러내세요. 그리고 아까 전 제가 지시한 대로 따르세요.

ㅡ네. 알겠습니다.

카린에게 메시지를 보낸 나는 그 후에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게 연기하며 주인님에게 말했다.

"그건… 만약, 제가 먼저 이동한 뒤에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서…"

"아니… 그것도 불안해서… 앞에서 무슨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앨리스가 먼저 들어가줘."

아무래도 지금 주인님 마음속에 싹튼 불신은 쉽게 없애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카린에게 명령했다. 속내가 엿보일까봐 긴장이 됐다.

ㅡ카린, 이제 아까 전 제가 말한대로 모습을 드러내주세요. 이번에는 아까 전과 같은 일이 없도록해주세요.

ㅡ네. 주의하겠습니다.

카린의 대답이 끝나자, 뒷편에서 무언가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카린이 또 다시 주인님에게 뛰어들지 않을지 걱정했다.

고개를 돌려 주인님을 살펴보자 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듯 안색이 변했다. 나는 뒤로 돌아 뒷편을 밝게 비췄다. 그곳에는 검은 형체로 변한 카린이 있었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카린에게 명령했다.

ㅡ제가 신호를 주면 그 때 시작하세요. 베는 곳은 눈에 띄는 상체 쪽으로 해주세요. 당부한대로 절대 절 신경써서 작게 상처내면 안돼요. 눈에 띄게끔 잘 해요.

ㅡ네…

지금부터 하는 짓이 솔직히 마음에 걸리긴 하나, 주인님의 호감과 신뢰를 한번에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물론 주인님을 속이는 짓이기는 하나, 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더욱 나를 믿고 좋아할수록 나는 그를 위해 모든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 모든것은 주인님을 위한 것이다.

다친다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카린이 저번처럼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돌발행동을 하는 것 딱 하나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여기서 돌이킬 수는 없다. 나는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 뒤에 행동했다.

ㅡ지금이에요!

카린에게 명령을 내린 뒤에 나는 곧바로 주인님에게 다가가서 그를 벽쪽으로 밀었다. 거센 손길로 주인님을 밀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조금 느껴졌으나, 그것을 담아둘 시간이 얼마 없었다.

"빨리 먼저 들어가주세요!"

다급함을 담아서 크게 주인님에게 소리쳤다. 주인님은 그런 내 행동에 당황하셨지만, 카린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 몸을 움찔 떨었다. 뒤에서 바닥을 빠르게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카린이 내 명령을 듣기를 기도했다. 어느새 카린은 내 뒤에 도착해서 그 날카로운 팔을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의 궤도를 읽으며 카린이 주인님에게 위해를 가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어깨에 카린의 팔이 파고들었을 때, 나는 다리에 힘을 풀고 쓰러졌다. 오른쪽 어깨부분에서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피가 꽤 역동적으로 흩날렸다. 나는 안심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픔에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카린을 봤다. 그녀는 내 지시에 따라 주인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주인님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셨는지 가만히 굳어있었다. 나는 더욱 자극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왼쪽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손바닥이 피로 젖었고, 오른쪽 어깨에서 무언가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표정을 찌푸리고 거친 숨을 내쉬며 주인님을 바라봤다. 주인님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을 때 나는 그를 향해 달렸다.

오른쪽 팔을 움직이지 못해 이상한 모양새로 주인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왼쪽 팔을 떨며 주인님을 강하게 벽쪽으로 밀쳤다.

"어서…가세요…! 저도…곧…따라갈테니…"

숨이 막히는 듯한 목소리를 꾸며내 주인님에게 말했다.
처량하게 보이도록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 또한 유지했다. 피에 흠뻑 젖은 내 모습은 분명 주인님의 시야에 각인됐을 것이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주인님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가슴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깨를 찌르던 고통이 뜨겁고 기분좋은 자극으로 변한 것같이 느껴졌다. 성공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은 나를 한 차례 바라본 후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몸을 기대어 체중을 싣자 벽이 회전하며 어두운 뒷공간이 나타났다. 주인님은 그곳으로 쓰러지듯이 들어갔다.

