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분명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태어나 변변히 배운것도 없는데, 기이하게도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어느새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지요.


분명 같은것을 보고 자랐음에도 그 사람은 저와는 완전히 다른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도 참 얄궂지요. 어리숙한 저를 가르치며 제게 미소지어주던 그 소년은 이미 제 마음을 홀라당 훔쳐가버렸거든요. 어쩔 수 없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저처럼 아무것도 아닌 시골사람이었는걸요.


시간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어 도시로 떠나기 전날, 저는 수치를 무릅쓰고 얼굴을 붉히며 제 마음을 고백했답니다. 도시에 나가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거라 뻔히 알면서도 저는 제 욕심만을 위해 그 사람을 붙잡고자 했어요. 정녕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죠.


청년은 곤란한 듯 나를 보았어요. 그 눈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해서, 그 속에 담긴 저에대한 약간의 안타까움과 더불어 곤란함이 엿보였지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저를 향한 사랑만은 없었어요.


크게 실망한 저에게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감춰왔던 그만의 비밀을 말해주었어요. 그는 무려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답니다.


맨 처음의 생에서, 그는 결코 잊지 못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지금과 같이 여러번 이어지는 생애를 계속해서 훌륭하게 이끌어나갈 기둥이 되어 주었다고 했어요. 벌을 받아 이러한 멍에를 짊어졌다 말하면서도, 그 덕분에 그녀를 만나 좋았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사랑과 애틋함이 담겨 저는 그 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는 당신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텐데, 영원히 보답받을 일 없는 사랑을 이제는 잊고 제 사랑을 받아줄 수 없겠냐고 말했어요. 스스로도 비참하다 생각했지만, 저는 제 사랑을 이루겠다는 생각 이상으로 이 불쌍한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기이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답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어요. 그 이상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태도를 표한 그는 이내 가슴에 손을 얹고 마지막으로 답했습니다.


"설령 두번다시 만날 수 없다 한들, 오히려 제 곁을 스쳐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아내로서 행복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게된다고 한들, 저는 그녀와 했던 사랑에서 비롯된 행복함으로 인해 차마 이 추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미련한 이는 잊고, 부디 다른 이와 행복하게 살아주시길 빕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떠났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어요. 우리 나라는 점점 더 부유해졌고,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국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재상님은 전국에서 칭송받았어요.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현인이라며 모두가 그를 찬양했습니다. 작고 조용하던 우리 마을 또한 어느새 점점 더 커져 도시라 할 정도가 되었지요.


하지만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 마을에서 봐줄만한 미모를 보이던 저는 여전히 도시 교외의 작은 목장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그 사람이 더 잘해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행복을 빌면서, 팽팽하던 피부는 늘어지고, 먼 산까지 바라보던 눈동자는 눈앞마저 보기 어려워지면서도... 저는 그저 조용히 제 삶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 사람이 말한대로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길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건 제 길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분명 그 사람을 구해주고자 태어났다는 기이한 확신이 마음속에 있었으니까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던 이상, 저는 그저 세월을 흘려보낼 뿐이었습니다. 설령 어떤 삶을 살더라도, 그 사람을 구할 수 없었던 이상 무의미한 삶이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애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중 조용히 한 노인이 이 도시에 돌아왔습니다. 그 노인은 훌륭한 재상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리더였지만, 동시에 은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단순한 한명의 노인일 뿐이기도 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저를 찾아 집에 온 노인은 묵묵히 제 옆에 있어주었습니다. 그는 아무말도 해주지 않았고, 저 또한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데 그 사람에게 이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스한 손길이었지만 이성을 대함은 아니었고, 배려는 넘쳤지만 애정은 없었으니까요.


기이한 동거를 보낸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노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왜 당신은 이렇게 홀로 쓸쓸히 살고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더 나은 삶이 있었습니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사랑할 가치도 없는 제게 삶의 마지막까지 미련을 안고 있습니까?"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의 말대로, 이렇게 보답받을 리 없는 사랑에 생을 바치는건 아무것도 돌아올 수 없는 어리석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일까요.



그 순간에서야, 저는 진정 제가 왜 그런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제 사랑을 받아줄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끝끝내 고개를 내젓는 그의 말에 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래서야, 대체 언제가 되어야 저 사람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싸늘해진 소꿉친구의 손을 꽉 부여잡고 남자는 침울해졌다. 왜 매번매번, 이렇게 자신에게 일생을 바쳐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것인가. 이들에게 끝없는 미안함을 품게 만드는 것 또한 그분의 벌인가? 몇번이고 이어지는 삶 속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숙인 노인은 크게 한탄하고 이내 숨을 내쉬었다. 벌이 언제 끝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네. 이번에도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랑을 거부했어요.


한참전에 죽어버렸는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계속 저를 가슴에 품고 있는 걸까요.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제 저에 대해 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주었으면 하는데도.


어쩔 수 없지요. 미련하고 미련한, 자책감에 자기의 행복을 찾는것을 내팽개친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니까.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 전까지는 저도 잊을 수 없어요.


네. 부탁드려요. 다음에도 그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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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언제나 삶의 마지막까지 모든 기억을 잊고 살아갑니다.

언젠가 그가 그녀를 포기할때까지,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도 변치않는 그를 보며 안타까움을 품고, 다시 또 그의 곁으로 향합니다.

거울처럼 닮은꼴인 부부라 할만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