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TR 언급 있음 !






 입에 문 궐련의 끝이 빨갛게 타오르며 회색 재를 내뱉다가, 곧 멈춘다. 그리고 연기가 숨결과 함께 피어나며 흩어졌다. 그의 앞에는 곧 져가는 노을이 삐죽하게 솟아오른 아파트들에게 침범당하고 있었다. 고급 아파트의 흡연 구역, 옥상 테라스에서 피는 담배 맛은 기가 막히게 달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있는지, 그가 누군지부터 설명을 해야할 것이다. 그는 지독한 우울증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기간제 강사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한 표류물 같은 사람이었다. 얼굴은 반반했지만 키는 작았고, 목소리는 낮았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한 어구를 인용하겠다.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동시에 나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 알베르 까뮈.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 이를데 없이 떠돌며, 몇 달 짦으면 몇 주의 한 강의 혹은 수업을 맡아 진행해주고 돈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인 정착 욕구를 상실해버렸기에, 어디에도 정착할 욕심을 두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에게 기간제 강사라는 직업은 천직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세상의 조수간만에 저항치 않고 몸을 맡겨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내려가는 삶.


 그가 어째서 이런 상실감을 겪는 우울증 환자가 되었는지는 차차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의 이야기를 하자.


 그는 며칠 전, 한 고등학교의 윤리 수업을 맡게 되었다. 해당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이 급작스레 육아 휴직을 하고, 뻥 뚫린 수업을 맡을 선생님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에게 연락이 왔던 것이다. 교장은 당황스런 목소리로 계약 기간과 페이를 언급했다. 마침 그도 계약하던 대학교 강의가 종료되어 붕 뜬 상태라, 선선히 계약을 받아 들였다. 월셋방을 떠 다른 월셋방으로 옮기는건 쉬운 일이었다. 언제나 그의 짐은 포장 박스 두 개 반을 넘지 않았다. 뿌리가 얕아 쉽게 빠졌고 또한 쉽게 어디에 박혔다. 그는 익숙히 스스로를 냉소했다.


 물론 그가 지금 여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고급 아파트로 이사한 것은 아니다. 이런 곳은 입주하기도 힘들 뿐더러 그의 쥐여짜진 노비같은 지갑의 내장을 꺼내 팔아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집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원룸촌이었다. 그 곳도 상당히 비쌌지만, 아파트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의 전 여자친구가 그를 불러서였다. 전 여자친구. 그 단어는 들어도 나락장같은 상황을 상상케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떠한 파멸적인 운명의 장난으로 사랑했던 두 남녀가 남, 혹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리고, 서로를 추억에 묻어버리는 상상.


 하지만 여기에서, 그와 그녀는 그런 평범한 이별을 한건 아니었다. 둘의 이별은 정적인 무성영화 같았다. 그 어떠한 감정의 들끓음도 폭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조한 겨울날, 그 날씨와 습도처럼 둘은 가볍고 또한 건조하게 헤어졌다. 그 둘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기름과 물 같았다. 좀 더 외적인 비유- 세속적인 비유는, 평강 공주와 온달이었다. 이 비유로 그와 그녀가 어떤 비교에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학교 시절 만난 둘은 영화처럼 사랑에 빠졌다. 싸구려 러브 코메디처럼 둘은 사랑했었다.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이 사랑이, 그녀가 자신이 가진 이 거대하고 가늠하기 힘든 무저갱의 상실감을 채워주리라 일생 처음 기대함을 가졌었다. 하지만 기대라는 건 언제나 무너지기 마련이고, 성사되는 일은 잘 없다.


 그녀는 바람을 폈다.


 이유는 지금 그에게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만이 남아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한 때 그의 가장 좋은, 유일한 친구인 문학이 그에게 가르쳤었다. 사랑은 이 세상에 남은 모든 것들 중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가 그녀에게 보였던 사랑은 정말로 진실된 것이었는데, 어째서 그녀는 그를 떠나게 된 걸까?


