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1-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2-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3-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4-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5-




성소 근처에만 가도 네미아를 다그치는 호통소리가 가득할 것 같았다. 성화를 지키는 여사제들은 모두 무표정하면서도 한없이 엄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태도는 무릇 네미아에게 까지 닿아, 잠시나마 네미아를 맡고있던 여사제님들이 나를 다그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성소 앞에까지 다가가자.



“네미아는 실을 잘 뜨는군요.”

“에헤헤, 그런가요…?”



내 근심같은건 괜한 걱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성소에는 여사제들과 함께 웃는 네미아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통 웃지않는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여사제들도 꼭 엄격한 사람은 아니구나, 안도하며 슬쩍 성소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성화를 두르며, 도란도란 앉아있는 여사제와 네미아. 기다란 붉은 실을 늘어뜨려 헤진 부분을 꿰매고, 가위를 휘둘러 실을 거뒀다. 남은 붉은실은 꾸려 감아 실타래로 만들어놓는다.



“엇, 아르고스!”



여사제와 웃고있던 네미아는 내 얼굴을 보더니, 화색을 띄우며 달려왔다. 



“보고싶었어!”

“잠깐, 순례자님…?”



여기서 이러면, 원래 아는 사이라는 걸 들켜버릴텐데. 불안한 마음에 슥 주위를 둘러보자, 예상외로 여사제는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르고스. 저희는 둘 사이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미 저희도 다 알고있으니, 신전에 있는 동안은 편한대로 있어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제님…?”



“네미아에 대해선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르고스가 나쁜 마음을 먹고 데려온 것도 아닐테니 말이죠. 그나저나, 아르고스. 용케도 님프를 길잃은 순례자라 속이고 잘도 데려오셨더군요. 담이 참 크십니다.”



다 들킨걸까. 그러나, 베스타의 처녀들은 그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성화에 땔감을 넣고 있을 뿐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



“이번은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하겠지만, 다음에는 거짓말 하지 마시길.”

“아, 알겠습니다. 사제님… ”



거짓말을 들켰다고 생각했을땐 저 성화에 지져 죽는게 아닐까 했었는데. 그런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깊은 안도를 내쉬며, 네미아를 바라봤다. 



네미아의 눈은 마치 자신은 잘못한게 하나도 없다는 듯 영롱하기 그지없어서. 참, 뭐라 말하기도 힘들었다.



길잃은 순례자인 척하고 아는체 하지 말라고 그리 신신당부했는데도. 네미아는 입이 싸구나. 다음부터 네미아에게 비밀은 커녕 하나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헤어질 날은 다가온다. 뜻하든 뜻하지 않든 이별은 항상 곁에 있다. 무릇 전해내려온 옛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러한 이별을 달갑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눈물이 이별을 어찌할 수 없다면, 차라리 좋게 끝내자는 의미로 말이다.



“야야, 울지마.”



그런 말을 했을 뿐인데, 단박에 울음을 터트리는 네미아는 도저히 내 손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영원히 신전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삭까지 겨우 2주 남짓 보지못할 뿐인데. 



“그치만… 너무 좋았는걸.”



힘겹게 눈물을 닦아내는 네미아. 그토록 어르고 달랬는데, 눈물많은 네미아는 그칠 줄 몰랐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새 정이 든걸까. 하기야 오전 내내 잠만 잤다는 네미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소를 지키는 여사제하고도 둘러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눈 것만 같았다. 



하룻밤 정이지만, 네미아에게 있어선 소중한 불씨나 다름없으리라.



“좋은 사람들이 많이있긴 했지. 나라도 아쉬웠을거야.”

“응… ”



네미아는 그윽히 여사제들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가야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쉬이 발걸음을 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동자에는 미련이 차 올라 있었다. 



“조금, 그리워 질 것 같아… ”



네미아의 어깨는 축 쳐졌다. 



“자주는 아니겠지만, 네미아. 너만 원하면 다음에도 데려다 줄게.”



쳐져있는 모습이 보기 안쓰러워서 건넨 한마디에. 아까까지 온갖 슬픔을 머금은 수국같던 네미아의 얼굴은 거짓말같이 밝아져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약속할게.”



정말 알기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



이제 막 밤 쯤 되었을까. 



밖은 초승달이 올라왔다. 저녁밥을 먹고 막 눈을 감았을진데. 졸음이 몰려왔다. 피로가 겹겹이 쌓인탓인지,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에 들 찰나, 니카노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르고스.”