주인님이 시야에서 모습을 감춘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손에 닿을 수 조차 없을 것 같던 무언가가 드디어 형태를 드러내 모습을 보였다. 주인님이 날 바라보던 그 시선. 고통스러워 하는 나와 붉게 물든 어깨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 심지어 마지막에는 미천한 나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신 것 같았다.

주인님은 내 이런 모습을 과연 언제까지 간직할까? 방금 있었던 일을 언제까지 기억할까? 그것이 영원했으면 하고 나는 바랬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거칠었으면 좋겠다. 제발 이 기회가 특별한 감정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를. 이 감정을 잊을 정도로 더 자극적인 경험이 앞날에 오기를. 나는 멍하니 서서 피를 흘리며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빌었다.

"괜찮으십니까?!"

몽롱한 내 상태를 깨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여운을 지워버리고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카린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허겁지겁 나에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호들갑떨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카린에게 다가갔다.

"카린 잘했어요.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습니다."

내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린은 내 상태를 걱정했다.

"피가… 제가 조절을 잘못한 탓에… 가져온 포션을 쓸까요?"

카린이 내뱉은 제안에 좋았던 기분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것들은 모두 주인님의 위급상황에 사용할 것인데. 어떻게…

내 안색을 살핀 카린이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잘해준 카린을 더 이상 꾸짖기 싫어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카린. 가져온 물품은 한 쪽이 가진 체 여기서 대기하고, 나머지 한 쪽은 성으로 돌아가세요. 저는 빨리 가봐야해요."

나는 어깨에 미약한 치유마법을 시전하며 말했다. 내 왼손에서 따스한 빛이 나며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했다. 주인님은 저 너머 어두운 곳에서 홀로 떨고 계실 것이다. 내가 넘어갔을 때, 내 상처가 크다면 분명 주인님은 혼란에 빠진다.
크게 벌어졌던 상처가 어느정도 아문 것을 확인한 나는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빨리 넘어가야 주인님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는다. 내가 벽을 향해 빠르게 뜀박질을 시작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요?"

알게 뭐야.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카린의 역할은 앞으로도 중요하다. 나와 주인님이 모든 훼방꾼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그 순간까지 그녀는 나를 위해 움직여야한다.

"카린. 걱정마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도 이쪽으로 오게 될 거에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벽을 밀었다. 찰나에 뒤를 돌아보자, 카린이 고개를 숙이며 가만히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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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팠다. 요즘 잠에서 깨어날 때는 항상 이런 식이다. 일 년 전부터, 잠에 제대로 들지 못한다. 항상 부정적인 것들이 머리속을 휘저어 잠을 설친다. 게다가 어제는 앨리스하고 말다툼을 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창 밖으로 삐져나온 햇살을 노려보며 나는 느릿느릿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넓은 방 안에 먼지가 쌓여 퀘퀘한 공기가 코안에 들어왔다. 기분나쁜 아침이었다. 두통이 느껴져 나는 이마위에 손을 올렸다.

한숨을 내쉬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 눈을 뜨자마자 저절로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날이 갈수록 내 충동은 점점 커져간다. 무척이나 답답하고 괴로운 것이 가슴 속에 쌓여가는 것 같아 나는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 해맸다. 결국 찾아낸 방법이 주인님의 흔적을 쫓아가는 것. 그것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항상 방해받는다. 여기 성에 있는 것들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면서 내가 주인님을 찾아 헤매어 돌아다닐 때 제지한다. 그 여자들은 분명 주인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 아니면 어떻게 이런 충동을 품고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역겨운 것들. 그들이 주인님에게 품은 감정은 그저 계절이 바뀌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들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마냥 군다. 그런 감정이 담긴 표정을 볼 때면 검으로 베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으득. 나는 이불을 찢어버릴 정도로 꽉 쥐었다.