 사랑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에로스, 플라토닉, 아가페. 에로스는 육체적, 플라토닉은 정신적, 아가페는 그 둘을 초월한 거룩한 사랑. 그는 사랑했었다. 플라토닉이든 에로스든, 그는 그랬다.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둘은 몇 번 살을 섞었다. 그 순간들이 그들의 관계에 흠집을 냈던 걸까? 그녀는 그로 만족하지 못했다. 플라토닉적인 사랑은 육체의 손길이 닿을 때 부식된다. 그는 그걸 그녀와 함께하면서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두었듯, 그녀는 그 거리의 길이의 문제이지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였다. 그 거리를 다시 늘리는 것일 뿐이었다. 서로 얘기가 줄어들고, 그는 이삿짐을 싸듯 그의 마음을 정리했다. 그의 인생에서 어린 시절 다음으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었다. 마음이라는건 주워 담기 힘든 존재다.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쥐어들어, 그걸 어떤 통에 담는 도중에 흐르는 모래들처럼, 감정들은 집어넣기 위해 뜨는 순간 그 일부가 흘러내렸다.


 이별의 이유는 간단했다. 내 인생을 더 이상 네게 낭비하긴 싫어. 그녀의 아무런 감정 없는 사실이 담긴 말들이 그를 파고들어 파냈다.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땅바닥에 매마르게 두었다.


 그는 감정이 없는게 아니였다. 그는 그녀와 이별하며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통스러운 작업이 끝나고, 그의 마음은 조금 더 황량해지고 건조해졌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그녀의 부름에 답했는지 모른다. 그저 잠깐의 흥미였을지도. 아니면 대학교 시절, 그가 가진 추억의 파편들이 그를 확 등 떠밀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닥 좋은건 아닐 것이다.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저, 그는 떠밀리는 대로 걸음을 옮겼고 도착했다. 이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는건, 아주 잠깐의 도피일 뿐이다.


 그는 도피를 끝냈다.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대충 던지고, 엘리베이터로 돌아가 그녀가 사는 층을 눌렀다. 중력에 따라 몸이 침전하는 감각이 잠깐 들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가 사는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지리멸렬한 띵동 소리와 함께, 아주 잠깐의 기다림 이후 조심스럽게 대문이 열렸다. 그보다 살짝 위의 눈높이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대학교 시절과 달리 그닥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좀 더 아름다워지고 성숙해졌다는 것 외에는. 대학교, 아니, 전국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었던 그녀는 늘 항상 당당한 눈빛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 평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키, 정말 아름다운 외모. 신은 그녀를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다. 그녀의 존재가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런 이기적인 여자였다.


 "안녕."

 "안녕."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대학……대학교 이후 처음이지?"

 "그래."

 "들어 올래? 밖에서 이러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약한, 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들어내는 머스크 향 섞인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는 거실에 멈춰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고급 목재 나뭇바닥. 거실에는 작은 소파와 일을 하기 위한 좌식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다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의 집처럼 살풍경해보였다. 작은 그의 원룸보다 훨씬 넓었기에, 그 살풍경함은 배가 되었지만.


 책상 위에는 여러 논문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그는 그들 중 하나를 쥐어 들었다. 새로운 언어학적 접근 방식에 따른 영어 교육의 변화……. 지루하군. 그는 논문을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거실 창문으로 시야를 돌렸다. 너른 와이드 뷰로 도시가 굽어 보였다. 이러한 시야가 부의 상징인 시대가 왔군.


 원래라면 부유한 4인 가족이 살아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집이었기에, 그녀의 집안에서 느껴지는 부유함의 향기가 확 끼쳐왔다. 이러한 사회적 계급의 차이가 혹시라도 모를 그녀와의 연장된 사랑이 결국 파국적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입 안에서 느껴지는 텁텁한 쓴맛을 삼켰다.


 "사실 네가 연락을 받아준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그녀가 부엌에서 걸어나오며 싱글거렸다.

 "나도 그랬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었는데……." 그녀의 미소가 살짝 금이 갔다.

 "잠깐 맘이 바뀌었어. 변덕이지."

 "그럼 그 변덕에 감사해야겠네. 저녁 먹을래?"

 "원래 그러기로 했잖아."

 "그래, 응, 그랬지. 주방은 이쪽이야."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주방으로 들어섰다. 역시 그의 생각처럼, 주방도 큰 인테리어가 없어 살풍경해보이기 그지 없었다. 다만 디너 테이블만큼은 환상적이었다. 잘 구워진 스테이크, 완벽한 봉골레 파스타와 와인 글라스에 담긴 와인 한 쌍. 보기만 해도 저절로 군침이 돌 정도로 잘 만들어진 식사였다. 그는 그녀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둘은 서로의 근황을 식사 화제로 삼았다. 어떻게 살았느냐, 요즘 어떠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그녀는 경영학과 수석이었고, 졸업하기도 전에 하버드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M&A 수업을 받고, 아버지 소유의 한 회사에서 경제 엘리트로서의 길을 다지기 시작했다. 낙하산이여서 텃세도 심했지만 전부 능력으로 박살냈다느니, 요즈음 날 깔보는 꼰대 자식들은 없다느니 등. 그녀는 완벽하게 자리잡은 것 같았다. 그와는 다르게.


