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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저릿했다. 이불과 베개를 둘둘 말아 고막을 덮어도 소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진공청소기가 머리통을 빨아 뒤흔드는 감촉이다. 비몽사몽한 머리에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진공청소기의 굉음이 크게만 느껴졌다. 불쾌한 기상 알람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잡념을 떨쳐내고 숙제와 학업 계획표에서 해방된 주말을 맞이하기 위해 밤샘 공부로 금요일 밤을 불태웠다.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포상 삼아 달콤한 수마에 토요일 오전을 넘겨주고 싶은 게 내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성실함이 내 소박한 욕구를 용납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고막을 죽어라 울리는 청소기 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수마는 달아나 버렸고, 나는 이불을 힘껏 걷어차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왜 아침부터 청소기를..."


 이불을 주섬주섬 개고 거울을 바라보자 밤새 뒤척이느라 부스스해진 머리가 보였다. 부엌으로 나서며 컵을 집었다. 정수기에서 냉수가 쪼르륵 흘러나왔다. 몽롱한 머리를 찬물로 씻어내니 버스 라디오에서나 들어본 90년대 록 음악을 흥얼거리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예은아, 깼어?"


 뻔뻔하기는. 어제 일찍 퇴근했으니 내가 늦게 잠든 거 알면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거실로 나온 나를 아빠는 환한 미소로 맞이해 주셨다.


"으응... 졸려..."


 내 반응에 아빠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웃으면 다 넘어갈 줄 아나. 기운이 넘치면 주체하지를 못하는 게 아빠다. 잊을만하다 싶으면 꼭 이런다. 사실 한가한 휴일에 이 정도면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다. 새벽부터 친구랑 골프나 낚시하러 나간답시고 도구를 바리바리 챙긴 채 밖을 나서느라 소음 공해로 내 잠을 깨우곤 했으니까.


 창가에서 어슴푸레하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 너머로 시계를 보았더니 7시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른 납셨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은 안 오고 일어나 있기는 피곤한 애매한 수면이 되어버렸다. 타협안 삼아 적당히 빈둥거리고자 소파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다가가 몸을 던졌다. 찜질방 베개와 비슷한 복숭아뼈의 감촉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소파 구석에서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나와 비슷한 심정인가 보다. TV 소리는 청소기 소리에 파묻히고 있었다. 


 엄마의 발에 기댄 오른쪽 볼에 중력이 가해졌기에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말했다.


"아빠 또 왜 저래..."


 늘어지는 목소리가 내 목에서 새어나왔다. 내가 냈음에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맥 빠지는 목소리였다.


"회사가 쉬니 집으로 출근하셨지..."


 무기력하게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엄마가 대답했다. 아빠는 우리 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 차릴까?"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엄마는 될 대로 되라는 듯 고개를 세로로 까닥였다. "오케이!" 청소기를 정리한 아빠는 냉장고를 열어 식빵 봉투와 달걀, 양상추, 그리고 마요네즈를 꺼냈다. 


 내키는 데로 외박하고 다니는 언니가 부러워지는 아침이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마요네즈를 퍼부은 샌드위치가 너무 기대되어 하품이 다 나왔다.





 잠도 안 오는데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가 충전기에 꽂혀 있는 스마트폰을 빼냈다.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어제 잠시 듣다 만 음성이 흘러나왔다. 황급히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소리가 멎었다.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달걀 삶는 소리다.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졸음은 가시지 않았다. 엄마가 채널을 돌리며 볼 만한 방송을 찾고 있었다. 주말 아침에 방영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교양 프로그램, 재방송 중인 요리 프로그램이 휙휙 지나갔다. 반쯤 누워 있는 엄마의 발치에 같이 누웠다.


`시위대가 경찰 차량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무장한 경찰은 최루탄을 던지며 시위대를 진압합니다. 현지 시각 21일 마르세유의 도심에서 일어난 시위는 점점 규모가 커져...`


 채널은 아침 뉴스를 방송 중인 지상파 채널에서 멈췄다. 아나운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목소리와 대비되게도 LED가 빛을 조합해 보여주는 영상에서는 진압 방패와 보호 용구를 둘둘 차려입은 경찰과 시위대의 격돌이 나오고 있었다.


`...약 10만 명의 인원이 참여한 이번 시위에서는 대통령이 공약을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3차 시위는 파리로까지 이어져 과격하게 번지고 있습니다. 시위가 이번 달에 들어 더욱 길어지고 과격해짐에 따라 피해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문화재가 파손되고, 개선문이 훼손되는 등 많은 재산 벌어지고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휴업을 선언했고, 대통령은...`


 낙서가 가득해진 길거리와 전시장에서 부서진 문화재가 카메라에 담겼다. 대통령의 입장 발표, 시위대 인터뷰 사진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나운서는 이어서 이번 시위가 세금 인하가 예상보다 느리게 실시되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지만, 현 정부는 우리의 돈과 행복을 모두 빼앗고 있다. 국민의 행복을 저하하는 무능한 정부는 축출되어야 마땅하다. 군중에 섞인 채 노란 조끼를 입은 중년의 금발 남성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 중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헤드라인이 지나갔다. 영상으로는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경찰이 나왔다. 엄마는 짧게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그 영상을 지켜보았다.