그 때였다. 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폭음에 놀란 나는 상념을 지우고 옆을 돌아봤다. 방문이 부서져 이리저리 파편들이 방안에 나뒹구는 게 보였다.

"안나. 아이샤가 부른다."

방 입구에 메이드 복을 입은 키가 큰 여성이 서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회색빛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에 날렵한 이목구비. 오른 쪽 뺨에 난 흉터 두 개. 짜증이 서린 표정.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머리 위에 난 회색 털로 덮인 짐승 귀 두개. 두통을 참으며 저 여성이 누구인지 파악하자 속이 쓰려오고 가슴 속에 불이 난 듯 했다. 린. 마주치고 싶지 않은 여자를 아침부터 보다니.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노려봤다.

"짐승은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르나?"

증오가 담긴 비아냥을 내가 쏟아내자 린의 귀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문틀에 기대서 나를 쏘아봤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는 꼴이 다혈질인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샤가 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문짝같은 건 나중에 다시 달면 되잖아."

린은 그렇게 말하며 긴 다리를 뻗어 산산조각난 문 조각들을 발로 툭툭 찼다. 메이드 복이 나풀거리는 그 모습이 무척 거슬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더욱 오기가 생겼다.

"아침부터 털 날리는 공기를 마셔야 하냐? 기분 더럽네."

린은 이번에는 견디기 힘든 것인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뭐라고? 아침이라 정신이 나갔냐?"

"내가 짐승새끼도 아니고."

비웃음을 지으며 조롱하자, 린이 팔짱을 풀고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키가 큰 그녀는 큰 보폭으로 얼마 되지 않아 내 앞에 도착해 나를 내려다봤다.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쏘아보고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가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엿보였다. 나는 덤덤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뒤로 약간 물러나 침대에 앉았다. 이불에 손을 넣자 딱딱한 검 손잡이 부분의 감촉이 느껴졌다.

"방에 처박혀 있더니 미쳤냐? 저번처럼 또 땅에 머리 처박고 싶어?"

송곳니를 내보이며 위협하듯이 그녀는 말했다. 그르렁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듣자, 그때의 기억이 한순간 떠올랐다. 굴욕적이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긴 하지만, 저 개년을 두려워 할 정도의 경험은 아니다. 아무래도 본인은 저 얘기를 꺼내면 내가 두려워 꼬리를 말 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 짐승다운 생각이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야? 개다운 생각이네."

비웃으며 내뱉자 린의 목에 핏줄이 세워지는 게 보였다. 입을 벌리고 꽉 문 이빨을 내보이며 그녀는 나를 물어죽일듯 노려봤다. 나는 오른손으로 들키지 않게 검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고 한번 더 도발했다.

"근데 개라고 하기에는 충성심이 너무 부족한것 같은데? 금방 다른 주인한테 꼬리 흔들잖아."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린의 인내심을 넘어섰는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목에서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손을 펴고 손톱을 세웠다. 나는 검을 다시 단단히쥐며 이불속에서 꺼내 언제든지 휘두를 준비를 했다. 서로 마주보며 엄청 짧은 찰나가 지나갔다.

"실례합니다~."

폭발할 것 같은 공기로 가득한 방안을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매꿨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혀를 찼다. 린은 아이샤가 제지를 했음에도 계속 그르렁대고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기회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음에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긴장했다.

"역시나 이럴 줄 알았어! 린 이제 그만해."

어느새 린의 옆에서 한 여자애가 나타났다. 린과 마찬가지로 메이드복을 입고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여성. 아이샤였다. 아이샤는 미소를 지으며 린을 달랬다. 린은 아이샤를 내려다본 후에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혀를 찼다.