 그는 대부분의 화제를 반응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질문할 땐, 간단한 단답으로 대답했다. 응, 아니. 대답이 길어질 땐 오직 디테일이 필요할 때 뿐이었다. 그의 미련하고 지리멸렬한 삶을 설명할 필요를, 그는 굳이 느끼지 못했다. 홍수에 쓸려나가는 갓 심은 모처럼, 그는 쓸려나갔고 다른 곳에 정착하고 다시 쓸려나갔다. 그런 삶을 얘기해서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어디 가서, 무엇을 했다. 그리고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건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너무 단조롭고, 너무 슬픈 이야기였다.


 그녀가 과거 화제를 입에 올리기 시작한 건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때 기억해?"

 "언제?"

 "네가 내게 고백하던 때."

 "그런 때도 있었지. 잘 기억은 안나네." 거짓말. 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그 때, 그, 봄밤이었지. 나랑 너는 만난지 한 달이 지난 때였어. 꽃샘추위가 꽤 추웠던 날이라, 너는 옷을 살짝 두껍게 입고 있었지. 진한 회색 기모 후드티에……."

 "녹색 항공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그리고 처음 사랑을 고백하는 애송이 목소리로, '난 처음으로 너와 있으면서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어. 이기적일 수 있지만, 나랑 사귀어주겠어?'."

 "그래, 그랬어. 기억하고 있었구나?"

 "지금 생각해도 좆같은 핏덩이 애새끼 수준의 고백이네."

 "하지만 난 그게 좋았어. 네가 가진 순수함이 내게 전부 전해져 왔는걸.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좋아하는지 말이야."

 "그래?" 그러셨군. "이 이야기 계속 할거야?"

 "싫어?"

 "응."

 "난 그 화제가 좋은데……." 그녀가 아쉬운 듯이 파스타가 담긴 그릇에, 포크를 담고 빙빙 돌렸다. 포크 틈 사이로 건더기 면들이 엮였다가 너무 짧아 풀렸다. "안 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는 것도 한계였다.


 "정말 계속하고 싶어?"

 "좋았던 시절이잖아? 너랑, 나랑……."

 "그 끝이 어떻게 됐는지 알잖아?"

 "……."


 그녀는 정말 억울한 듯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순수한 피해자 같은 표정이 역겨웠다. 감히 내 앞에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그래. 말해줄게. 우리가 어떻게 끝났는지 까먹은 것 같네. 내가 어떻게 된건지 다 얘기해 줄게."

 "그러지 마."

 "우리가 사귀게 된 해의 겨울이었지. 11월? 12월 중순 즘이었어. 곧 크리스마스였고 난 네게 선물할만한 물건을 찾고 있었어. 지갑이 얆아도 큰 이벤트였으니까. 나는 널 몹시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뭐라도 할 수 있었어. 빌어처먹을 당일치기 아르바이트 세 개를 끝내고 만신창이가 되서-"

 "그만해."

 "-번화가를 통과해서 집으로 가고 있었지. 그때 몹시 외로워졌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 같았지. 이 씨발, 추위도, 욱신거리는 몸도, 지나치는 수많은 연인들이 내 외로움을 자극했어. 네가 필요했어. 이 좆같은 상실감을 해소해줄 수 있는건 너 뿐이었으니까. 네 목소리를 들으려고 전화를 걸었지."

 "그만해. 그만."

 "넌 받지도 않았어. 난 카톡을 날렸지. '어딨어? 전화 했는데 안받네.' 괜찮았어. 아직까진 그래도 괜찮았다고. 모텔들과 술집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널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네 경영학과의, 그 개새끼, 키 크고 잘 생긴, 집안도 빵빵한 그 학생회장 선배의 팔짱을 웃으면서 끼는걸 보지만 않았어도!"

 "그만해!"


 그녀가 소리를 지르면서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손에 들린 나이프가 꽉 쥐어진 채 덜덜덜 떨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비극적이게도, 그는 그녀에게 베풀어 줄 자비 같은건 오늘 오는 길에 챙기고 오지 않았다.