"예은아. 비비안느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


 모자이크된 채 나오는 유혈 사태에 겁먹은 목소리로 엄마가 물었다.


 갑자기 나온 친구의 이름이 낯설게만 들렸다.


"몰라. 요즘 연락 별로 안 해."


"잘 지내나 몰라."


 비비안느. 이제는 이름만 간신히 기억나는 친구. 발음을 옮기기 힘들어 나는 그녀의 성을 항상 빼고 불렀고,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내가 미국에서 초등학교 때 국제학교에서 사귀었던 친구였고 그렇게까지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중학생 나이가 되고 내가 미국에서 돌아가자 별다른 연락 없이 서서히 멀어지던 사이였기에 나는 그녀의 이름이 정확히 뭐였는지 잊어버리는 수준까지 와 버렸다.


 내가 이 수준임에도 엄마가 비비안느를 기억하는 건, 유일하게 엄마가 직접 만나본 내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몇 안 되는 친구였으니.


 나는 폰을 들어 메신저 앱을 켰다. 스크롤을 두 번 내리자 옛 기록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발음하는 법이 기억나지 않았다.


 3년 전 크리스마스에 했던 간단한 안부 인사 뒤로 연락은 쭉 멈춰 있었다.


 지금 해 봐야 어색하지 않을까 망설이던 도중 뉴스가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나는 소파에 폰을 떨구고 기지개를 쭉 폈다.





`이어서 문화재 복원에 관한 소식입니다...`


"여보! 버터가 어디 있었지?"


 앞치마를 두른 아빠가 부엌에서 고개를 빼곰 내밀었다. 식빵 자르고 달걀 삶는데 앞치마를 입는 건 무슨 이유일까.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보기에 퍽 아름다웠다.


"냉장고... 왼쪽, 거기 셋째 서랍. 그치."


 기력을 차린 엄마가 손끝으로 지시했다. 냉장고를 연 아빠는 양상추와 버터, 머스터드, 그리고 마요네즈를 꺼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마요네즈를 좋아하는 느끼한 우리 아버지는 이번엔 휘파람을 불었다. 고전 명곡인지, 멜로디가 어쩐지 익숙했다.


`...사태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식탁에 냄비를 옮긴 아빠는 대야를 가져와 거기다가 계란을 까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으으으으으으아아..."


"잘 좀 까봐."


 아빠를 지켜보던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만진 계란은 껍질이 어중간하게 까지고 남아 우둘투둘 붙은 모양새가 돼버렸다. 엄마가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갔다. 내 머리는 푹신한 소파 위로 툭 떨어졌다.


"하여간, 혼자서는 껍질도 못 벗겨요."


"에이, 이건 실수한 거야."


 엄마가 아빠가 까다 만 게란과 나머지 달걀 두 개를 순식간에 까는 가운데 아빠는 다른 계란을 새로 집고 어물거렸다.


"자기 것도 직접 못 벗겼으면서 허세는. 처음만 그래야 실수지 두 번 세번 그러면 그게 실수야?"


 엄마가 쏘아붙였다. "이리 줘." 엄마가 말했고, 아빠는 체면을 잃어 시무룩해진 얼굴로 계란을 내놓았다.


 자기 것도 혼자 못 벗긴다니. 무슨 의미일까. 아빠가 섬세한 구석이 부족하기는 하다. 엄마가 사용한 과거 시제를 토대로 추측해 보건대 옛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 보다.





엄마가 아빠의 것을 벗겨 준다...




처음... 첫경험?





엄마가 달걀 두 개를 얼기설기 손가락을 비틀어 동시에 들고 있었다.






"푸흐흐크흡"




 소파에 얼굴을 박아넣은 채로 영문 모를 웃음을 뿜어냈다.


"예은아?"


 시야가 뿌옇다. 눈물이 맺혔나 보다. 아빠는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엄마는 슬쩍 웃을 뿐이었다.


"왜 웃어?"


 아빠는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음흉하게만 보이는 엄마의 미소를 발견했다.


 모녀의 표정을 지켜보던 아빠의 표정이 변한 건 몇 초 뒤의 일이었다.


"...아, 어, 예은아, 여보? 왜 웃어!?"


 음흉한 말뜻에서 느낀 정색과 황당함 섞인 웃음이 아빠에게서 튀어나왔다. 엄마는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고, 나는 대놓고 깔깔댔다. 아빠는 수치스러움을 숨기려는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웃다가 마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아빠는 엄마의 농간에 걸려들었다.


"아아니, 여보. 그게 뭔 뜻이야??"


 허공에다가 세수하는 자세로 손을 마구 휘두른 아빠가 다급하게 말했다. 엄마는 능글맞게도 "그런 뜻."이라고 답했다. 할 말이 없어진 아빠는 나를 향해 웃지 말라고 네 번을 말하고는 까진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아빠 놀리기의 흥분이 가라앉을 찰나 엄마는 화제를 바꿔 "근데 이걸 왜 너가 알아듣냐."라 추궁했다.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폭소를 멈출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정말, 졸고 있을 틈이 없다.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과도를 챙기고, 냉장고 과일실을 열어 사과를 꺼내 미리 깎아 보았다.