“무슨 일인데.”



니카노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저 귀만을 기울인 채 나는 침대에 누워, 니카노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만약에 말야.”



니카노르는 말한다.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그 말은, 몽롱한 정신으로 차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얼핏 귓가를 흘러들어오는 니카노르의 말은 넘겨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먼저 황금 가지를 꺾는다면, 그것도 예언대로 되는걸까…?”



아마, 전에 말했던 예언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떡갈나무에 걸린 황금 가지는 단 하나, 니카노르는 그 가지를 자신이 꺾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묻고 있었다. 



“니카노르, 하지마.”



잠이 깼다. 그 말을 듣고도 마음 놓고 잘 수 있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의식은 다시 또렷이 위로 부유한다. 



“어째서…?”

“그야… ”



이유랄게 있을까. 사지로 걸어간다는데.



“위험하잖아.”

“위험한건 나도 알고있어. 하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황금가지만 꺾는다면, 결국 예언이 어떻게되든 상관없게 되는거잖아.”

“그렇지만… ”



니카노르의 말대로, 황금가지를 꺾는다면 이번해 안에 더는 꺾을 이는 없었다. 그러니 꺾기만 한다면, 예언의 대상은 자연스레 니카노르가 될 터였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다른건 고려조차 하지 않은 엉터리 계획 같았다.



“나 결심했어.”



니카노르는 말한다. 애시당초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바보같은 짓이야, 니카노르.”



니카노르가 말하는 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저 예언이라는 확신만을 가지고, 불길에 뛰어든 부나방이 된 꼴이었다. 



니카노르의 계획에는 그저 그뿐, 어떻게 꺾을것인지 꺾은 뒤에는 어떨지 조차 계획되지 않는 백지나 다름없었다.



“너가 말려도 할거야. 이번이 내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기회니까.”

견고한 뿌리를 보는듯 했다. 결심은 바닥에 뿌리내려 도저히 꿈쩍하지 않았다. 

“진짜, 갈거냐…?”



아무리 말려봐야 생각을 바꾸진 않으리라. 무슨 말을 하든 듣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야 내가 막아봤자 힘만 뺄 뿐일테다.



“응.”



니카노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태평한 눈동자를 봐서야 속이 답답해라 터질 지경이었다. 대체 어째서 항상 내 말은 들은채 만채, 사지로 뛰어들려는걸까. 



“더는 안 말려.”

“알고있어.”



눈을 바라본다. 니카노르의 눈은 한 치 거짓없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속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리 없다.



니카노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졸릴리가 있을까. 



니카노르가 숙소를 떠나고나서, 나는 그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침대에 누워있다가 뒤따라 나섰다. 의미없는 짓거리인 건 아는데도. 내가 니카노르를 따라간다해서 녀석의 마음이 돌아설리도 없고,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니카노르의 비참한 죽음을 면전에서 볼 뿐이었다. 



그렇다고 넋놓고 잠만 자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차피 좋지 않은 결말을 봐봤자 머리가 더 복잡해질게 뻔할텐데도. 스스로도 모순적인걸 알면서도, 니카노르의 뒤를 밟았다. 



니카노르는 떡갈나무 앞에 멈춰섰다.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에 겨우살이로 뒤덮힌 황금가지만이 홀연히 빛난다.



저번처럼 부디 가지를 꺾는 시늉만 하기를. 평소의 니카노르처럼 두려움에 혀를 내두르며, 늘 그랬듯 태연한척 하기를 빌었다. 



니카노르는 그런 기대를 바람 맞히는듯 떡갈나무의 두꺼운 껍질을 짚고 한발자국씩 오르기 시작했다. 



한번은 발을 헛디뎠다. 한번은 껍질이 떨어졌다. 어떤 때는 떡갈나무에 기대어 곤히 자고있는 티투스의 눈가에 가루가 흩날리기도 했다. 



니카노르가 한걸음씩 나아가, 마침내 황금가지를 코앞에 둘때에는 차라리 티투스가 자는 사이 단숨에 끝나길 빌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짝. 니카노르는 빛나는 가지에 손을 뻗는다. 