 "앉아."

 "그만해,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

 "앉아. 아직 안 끝났어."

 "난 네가 거기 있을 줄 몰랐어!"

 "내가 거기 있을 줄 몰랐다? 알았으면 안했을거다? 너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건 알았고? 한 두번도 아닌데? 네 그 잘 돌아가는 경제학 천재적인 머리가 그 씨발, 간단하기 그지 없는 인간 관계의 기본 공식조차 도출하지 못했다는거야?"

 "미안해……."


 그녀가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그녀의 아름다운 수정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무릎을 적셨다. 하지만 그는 끝내지 않았다. 끝내기엔 아직 좀 남아 있었다.


 "다음 날, 난 널 불렀지. 그 때의 넌 내게 관심조차 없었어. 그저 할 이야기나 어서 하라는 분위기였지. 난 헤어지자 했고, 넌 잠깐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처럼 보였지. 하지만 담담하게 말했어. '그래.' 넌 그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적 문제를 겪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 그 모습이 날 한 번 비참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난 네게 헤어짐의 이유를 말했지. 네가 묻지도 않아도. 내가 그 장면을, 네가 그 선배와 팔짱을 끼는 장면을 봤다고. 해명하지도 않고 그래? 라고 말하는 널 보며 내 감정이 어땠을 것 같아? 그래,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그 다음 네가 말할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였다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그는 그 모습이 정말 역겨웠다. 토할 것 같았다. 구토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박살내고 싶었다. 아에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정신을 아작내버리고 싶었다.


 "난, 내가 부족한 부분을 말해달라고 네게 말했어. 넌 그제서야 내게 말했지, '내 인생을 너한테 낭비하기 싫어.' 그래, 이게 다가 아니야. 알잖아? '그 선배랑 다니면서, 나보다 키가 큰 사람에게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어. 정말 좋은 느낌이었지. 섹스도 엄청나게 기분 좋았어. 솔직하게, 너랑 할 때마다 괴로웠어. 아프기만 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선배랑은 아니야. 너랑 사귀면 이런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어. 그건 내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

 "그래. 그건 가혹한 처사야. 평생 한 번도 초콜릿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한 조각의 초콜릿을 베풀고는, 이제 다시는 못먹는다고 하면 그건 정말 가혹한 처사지. 그리고 넌 내게 그 모든 것들을 말해서 내게 가혹해질 필요가 있었을까?"

 "………."

 "그럴 필요는 없었어. 넌 내게 일말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았어. 너란 인간은 그런 인간이었지. 그래서 넌 내게 그렇게 행동했어. 한 사람의 성적 자존심과 인간적 자존심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곤 그걸 맞추지도 못하게 만들었잖아."

 "…………미안, 해……." 그녀의 목소리가 푹 잠긴 채 중얼거리듯 목젖에서 세어 나왔다. "미,안해……."

 "그 날 이후 8년동안, 난 괜찮아진 줄 알았어. 세상이 날 무뎌지게 만든 줄 알았지. 그래서 네 초대를 승낙했고. 네가 이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대체 나한테 뭘 원해서, 날 여기에 불러놓고, 그 좆같은 기억을 되살리게 만든건데?"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뭐?"

 "다시……너랑 시작하고 싶었어, 외로워서, 다른 남자들은 전부 내 몸만, 내 재력만을 원하니까. 내 영혼을 원하던건 오직 너, 너 뿐이였던거야. 난 그제서야 안거야. 난 너랑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던거라고! 그리고 내가 그, 그걸 모두 스스로 포기한거야. 진짜 사랑을."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이야기할 이유도, 거리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말이, 그녀의 욕구 자체가 그의 존재 자체를 모욕하고 욕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있을 필요도 없었다.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그는 그녀에게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집에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을 지나 다시 현관으로 향해, 벗어놓은 구두를 다시 신으려는 순간이었다.


 전신에 강력한 전기 충격을 받고, 그는 종잇장 구겨지듯 현관 대리석 바닥에 머릴 처박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널부러진 그의 뒤에 그녀가 서 있었다. 파직거리는 호신용 전기충격기와 함께, 안구에서 빛을 잃은 그녀가.


 





 그렇게 얀데레가 된 얀순이는 이 얀붕이를 잡아서 어떻게 회쳐먹었을진 모두의 머릿속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너무 졸려서 더이상은 못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