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https://arca.live/b/lovelove/19426555


식당에 들어가 아무 자리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점심시간도 아니고 저녁 시간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식당 내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식당 구석에서 핸드폰을 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직원이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시겠어요?»

 

밝은 인상의 직원이 주머니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메뉴판을 꼼꼼히 살펴보며 신중히 하나씩 음식을 주문했고 직원은 내 주문을 열심히 받아적었다. 

 

«또 주문하실 것은 없으신가요?»

 

«네, 없어요.»

 

주문을 받아 적던 직원은 음식 주문을 끝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하고 펜과 수첩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주방으로 갔다.

 

음식을 기다리던 중에 차가 먼저 나왔다. 컵에 담긴 뜨거운 물에 티백을 넣어 차를 우려냈다. 따뜻한 차가 식도를 타고 몸에 들어가자 따뜻한 기운이 온 몸을 채웠다. 하지만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걸로 기분이 나아지면 약을 먹지도.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상에 찻잔을 내려놓고 찻잔을 바라보았다. 흰 도자기에 꽃 그림이 예쁘게 수 놓아진 찻잔 속에서 차가 조그맣게 물결을 치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찻잔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느라 음식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직원이 상에 음식을 내려놓고 나를 살짝 부르자 그제서야 음식이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선이 들어간 수프는 정말 맛있었다. 처음 먹어본 이국적인 맛이었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맛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에 만족하며 식사에 집중하던 도중 우연히 고개를 들었을 때 아까 주문을 받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식당에 들어왔을 때처럼 그녀는 구석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만 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불편해 그릇을 괜히 직원 반대편쪽으로 살짝 옮기고 몸도 그릇 따라 살짝 돌려 직원의 시선을 피했다. 

 

음식을 다 먹고 차로 입가심을 한 후 돈을 지불했다. 그 직원은 돈을 받는 와중에도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돈을 내는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았다. 저 시선이 보기 싫어 계속 바닥을 쳐다보았다. 

 

돈을 지불하고 드디어 식당 밖을 나서자 아까 먹었던 음식의 따뜻한 기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추위가 다시 나를 반겼다. 옷을 꽁꽁 싸매도 이 도시의 추위는 도저히 적응 되지 않는다. 

 

나는 식당을 나와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았다. 1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디 관광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호텔에 돌아가기에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조금 아까웠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근처에 서점이 있는지 검색했다. 다행히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가방에서 생수와 약을 꺼냈다. 약을 먹으려고 손에 약을 올려 놓았을 때 약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약 먹을 이유가 있을까? 이제 먹을 일도 없을 텐데."

 

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약을 처방 받을 때에 임의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항상 의사가 강조했기 때문에 많이 갈등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약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대신에 약이랑 같이 먹으려고 했던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가방에 넣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다.

 

몇 분 후 버스가 도착하고 나는 그 버스에 탔다. 버스 안은 사람들의 신발에서 떨어진 녹다 만 눈으로 가득 찼다. 그 때문에 미끄러워 넘어질 뻔했다. 타지에서 처음 타는 버스이기 때문에 엉뚱한 곳에서 내리지 않기 위해 버스 안에 적혀있는 노선도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확인 했고 귀에 꽃은 이어폰을 빼고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버스 창 밖의 도시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 앉았다. 난 겨울이 좋지만 해가 일찍 지는 것은 겨울의 유일한 단점이다. 

 

버스가 멈추고 어설프게 녹은 눈으로 가득한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버스에서 내렸다. 해가 진 거리의 기온은 더 낮아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서점을 향해 걸어가면서 계속 후회했다. 바로 호텔 갈 걸. 도대체 왜 서점을 간 걸까.

 

살인적인 추위를 겨우 뚫고 서점에 도착했다. 서점 안에도 히터를 켜고 있었지만 밖이 너무 미친듯이 추워서 그런지 히터를 켜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장 하나하나씩 신중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러 번 살펴봐도, 이미 지나친 책장을 여러 번 다시 봐도 내가 찾는 책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점원에게 부탁해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살 책이지만 사고 나면 서점을 나가야 하니까 서점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책을 펴 읽었다.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해석이 안 되는 문장이 나올 때마다 꽤 골때렸다.

 

"한국 정발이 되면 좋을 텐데 왜 도대체 안 해주는 거야" 라고 속으로 불평하며 책을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그렇게 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 내 어깨를 톡 하고 건드렸다. 그때 나는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누군가 나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러자 잠시 후 또다시 톡 하고 내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도대체 누가 내 독서를 방해하는 지 궁금해서 뒤를 살짝 돌아 보았다.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살짝 놀랐다. 책을 품에 안은 채 미소 짓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아까 낮에 보았던 – 나와 길에서 부딪혔던 – 그 여성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성은 내가 그 여성을 인지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밝은 걸음걸이로 기쁜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에 앉아 품에 안고 있던 책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부담스러워 계속 책에 집중했다. 그러자 마치 책 말고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이 그녀가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안녕하세요..»

 

그녀가 정말 부담스러웠지만 예의 없는 사람으로는 보이기 싫어서 최대한 성의 있게 인사했다. 

 

«혹시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뭐야, 초면부터 나이를 묻다니, 이상한 사람 아냐?"

 

초면부터 나이를 묻는 그녀가 이상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왜?'' 라고 묻는 대신 내 나이를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스무..아, 열여덟 살이에요.»

 

«뭐야, 나이 차이 얼마 안 나네! 말 놓아도 되죠?»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마치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기뻐하며 나에게 물었다.

 

«네, 뭐 상관은 없는데 몇 살이세요?»