가까운듯 하면서 먼 그 가지는 좀처럼 힘껏 뻗음에도 닿지 않는다. 고지가 눈 앞에 있어도 신의 변덕인지, 좀처럼 고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조바심에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 



위태롭게 얇은 가지에 발을 걸친 채 이파리에 조금씩 몸무게를 지탱해가며 황금가지가 달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갖은 노력은 끝내 가지를 부러뜨린다. 



니카노르는 하룻밤 새에 짧은 단 꿈을 꾸었다. 그러나 백일몽이 무색하게도, 황금가지는 떨어져 티투스의 이마팍에 떨어졌다. 



티투스는 눈쌀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제 이마팍에 떨어진 황금가지를 주워들고는 나무 위를 우러러 쳐다본다. 찰나동안 뒷골이 오싹했다. 



“누구냐.”



티투스는 묻는다. 백내장이 낀 눈을 한바퀴 돌린다. 희멀건 눈으로 어두운 밤, 오로지 달빛에 의존해 침범자를 찾는다.



제자신의 목이 베이기 전에 범인의 목을 베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채 주변을 살핀다. 이파리가 니카노르를 절묘히 감춰주길 바랬다만. 헛된 꿈이었는지, 다시금 부스럭하고 겉껍질이 떨어진다. 



“거기더냐?”



티투스는 천천히 움직인다. 손 안에 든 생쥐를 괴롭히는 고양이처럼, 숨통을 트는듯 하면서도 천천히 죄어온다. 티투스가 단도를 꼬나쥐고 나무를 한바퀴 도는 동안, 귀뚜라미 소리만이 귀를 간질인다.



쿵, 티투스는 발로 나무를 박찬다. 나뭇가지는 크게 술렁인다. 니카노르가 붙잡고 있던 가지가 우지끈 소리를 낸다. 



티투스도 그 소리를 듣고 발길질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쿵쿵, 아닌 밤에 우득 우드득 우레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래도 내려오지 않을테냐?”



두터운 고목은 휘청인다. 나뭇가지에서 들리오는 불길한 파찰음은 점점 거세진다. 니카노르를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는 이내 우지끈 가라앉는다.



니카노르는 퉁, 바닥에 내팽겨쳐진다. 티투스는 하얀 단도를 매만지며, 한걸음 한걸음 니카노르에게로 다가간다. 월광에 칼등이 비친다. 



이대로 가만 있을거야?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조금만 있으면, 니카노르는 원하던대로 바라던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그깟 가지가 무엇이길래, 저토록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는건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니카노르가 죽는건 두고볼 수 없어. 이대로 니카노르가 죽는다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니카노르가 자초한 일이지만, 겨우 가지 탓에 니카노르가 죽는 건 원치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웠다. 



한눈 팔린 티투스의 뒤로 다가간다.



티투스가 단검을 들어올릴때. 힘껏 돌을 내리찍었다. 



그 한방에 거신은 무릎을 꿇는다. 



초승달이 내리쬐는 밤. 



노장은 숨을 다하고, 디아나 여신의 반려는 바뀐다. 또다른 사제왕이 신성한 책무를 내려받으며, 오래 묶인 황금가지의 숙원은 풀린다.



“아르고스…?”



니카노르를 바라본다. 



“끝났어. 모두.”



숨을 가다듬는다. 



티투스를 죽였다는게 도저히 믿기지는 않지만, 손에 묻은 피가 그를 증명한다. 니카노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르고스, 너가… 죽인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거를 것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너가… 숲의 왕 인거야…?”



니카노르는 다시 묻는다. 



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누가 가지를 꺾었고 누가 전왕을 죽였네, 왈가왈부한들 무의미한 논쟁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밤, 증인은 우리 둘 뿐이었다. 구태여 논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돌을 내팽겨 던졌다. 티투스의 선혈이 묻은 돌은 먼발치 나아가 니카노르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예언을 이해한다. 



‘가지를 꺾는 이는 두명이오. 한 명은 디아나 곁에 있을테며, 한 명은 케레스의 손에 거둬질테니. 거울에 비친 이가 그리 되리다.’



니카노르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예언이 이내 니카노르를 가리킴을 알았다. 그리하여 니카노르는 디아나의 곁에 있을것이며. 예언은 이제, 길을 잃은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리킨다. 



“너에게 맡길게.”



티투스를 거목에 기대어 눕힌다. 부릅뜬 눈을 손으로 쓸어내려 가려주고, 혀 뒤에 동전을 한 닢 놓는다. 그러고나서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었다.




다음편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