 엄마는 식칼로 흰자를 얇게 다지고, 아빠는 노른자를 으깼다. 노른자와 흰자를 대야에 모아 마요네즈와 머스타드를 뿌린다. 소금을 살짝 치고 섞는다. 양념은 비율이 중요하다. 계란의 담백함과 양념의 느끼함이 조화를 이루는 게 핵심이다. 단순한 요리일수록 그랬다. 하지만 계란을 쓰는 음식 말고는 요리 솜씨가 영 떨어지는 우리 아버지는 종종 그걸 간과하고는 했다. 마요네즈를 한 움큼 더 뿌리려는 아빠를 내가 뜯어말렸다. 대신 엄마가 준비한 양상추를 잘게 찢고 쪼갠 뒤 넣었다. 숟가락을 집어 힘차게 대야를 휘젓는 아빠. 마요네즈 섞인 달걀 뭉치는 맛있어 보이는 연노란색을 띤다. 끄트머리를 미리 잘라 놓은 식빵을 가져올 때, 엄마가 제안한다. 사과도 갈아서 넣어보지 않겠냐고.


 샐러드 비슷한 건강식을 원하는 엄마의 의견이었다. 마요네즈와 과일샐러드는 정말 안 어울린다며 아빠가 반대했고 나 또한 그냥 깎아서 후식으로 먹자고 반대했기에 샌드위치 절반에만 시도해 보기로 합의되었다. 식빵 면마다 버터를 발라주고는 계란을 얹는다. 그리고 식빵으로 덮는다. 언니가 대학가의 유명한 빵집에서 사 왔다고 자랑하던 식빵은 감촉부터가 남달랐다. 통통한 달걀 뭉치가 넣어진 새하얀 빵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식칼을 다시 써서 절반으로 자른다. 두 쪽 중 한쪽에는 갈아 넣은 사과를 넣어 버무린다. 편의점 샌드위치에서 영감을 받은 아빠표 샌드위치를 개량해 만들어진 우리 가족표 샌드위치의 완성이다.


"잘 먹겠습니다."


 셋이서 동시에 말한다. 그리고 하나씩 잡는다. 입에 가져다 대고 씹는다.


 마무리.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행복을 경험한다.





"사과는 잘 안 어울리네. 식감이 따로 놀아."


"...윽. 그러게. 별로다. 괜히 버렸네.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손수 개량한 빵을 맛본 뒤 인상을 찌푸리고는 내 지적을 받아들였다. 책임감 있게 사과 샌드위치를 자기 뱃속으로 처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표하고 노릇노릇하고 계란이 많아 보이는 조각을 찾아 집었다. 아빠와 은밀한 경쟁을 펼칠 수 있었다. 열량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우유와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이게, 잘못 복원하면은 되돌릴 수가 없어요. 망가진 걸 고치는데, 잘못 고치면 다시 떼어내야 하고. 그러면 그걸 또 부수는 꼴이 돼버리니까 말이죠.. 그러면 돌이킬 수가 없죠.`


 뉴스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는 반달리즘에 이어서 우리 문화재로 넘어가 있었다. 자막에 부연 설명으로 `이게`같은 대명사 옆에 (도자기)가 적혀 있었다. 발굴과 운반 도중 헤프닝이 생겨 산산조각이 난 문화재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배를 채우고 어느 정도 진정된 우리 가족은 뉴스를 보며 도란도란 말을 나눴다.


"여보. 좀 있다가 영화 보러 갈래?"


"어떤 거?"


 엄마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폰에 영화 포스터를 띄워 보여줬다. 광고를 많이 하던 히어로 무비였다. 예전에 두 선배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통해 어떤 영화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액션이야?"


"어. 다들 재밌다고 하던데. 예지도 봤대."


 시험 기간이 코앞인 건 아빠도 알기에 내게 권유하지는 않았다. 언니는 지금 같이 외박 중인 남자친구와 함께 봤을 것이다. 기대감 넘치는 저 표정을 보아하니 아빠 또한 저 주인공 시리즈물의 팬인 듯했다. 남성 관객에게 어필하는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영화였고, 예상 관객을 겨냥한 마케팅이 성공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시리즈 히어로 영화였다. 엄마는 시큰둥하게 포스터를 보며 배우 정보를 훑어보았다. "알겠어." 선호 장르는 아니지만 배우에는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갈려지지 않고 깎아지기만 한 사과를 집어먹고, 식기를 정리한다. 언니의 간식으로 한 쌍의 샌드위치가 남겨져 냉장고에 보관되었다. 양치를 하고 방으로 향했다.


"어디 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는 나를 엄마가 불렀다.


"산책.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일찍 나가네."


"나갔다 와서 흐름 안 끊기고 공부하게."


"열흘 뒤면 시험이었지?"


"응."


"잘 갔다 와."


 마요네즈 맛에 취해 너무 든든하게 먹었다. 더부룩했다. 잠옷에서 대충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엄마와 아빠가 짧게 배웅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뒤 단지를 나서면 역이 보인다. 건널목을 지나 골목 두 개를 꺾어 지나도록 걸으면 학교가 나온다. 학교 반대편으로 꺾어 걸은 뒤 숲길로 향하면 산책하기 좋은 생태공원이 나온다.