 

«열다섯 살이야. 말 놓아도 된다니까.»

 

열다섯이면..만 나이니까 17살, 생일 지났으면 16살 정도 되겠네. 나와 그녀 사이에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도 그녀에게 말을 놓기로 했다. 그녀도 나에게 말을 놓았는데 나는 계속 그녀에게 존칭을 쓰는 것도 이상하니까.

 

«외국에서 온 것 같은데, 어디서 왔어? 페테르부르크는 처음이야?»

 

그녀는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계속 질문했다. 사실 눈은 책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질문을 해석하느랴, 또 책의 문장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느랴 바빠서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왔어. 이 도시는 처음이고.»

 

«북한에서 온 거야?»

 

«아..아니야! 남한에서 왔어! 남-한!»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내가 남한에서 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장난친 거야. 모를 줄 알고?»

 

«그런 장난 하지 마! 진짜 모르는 줄 알았잖아.»

 

«알았어. 그런 장난 안 할게. 근데 여긴 어때? 춥지 않아?»

 

«추워.»

 

«근데 왜 겨울에 온 거야? 여름에 왔어도 됐잖아.»

 

«겨울이 좋아서. 나, 눈이 좋거든. 그래서 마지막으...아니, 그냥 눈을 보고 싶었어.»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올해 우리나라에 눈이 너무 안 와서. 그리고 이 도시가 좋기도 하고.»

 

나는 살짝 말끝을 흐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 너무 나에 대해 상세하게 말한 것 같았다.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거라도 있나?''

 

나는 나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왠지 불안해졌다. 그러자 내가 불안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이 아까까지 짓고 있던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이 싹 풀더니 화제를 전환하듯 다시 밝은 어조로 나와 대화했다.

 

«러시아어 잘 하네, 러시아에서 산 적 있어?»

 

«고마워, 근데 여기선 산 적 없어.»

 

«그래? 그런데도 그렇게 잘 해? 어디서 배웠는데?»

 

«그냥..책 보면서..»

 

«정말? 대단한데?»

 

«근데 말야.. 너..»

 

«응?»

 

«너 누군데 나랑 이렇게 대화하는 거야?»

 

내가 묻자 그녀가 상당히 놀라며 물었다.

 

«어? 뭐야, 너 기억 안 나? 낮에 우리 만났잖아.»

 

''만났다고? 언제?'' 라고 생각할 때에 기억이 스쳤다. 혹시 낮에 부딪힌 그 사람이 그녀인가? 나는 확인 차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낮에 나랑 부딪혔던..»

 

«맞아! 그 사람이 나야!»

 

«그래? 근데 왜 나랑..»

 

«왜? 난 그냥 낮에 만난 사람을 또 만나서 그냥 반가워서 그런건데.»

 

뭐야, 고작 그런 이유였나.

 

«아니야. 별 문제 없어.»

 

내 대답이 그녀에게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저기, 근데 이름이 뭐야?»

 

한참 대화를 하던 중 소심하게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물으면서도 혹시 그녀가 나를 초면에 이

름을 묻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그런 것 같

지는 않았다.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제쥐다(Надежда)라고 해. 나쟈(Надя)라고 불러. 너는?»              

 

나제쥐다라... 알렉산드라(Александра)나, 나탈리야(Наталья) 같은 평범한 이름이 나올 줄 알았지만 

그래도 예쁜 이름이었다.

 

«그래서 너는?»

 

그녀의 이름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잠시 멍 때리고 있던 나를 그녀가 재촉했다. 

 

«아, 시온이라고 해,»

 

«시온이라..멋진 이름이네.»

 

«고마워...»

 

그 후 우리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페테르부르크에는 왜 온 거야?»

 

«어? 아, 아니...그냥 여행...»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나는 변명했다.

 

«여행...그래...»

 

그녀는 내가 했던 대답을 심각한 표정으로 곱씹었다. 또 불안해졌다. 내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들킨 걸까.

 

갑자기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졌다.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지만 깰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확인해 시간을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럼, 난 갈게. 안녕.»

 

나는 책을 덮고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책을 보고 있던 그녀도 나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봐.»

 

난 그 인사에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책을 들고 계산대에서 책 값을 계산한 후 문을 열었다. 문을열고 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녀가 나를 보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시 호텔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날씨는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를 탔다. 여전히 바닥은 녹다 만 새까만 눈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았다.

 

그녀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긴 금발에 유리처럼 깨끗한 피부, 사파이어 같은 파란 눈동자와 마른 체형이었지만 너무 마르지도 않은 그녀의 외모도 매력적이었지만 성격도 매력적이었다. 단지 낮에 우연히 만난 사이인데, 서점에서 나를 보았어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나에게 친절히 대해주며 말을 걸어주었고, 대화를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에게 작은 감정이라도 생긴다면 사는 데 더 집착할 것 같았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꼽고 소리를 최대로 올렸다

 

버스는 호텔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호텔 안은 마치 여름 같았다. 밥을 어중간한 시간에 먹어서 그런지 배 고프지도, 배 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 먹고 싶었다. 나는 방에 혹시 가져온 먹을 게 있기를 바라면서 객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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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중에서 보이는 «» 기호는 산괄호라고 하는 기호에요. 러시아어에서 쓰이는 기호인데 앞으로 러시아어로 말하는 장면에서는 이 산괄호를 사용할 계획이에요. 그 외에 주인공이 한국어로 말하거나 생각,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에는 "" 이 문장 부호를 사용할 거고요.


여담으로 Надежда는 여성 이름으로도 사용되지만 "희망"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이기도 합니다. Надя는 Надежда의 애칭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