"이 년이 먼저 시비를 걸었는데…"

린은 화가 풀리지 않은 건지 선뜻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두 명을 살펴보며 언제든지 칼을 뽑을 준비했다.
아이샤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지금부터 할 얘기를 들으면 싸울 생각도 안날텐데…"

아이샤는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얘기를 흘렸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샤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불러 말을 전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 화가 식자, 이제서야 지금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린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아이샤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야? 여기서 들려줘."

아직도 분이 안풀려 발을 구르는 린 옆에서 아이샤는 내 진지한 물음을 듣고는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나는 문뜩 두려워졌다.

"음… 원래는 밑에서 다 얘기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들었으니 그냥 말할게. 린 너도 들어."

아이샤는 옆에 선 린의 팔을 잡아당기며 주의를 끌었다. 린의 큰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린은 견디지 못하겠는지 퉁명스럽게 알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아이샤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아이샤는 린을 내 옆에 세웠다. 그리고 오른손을 펴서 손가락 두 개를 들고 우리에게 내밀었다.

"두 가지. 두 가지 아주 큰 일이 있었어."

있었어? 어떤 사건이 이미 벌어졌다는 의미인가. 나와 린은 서로를 무시하는 척하며 아이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번째. 어젯밤 주인님이 돌아오셨어."

"뭐?!" "뭐라고!"

아이샤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린은 자리를 박차고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주인님이 돌아오셨다고? 삼년만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머리속을 휘젓는 의심과 기대에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아이샤의 말이 몇번 머리속을 맴도자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그때 분명 주인님의 방에 밤늦게 찾아갔었는데. 앨리스와 말다툼 했던 것 또한 기억난다. 그 이후에 주인님이 돌아오셨단 말인가? 거의 꼭두새벽에? 의문들이 계속 생겨났지만 주인님이 돌아오셨다는 그 말 자체가 희망과도 같았다.

"어제 언제? 새벽에?!" "지금 주인님은 어디에 있어!"

나와 린이 아이샤를 잡아먹을 듯이 소리치며 묻자, 아이샤는 손가락을 하나만 펴서 우리에게 내밀었다. 옆에서 린의 시끄러운 호흡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진정해. 두 가지가 있다고 했잖아. 지금 주인님은 여기에 안계셔."

"그게 무슨!…"

아이샤의 얘기를 듣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주인님이 여기 없다고? 그러면 또 우리를 버리고 떠나신건가? 아니면 일시적인 방문? 꼭두새벽에 찾아와 다시 이곳을 떠나는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샤가 장난을 치는 건지 의심이 될 때, 린이 아이샤의 어깨를 잡았다.

"아이샤! 제대로 말해!"

벼락이 치는 듯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성 안을 울렸다. 나는 그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귀에서 약간 이명이 들리는 듯 했다. 린은 아이샤의 어깨를 세게 붙잡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봤다. 아이샤는 그럼에도 여전히 웃으며 린에게 대꾸했다.

"린. 방금 내가 말한 것 둘 다 사실이야. 주인님은 어제 새벽에 이곳에 오셨고, 그리고 모습을 감추셨지. 앨리스와 함께 말이야."

아이샤가 드물게 진지한 어조로 내뱉었다. 나는 아이샤가 방금 내뱉은 말의 의미를 몇번이나 이해하려 곱씹었다. 린은 어느샌가 붙잡았던 아이샤의 어깨를 놓고 멍하니 서있었다. 몇번이고 아이샤의 말을 머리속에서 굴렸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이해하기 전에 아이샤는 앞서 그 의미를 풀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앨리스가 주인님을 납치했다는 말이야. 어젯밤에 우리들이 자고 도로시가 떠난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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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얀갤 진짜로 살아났네 ㅋㅋㅋㅋ 딱 두달 뒤에 왔는데

예전에 썼던 거 기억나서 이어서 써봄. 

흔들다리 효과 이용하는 히로인은 한번쯤 써보고 싶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