 귀에 놓은 무선이어폰에서 최신 팝 송이 흘러나왔다. 느린 속도로 달리며 공원을 가로질렀다. 길고양이가 많이도 보였다. 꼬리나 귀 끝자락이 조금씩 잘린 고양이들이. 털뭉치들을 피해서 달렸다. 숲이 습했다. 흐르는 땀이 축축했다.


 장마를 앞둔 여름은 스산했다. 하늘은 때 묻은 백지처럼 우중충했다. 미지근한 바람은 노래로 채운 의욕을 빼앗았다. 조깅은 점점 느려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걷는 속도로 변했다.


 공터에서 오솔길로, 그리고 강변으로. 주말을 맞이해 산책 나온 강아지가 많았다. 몰티즈, 푸들, 포메라니안, 치와와, 시추, 리트리버, 닥스훈트, 비글, 웰시코기, 사모예드, 시베리안 허스키, 알래스칸 말라뮤트. 산책을 나올 때마다 보게 되는 익숙한 얼굴의 산책 친구들. 아빠의 알레르기만 아니었으면 키웠을지도 모르는 강아지를 보는 건 산책의 소소한 잔재미 중 하나였다.


 강변을 향해 나아갔다. 자전거도로가 나왔고, 동호인으로 보이는 무리가 줄지어 도로를 지나갔다. 앞뒤를 살펴 기회를 봐 반대편으로 건넜다.


 길을 쭉 걸으니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겸 고가도로가 나왔다. 전철이 소음을 내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와 강변 산책로를 잇는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층계를 하나씩 올라 다리 위에 섰다. 토요일 오전이기에 차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메케한 냄새를 피하고자 인도 깊숙히 걸어서 다리를 천천히 건너보았다.


 다리를 절반 건넜을 때쯤에 트랙이 끝났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우산 챙겼었나?


 3분 전 아빠가 보낸 연락이 알림으로 떠 있었다.


-아니


 하늘이 탁해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때, 액정에 물 한 방울이 맺혔다.




*



  체력을 아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의 천장 있는 벤치로 달려가는 게 30초만 늦었다면 빗줄기에 듬뿍 절여졌을 것이다.


 젖은 머리를 흔들어 대충 털어내고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한 손에는 우산을, 반대편 손에는 강아지를 안은 채로 산책하는 행인과 헐레벌떡 비를 맞으며 수풀로 달려가는 고양이, 그리고 마음을 비웠는지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걷는 행인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어디야?


 아빠가 다시 톡을 보내왔다. 달리느라 5분 늦게 연락을 확인한 나는 '공원에서 강 쪽으로 가는 길목 벤치'라는 상세한 주소를 적어 아빠에게 알렸다.


-금방 갈게


 일회용 우산을 살 편의점이 먼 이곳에서 고립당하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장대비 같기도 했고 그저 지나가는 세찬 소나기 같기도 했다. 물웅덩이에 포위되었으니 영어단어라도 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폰을 들었다.





 켜진 화면에는 닫히다 만 메신저 앱이 띄워져 있었다. 


-금일 OO학원 저녁반 수업은 없습니다. 학원은 개방하므로 자습과 프린트를 원하면...


 학원 선생님의 부친상으로 수업이 끊긴 어제의 일이었다. 그리고 작은 도전이 실패한 날이기도 했다. 뒤척이면서 보낸 어젯밤이 너무 길어 하루 전의 일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잡생각을 멈추고 흘깃 목록을 살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올려 목록을 스르륵 훝었다. 가족과 학교의 사람들 말고는 연락을 나눈 적이 별로 없었기에 목록은 금방 바닥까지 내려갔다.


-지금 뭐해?


-4반 신예은 맞니? 혹시...


-이번 주말에...


 좋지 않은 기억을 꺼내게 만드는 대화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액정화면 대신 비 내리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학기 초는 기분 나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전화번호를 어디서 알아낸 건지, 모르는 사람들이 멋대로 연락을 보내왔던 것이다.


-예은아 통합과학 모둠발표 말인데...


 위로 살짝 올리자 강하늘의 연락도 보였다. 수행평가의 탈을 쓴 소위 조별과제라 불리는 활동을 핑계 삼아 주말에 따로 만나지 않겠냐는 정도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개인톡이 오면 '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할 만큼 했으니 다른 모둠원 불러서 의논해 봐라'라는 뜻을 간결하고 격식 있게 요약한 답장을 보내 좋게좋게 넘어갈 수 있었으므로.


 그나마 성의 있는 시도였지만, 그래도 너무 속 보이는 수작이었다. 어떻게든 대화의 공통분모를 잡아내고 만남을 계획하는 행동력은 인정하겠지만 배려심은 없는 접근이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면, 나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도 믿고 저지르는 행동이니까.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대부분 그랬다.


 다짜고짜 사귀자고 말하는 것부터, 같이 점심 먹자 따위의 소극적이면서도 속이 다 보이는 접근에, 날씨랑 급식 맛 같은 시시콜콜한 대화로 살살 간을 보는 사람까지. 원하지 않은 각양각색의 만남을 해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니 차차 나아진 건 다행이었다. 전화번호도 폰 새로 사는 김에 바꾼지라 생판 남에게서 연락을 받는 일도 적어졌고.


-앗 그러면 금요일 방과후 때 준비하고 갈래? 수요일은 학원 때문에 시간이 안 맞거든


 강하늘은 내가 마지막으로 상대한 작업남이었다. 한 달 전의 수행평가와 이틀 전의 그 일까지 해서. 


 그래도 먼저 다가갔으면 장단은 나한테 맞춰줘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그를 상대하며 느낀 감상이었다.


 '책 읽어? 무슨 책이야?'라고 작업을 걸던 강하늘에게 로맨스나 뇌과학 분야라고 답해주니, 그는 '그러면 이런 만화나 이런 웹소설도 좋아해?' 라고 폰으로 웹툰 웹소설 플랫폼을 띄우며 물었다. 그런 건 안 본다고 했더니, 그 애는 바로 대화 주제를 바꾸어 다른 공통 분야를 찾는 것이었다.


  다 그런 식이었다. 자기 장단에 나를 맞추려고 들었다. 사소하면서도, 정말 귀찮은 짓이었다. 진짜로 호의를 만들고 싶으면 먼저 관심사를 맞추는 게 맞지 않나. 


'이쯤 되니 그냥 그러려니 싶더라고요. 전 어떻게 4년이나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있을까요.'


 강하늘과의 수행평가가 끝난 직후, 동아리 활동 뒤처리 청소 중인 재혁 선배에게 이런 내 의견을 말해봤었다. 내 삶의 고충을 선배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로맨스를 논할 때처럼 내 사상을 존중받으며 위로와 응원을 받고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으으으음...'


 그렇지만 신세 한탄에 대한 선배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경악의 대상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건 니가... 재수없이 굴어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까.'


 내 말에 질려버린 걸 숨기지 않고 재혁 선배가 말했다.


'그건 너무 오만하지 않아? 남이 자신에게 맞춰주는 것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건 또 뭐야. 너도 약간은 맞춰주면서 사는 게 어때.'


'보통은 그렇겠죠. 근데 제가 보통 상황에 놓인 건 아니잖아요? 서로 마음이 맞아서 친해지는 게 아니라 친해지기 위해 마음을 맞추려고 하는 사람 투성이잖아요. 오만한 건 그런 사람들 아닌가요?'


'아니, 마음이 맞는지 어떤지 알려면 기회라도 있어야지. 미숙한 접근은 그렇다 쳐도, 마음 맞추게 준비할 판도 깔고 네가 마음을 열 기회를 주는 애도 다 무시해 버리는 건 좀 아니라고 봐.'


 그때 선배는 눈을 흘끗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린 뒤에는 거의 대부분 선배의 옛날 썰 풀이가 잠깐 일어났기에 나는 선배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지. 네 다른 부분을 좋아하게 돼서, 그 부분을 접하기 위해 너랑 친해지는 걸 수도. 그런 접근까지 원천봉쇄하는 건 확실히 오만한 것 같은데.'


'제 다른 부분이라고 해 봐야 볼 수 있는 건 외모랑 성적밖에 없을 텐데요?'


'와, 니 진짜 재수없다 야.'


 재혁 선배는 그렇게 나를 놀렸다. 동성 친구는 만들 생각이 없고, 이성 친구는 직접 걷어차는데 어떻게 친구가 생기겠냐고 내 사교술을 비판하면서.


'네 그런 모습을 동경한다거나 아님 네 능력으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거나 해서 너한테 다가오는 사람이 많기야 하겠지. 나도 그랬었고. 네가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너랑 어울리려고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할 거 아냐. 그 정도로 열의 있게 성실하게 사는 애들이랑 친해지면 도움이 되거나 재미있는 일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죄다 쳐내는 건 바람직한 생활 태도는 아닌 것 같아.'


 간이 상담시간이 이루어진 그날,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 비판에 빠진 나를 재혁 선배는 고심 끝에 한 단어로 나타냈다. '공주병'. 유치원에서나 쓰이던 사어(死語)와 다름없는 표현에 나는 당황했지만, 선배와에 문답에서 나타난 내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팜므파탈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나를 선배가 평가했다. 남의 호의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냐고. 남이 품은 호의를 너무 절하하지 않냐고.


 맞는 말이었다.


 되짚어보면 그랬다. 내 삶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부족함 없는 삶이었다. 주관적으로 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혼자 놀 거리도 많았으므로. 또한 선배의 말과 그동안 언니가 내게 시비를 걸며 운을 띄울 때 너무 무심하다고 하는 말을 보면 부족한 부분을 잘 느끼지도 못하는게 나다. 익숙해져 버린 거 아니냐고 그들은 핀잔을 줬었고, 정확한 분석이었다. 성격 자체가 그다지 나서는 성격도 아닌 것도 있지만, 조금 이른 유년기의 유학 생활로 외지인에 대한 어린 아이들의 악의 없는 따돌림과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악영향 또한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결핍을 딱히 느끼지 못하는 건 실제로 결핍이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응석받이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애정을 가족에게서도 듬뿍 받았고, 유년기에도 호의를 충분히 받아왔으므로. 악의 없는 따돌림을 거꾸로 말하면 의식하는 중에는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니. 유학 생활은 충분히 값진 경험이었다.


 선배의 말이 맞다. 타고난 부분에 너무 익숙해져서, 나는 익숙해진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미안.'


 그렇다면.


'네 마음을 못 받아들이겠어.'


 사랑이 익숙하지 않은 삶은 어떤 걸까.


 




 통화 내역을 열었다. 어제 저장된 기록을 재생했다.


'여보세요. 지금 전화 되니?'


'...못한 말이라도 있나요?'


'많지.'


 허무하게 끝난 치기 어린 내 고백에 답하기 위해 선배가 걸어 온 전화였다. 


 작은 확인을 목적으로 했지만, 더 큰 걸 바란 내 욕심도 있었던 고백, 선배는 첫 의도는 직접 대화로 확인시켜줬지만, 두 번째 목표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답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 확인 안에서 필연적으로 내 사심을 느꼈을 텐데도. 


고백이 끝나고 10분쯤 뒤에 걸려온 전화에서 그 설명이 시작되었다.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화끈한 대사로 시작되었다.


'하늘이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고 표현해줘서 고맙고, 계속 나를 받아 줘서 고마워.'


 의외로 느끼하지는 않았다. 전파를 타고 흐리게 흘러나오는 선배의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네가 좋지만...'


  처음 들었을 때와 비슷하게 가슴 한구석이 저려왔다.


'너를 사랑하지 못하겠어.'


 통화했을 때와 똑같게도, 몸이 잠시 굳었다. 잠시 뜸을 들이며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귀에서 흘러나왔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음, 내가 너무 나갔니?'


'...왜요?'


 복잡한 생각과 여러 가지 가정을 떠올리며 나는 간신히 물었었다. 녹음된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네 사랑을 몰라서. 그리고 나는... 사랑을 조금 알거든.'


 그 뒤에 이어진 건 다른 여자 이야기였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가지게 되는 첫사랑. 그 정체는...


 아빠가 늦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왕복을 한번 할 시간인데도 오지 않았다. 지루해진 나는 딴짓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제 오후의 일을 잊기 위해 밤늦게까지 억지로 집중해서 공부했지만, 결국 통화 내역을 들으며 밤새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리해놓은 머릿속이 빗줄기의 풍경 아래에서 다시 혼란스럽게 집중이 풀렸다.


 모바일 데이터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글과 커뮤니티를 지켜보았다. 마음에 드는 글쓴이가 에세이와 기사문 사이의 무언가를 새로 업로드되는 날이었다. 나는 제목이 유발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들어가 보았다. 대충 모든 사람의 첫사랑은 부모님이라는 식의 뻔한 말을 유려하게도 써놓은 글이었다.


 아빠한테 연락할까 고민할 쯔음, 멀리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확신이 안 들어서 카메라를 열고 줌인 기능을 활용하니 눈에 익은 체격이 보였다.


"언니?"


"하이. 잘 잤냐."


"아니. 아빠가 아침부터 청소기 돌렸어."


"어우."


 매끄러운 목제 손잡이가 인상적인 검은 우산 아래로 옷을 잘 차려입은 언니를 볼 수 있었다. 언니는 나를 비 맞은 유기견 바라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가 왜 왔어?"


"집 가는 길에 뭐 사올 거 있냐고 엄마한테 물었더니 너 주워오라더라."


"우산은?"


"빌렸어."


 언니가 빌렸다고 말할 때는 남의 물건을 반쯤 강탈했다는 뜻이다. 이번 피해자는 남자친구 분이겠지.


"가자."


"내가 들게."


 언니는 턱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산은 넓었다. 언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호의를 냉큼 받지 않고 같이 우산을 들어주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한번 물어보고 싶을 때쯤 언니가 물었다.


"요즘 공부 안 돼? 아님이상한 사람이라도 꼬였냐?"


 시비조였다. 


"표정이 왜 썩어있어."


 내가 시비조로 반문하기 전에 저쪽에서 한번 더 날렸다. 그 말에 나는 얼굴에 긴장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닫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냥."


"그냥 뭐."


"그냥 그냥."


"너 요즘 사춘기 왔냐? 애가 삐딱해졌어."


"아니."


"사춘기 맞네."


 나보다 3년 일찍 태어난 내 가족이 나를 골렸다. 내가 반격할 말을 찾을 때에는 새로운 말로 언니는 빠져나간 뒤였다.

 

"고민 있으면 말해봐. 놀리게. 언니 심심하다."


 그러면서도 나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여간 감은 또 좋다. 나는 항복했다.


"하아... 이상한 사람이 있긴 해."


"누구. 남자?"


 언니의 표정이 사뭇 밝아졌다.


"남자."


 음침한 풍경 속에서 언니의 웃음이 맑았다.


"어떤 남잔데?"


"그냥 이상해. 자존감도 있고 생각도 있어 보이는데, 알다가도 모르게 혼자 삐딱해지고 우울해지고 그래."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너무 추상적이야."


 연애전선 1무 2패를 기록하고 현재 연패기록 경신에 도전 중이신 연애 전문가가 등판했다.


"언니."


"왜."


"사람이 보통 차이고 나도 연애할 생각이 또 드나?"


 똥 씹은 얼굴이라는 비유가 적절하게만 느껴지는 안면 근육 수축을 관찰할 수 있었다. 


"왜 물어."


"그 사람이 옛날에 많이 사람 사귀고 다녔다는데, 지금은 다 헤어졌다고 하거든."


"근데? 그 애가 니한테 찝쩍대디?"


"아니. 알아서 거리를 두던데."


"그럼 그 친구가 왜 이상한데?"


"어. 그러니까 그 친구라는 게 이상해."


 대화가 빙빙 도는 느낌이 들어 상담관 역을 자처한 언니에게 더 확실하게 말해봤다. 


"이 악물고 친구로만 남으려고 하는 느낌이더라. 희한할 정도로."


"그게 이상하다고?"


 언니는 잠깐 생각하더니 자신의 추측을 확인하는 문구를 던졌다.


"그게 이상해 보인다면 뭐, 니가 친구 이상으로 나아가자고 고백이라도 했었냐?"


 정곡을 찔렸다. 숨이 턱 막힌 사이 언니는 나를 잠시 아무 말 없이 주시했다. 언니가 더 황당해하는 기색이었다.


"진짜냐?"


"아니거든."


 언니는 내 반응에 정신을 차리고 한 박자 늦게 깔깔거렸다.


"아, 그래. 그래. 그러면, 어, 그럼 아직 고백은 안 했는데 더 나아가고 싶다는 거네?"


"아니라고."


"이야. 우리 예은이 달라졌네. 경사 났어."


"아니라니까. 그냥 신경만 쓰인다고."


"오올~"


"아 좀."


 언니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우산을 휙 뺏어 빠르게 걸었다. 언니는 황급히 내 어깨에 바싹 붙었다.


"야. 그래서 걔가 왜 신경쓰이는데. 어쩌다 친해졌고?"


"그냥 같은 동아리야. 친해지고 싶어져서 친해졌어. 책 읽는 것도 맞고, 생각하는 것도 통하는 것 같아서."


 가치관이 다를 뿐, 생각하는 방식과 태도가 나와 전반적으로 비슷하다는 게 내가 선배를 지켜보며 느낀 감상이었다. 독후감을 비교해 봤을 때도 쓰는 방식이 거의 똑같았다. 


 지식은 같아도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재혁 선배를 통해 느낀 1학기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여자 많이 만나봤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허공이 턱을 괴고는 끙 소리를 내며 망상을 통한 상담을 시작했다.


"딴 여자 만나는 거네."


"그건 아니야. 직접 없다고 말했었어."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가장 개연성 현실성 다 있는 게 그것뿐인데."


"별로. 다른 건 또 없어?"


 언니는 다른 추측을 원하는 내 요구에 뭐라 답하려다가 말고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인다는 듯이 혀 차는 소리를 쯧하고 냈다. 그리고 화제를 살짝 바꿔 말했다.


"걔 인기는 어떤데, 잘생기고 잘하는 거 있고 그래?"


"그냥저냥."


 내 말을 듣던 언니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탄식했다.


"잘생겼나보네. 그런 남자애가 그러면 별거 있겠냐. 어장관리지."


"아니라니까."


 언니는 뭐라 답하려다가 만 말을 다시 끄집어냈다.


"중증이네. 사람이랑 말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 찐따가 제대로 당해버렸구나아..."


 나는 그냥 말을 관두기로 했다. 자전거 대여소를 지나치고 공터를 가로질렀다. 이번달 초의 풍경이 떠올랐다. 세 명이서 걸었던 길목을 둘이서 걸었다. 털이 거의 다 빠진 민들레가 젖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뭘 듣고 싶은 거야. 어장 탈출하는 법? 아님 선택받는 법? 참고로 둘째 방법은 나도 모른다."


 그러시겠지.


"언니는 어장용 변명 구분할 수 있어?"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묻기로 했다.


"쉽지."


 언니는 손을 턱에서 내려놓았다.


"아, 그래서 그렇게 물은 거냐? 걔가 그렇게 말했어? 연애 많이 실패해봐서 무섭다, 그렇게."


"응."


 그리고 위로하는 투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변명이네."


"그게?"


"당연히 변명이지. 어떤 연애 후유증 있는 X끼가 여자한테 먼저 다가가 놓고 친구로 지내자고 하겠냐."


 무거운 말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언니의 솜씨가 돋보였다.


"괜히 죄책감 가지게 유도하는 가스라이팅지 뭐. 낚이지 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은근히 살의가 느껴지는 말이기에 지적할 수도 없었다. 이게 가스라이팅일까. 


"그게 있잖아, 내가 먼저 다가간 거거든."


"뭐?"


 어장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언니의 뇌가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애한테 니가 다가갔고, 그 친구가 너를 쳐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언니는 혼란에 빠졌다. 크게 변한 내 사생활이 놀라웠을 것이다.


"흠, 진짜일 수도 있다는 거네?"


"응."


 언니는 상담사가 유지해야 마땅할 평정을 간신히 되찾고는 정보를 캐냈다.


"차여도 또 사람 사귀고 싶다는 거라... 그건 케바케인데 연애 한번만 하는 사람이 없긴 해. 걔가 여러 번 연애했다가 차였대?"


"응." 


 저번에 셋이 있을 때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화제가 나왔다.


"그러면 진짜로 연애에 지친 걸 수도 있겠네?"


 공원을 빠져나가 길거리로 나왔다. 한 우산 아래에서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건... 시간이 약이지."


 언니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붙잡고는 물어봤다.


"야, 그 남자랑 말 자주 하냐?"


"많이 해."


 언니는 나를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잘하고 있네."


 나는 손을 뿌리쳤다.


"대화 자주 하고 다니면 나쁘게 흘러가지는 않을 거야. 결국 사람끼리 만나는 데 소통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어장이든 진짜든 가까이 붙어지내다 보면 어떻게든 결판이 나겠지."


 작년 말에 술 퍼마시고 톡 왜 안보냐고 넋두리를 하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빙성이 있는 말이다. 


"근데 연애에 지쳤다는 건 무슨 뜻이야?"


"감정을 소모하기 힘들다는 뜻. 연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감정도 있고 가끔씩 억지로 끌어쓰는 감정도 있는데, 은근 피곤해. 넌 모르겠지?"


"그건 보통 얼마나 오래 가?"


"글쎄?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지. 근데 첫사랑도 아닌 이상 별로 길지는 않을걸. 연애 많이 해봤으면 금방 사라지고."


 언니가 의욕적으로 분석했다.


"야 잠깐만. 걔는 니가 오는 걸 받아줬지?"


"응."


"대학교랑 고등학교랑 환경이 달라서 애매하기는 한데, 그러면 별로 후유증 같지도 않은데? 진짜 후유증 생기면 사람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찌질해지거든. 알지?"


 알고말고. 1무 2패 기록자 씨.


 "그러면 이상해지는데. 어장은 아니다 치자. 그런데 친구로만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고? 다가오는걸 그렇게 막으면 뭐 남자 좋아하는 애 아닐까?"


"아니래."


"그건 또 어떻게 알아."


 언니가 피식 웃었다.


"직접 듣기라고 했냐?"


"응."


"할 말 다 하는데 연애는 안 받아주는 건 또 뭐야. 진짜 모르겠네."


 언니는 혼란을 떨쳐내지 못했는지 점점 의욕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아 모르겠다. 당사자끼리 원만하게 합의를 봐."


 의외였다. 참견쟁이가 이러다니.


"나중에 일 벌이고 그때 좀 더 얘기해 봐."


"훈수 안 두네?"


"니들끼리 나름대로 '우리'를 만들어갈 건데 내가 뭐라고 끼어드냐. 나도 내 일 바쁜데. 훈수가 아니라 니가 사랑이랍시고 X신짓할까봐 걱정돼서 물어본 거다."


 그런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인가.




'우리가 계속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직은.'


 재혁 선배는 우리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고 말하며 내 감정을 거부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기에, 밀어붙일 수 없었다.


 짧지는 않은 시간동안 선배는 그 나름대로 인생을 살면서 가치관과 경험을 쌓았고, 내 경험보다 더 깊이가 있었다.


 단순한 겁은 아니었다.


'...내 어머니는 자살하셨어. 집구석에서 사랑에 시달리시다가.'

 

 언니의 설명으로 확실해졌다. 선배의 그 가치관은 단순한 후유증이 아니다. 트라우마다.


 그건 경험이었다.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도 없는. 선배도 그 사실을 알기에 자신조차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포기해 버린.




"관계가 더 좋아지고 싶다면 자주, 많이 대화해 봐. 그러면 이상해 보이는 걸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니가 진짜로 좋아한다면."


 선배와 하던 상담이 겹쳐 보였다.


'네 사상은 좀 위험해 보인다. 말도 안 나누고 사람 멋대로 평가해서 급 나누는 건 까놓고 말하면 좀 싸가지 없거든? 멋대로 나쁜 이미지 모르는 사람한테 투영하지 말고 말을 좀 해 봐. 그런 편견은 고쳐야 되는 태도다.'


 내가 유일하게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 그 사람을 알 수 없는 이유. 지금에서야 실마리가 조금 잡혔다.


'여보세요, 듣고 있지? ...아직 난 너를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냐.'


 상대를 더 알아가기 위해 하는 게 연애라지만, 친구를 연인으로 바꾸어 관계를 제약할 필요도 없다.


 그런 논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선배에게 별로 자신을 알리지 않았었다. 내가 선배를 알려고만 했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공주병이 이뤄낸 작은 확인이었다.






 횡단보도가 나왔다. 기다림이 시간이 찾아왔다. 살짝 물이 고인 점자블록 사이로 발을 올려놓았다. 발이 눅눅해진 느낌이었다. 차가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실없는 소리를 꺼냈다.


"내가 남자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보다 안 놀라시네."


"한참 전부터 너 요즘 이상하게 밝아져서 분명 뭔가 있다 싶었거든. 이 사춘기야."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두 번째 메신저 앱을 켰다. 프랑스어가 다시 보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


 짤막한 인사. 쉬우면서도 어려운 인사를 보냈다. 전파를 타 몇 초 차이로 전달된 문자. 이런 게 중요한 거겠지. 매질이 공기로 바뀌더라도 같을 것이다.


 재혁 선배는 이상하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할 일은 쉽고 명확하다.


 서툴더라도 시도는 해야겠지. 삶을 옮기기 위해서는.






 빗발은 여전히 거셌다. 하지만 하늘은 연했다. 이 비는 분명 소나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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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거 퇴고하겠답시고 다시보다가 내상입고 현자타임 와서 오래걸렸읍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써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다가 네번쯤 갈아엎고 간신히 썼고...

또 나중에 퇴고하면서 내용 바뀔지도


그동안 쓴거 전반적으로 다듬었습니다

개잡소리지만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