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늘도,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다.


  햇빛이 창으로 들어온다. 석양이라, 샛노랗다. 그녀의 머릿결도 노랗게 물들었다. 수채화보다는, 유화같이. 하지만 유화는 아니다. 차라리 유화라면, 이런 괴로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됐겠지.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은 현실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부각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때 트럭이 우리 주변을 지나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내가 조금 더 주의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죄책감이 몰려든다. 최고의 순간이었어야 할 사랑 고백을, 망쳐 버렸다는 죄책감. 하지만 나는 이것이 그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음을 잘 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불행한 사고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갈 곳 잃은 분노는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향하고 말았다. 나 자신을 향하고 말았다.

  나는 그 분노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이성은 감성에 끌려다니는 기수일 뿐인 때문이다. 나의, 나를 향한 분노를 막아 줄 능력은 나에게 없다. 그녀라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 닿을 수 있음에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존다기보단 '잔다'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눈을 감고, 샛노란 햇빛을 받으며, 고요하게 잠을 자고 있다. 그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나 자신을 책망하는 이런 모습을 알면, 어떤 말을 할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를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런 꼴에, 자신의 한심함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서도 나오지 않는다니, 이상하네.

  "……."

  답답함에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나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 초라한 나와 대비되는 곱고 또렷한 그녀를 보고 어떤 감상에 젖어서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역시 모르겠다.

  상술했듯이 이성은 감성에 끌려다니는 기수일 뿐이니, 이성은 감성이 한 말을 잘 모른다. 그러니, 모르겠다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인지, '그때'의 그 '감정의 말'은 기억난다. 후회와 죄책감에, 거세게 쏟아지는 비와 끔찍한 사고에 끝끝내 세상에 완전히 나오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밝게 빛나고 있는 그 말—

  "좋아해."


***


  어느새, 그녀가 눈을 떴다. 해도 졌으니, 곧 집에 갈 채비를 해야 하겠지. 그 예상이 들어맞아, 그녀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걱정되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런 '좋음'이 닿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너무 멀리 있었다. 나의 '좋음'은, 그녀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런 나의 꼴이 헛되고, 또 초라해 보였다.

  그렇게 자기를 낮추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의 눈을 향했다. 내가 살아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주쳤다. 한동안 마주쳤다. 그녀도 나도,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우리를 비추었다. 나와 그녀를 비추었다. 잘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썩 아름다웠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달의 포근함에, 몸을 맡긴다. 따듯함이 나를 감싼다. 나는 그 따듯함에, 졸린 듯, 눈을 감는다. 흐린 사야 속에서, 병상 옆 좌석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는 몸을 굽혀 내 병상에 팔을 슬쩍 얹었다.


  …….

  어렴풋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나를 구해줬던 거, 멋있었어.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말은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답하려고 했다.

  "……."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전하고 싶은 말도 전하지 못하는 그런 꼴에, 웃음이 나왔다.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꼴이 썩 초라했다. 초라했지만…… 멋있었다는 말이 자꾸 맴돌아 기쁨이 서리기도 했다.


  '너를 지켰었구나.'라고, 생각했다.

  달려오는 트럭을 보고, 너를 밀쳤던 건, 아마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론 둘 다 죽지는 않았으니, 꽤 괜찮은 행동이었던 것 같다. 네 입장에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런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말아줘. 네가 날 생각하는 만큼, 나도 널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말이 참 기뻐, 미소 지으며, 눈을 희미하게 떴다.

  "……듣고 있었구나. 어쨌든, 난 기뻐. 네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실은, 나도 쭉 너와 같은 마음이었어. 하지만, 나는 겁쟁이여서…… 내 마음을 전할 수 없었어. 너도 같은 마음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어."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에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안심했어. 비록 끝까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너와 내 마음이 같았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누그러졌다.

  "그렇지만, 그 기쁨은 너무 짧았어. 내가 부주의했지. 차가 잘 안 지나간다 해도, 횡단보도니까. 너무 기뻐서, 몸이 굳어 버렸어. 그런데, 그거 때문에 네가……."

  그녀의 눈에서, 희미하게, 눈물이 흘렀다. 아주 작은, 은빛 물방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거기서 뜬금없이 고백을 한, 내 탓이지.'

  너무나 안타까웠다. 갈 곳 잃은 슬픔은 이제 내가 아닌, 네게로 흘러갔다. 이제 나는 초라하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대신, 가 너무나 초라하고 안타까워서, 자기 탓이 아닌데도 자기 탓을 해서―



  "……어?"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에 닿은, 손을 바라봤다. 그 손은,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횡단보도에 서 있던 그녀에게 고백을 했던 나의 탓도, 빨간 불과 경적에도 몸을 움직이지 않은 그녀의 탓도, 제삼자의 탓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 손 속에는, 오직 그녀만이 있었다.

  눈가에 닿은 손을 통하여, 눈물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감촉에 흠칫 놀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사그라들었다. 지금 우리의 세상에는, 오직 그녀만이 실재했기에, '나'의 감촉은, 그리고 감촉에서 비롯된 놀라움은, 그녀의 광색에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녀만이 있었다. 그녀에게 네 탓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위로하고 싶었다. 손을 그녀에게 댄 채로, 입을 움직이려고, 힘을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힘을 들이려고 하여도, 들어가지 않았다. 들은 고개와, 곧게 편 허리가 있음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고개와 허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을 풀 수도 없었다. 그저, 그 상태를 유지할 뿐, 과거로도, 미래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 정확히는, 나아가지 않았다. 손을, 팔을 움직인 자는, 바로 나였기에, 내 감성이었기에, 나는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 감성, 나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를 원했다. '대체 왜?' 그렇게 물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의지가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곧 그녀의 후광이 사그라들었다. 내 의식의 혼탁함 때문이었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갑자기 들어왔다. 팔이 무거웠다. 무겁다. 잊고 있었던 수많은 종류의 통증이, 나를 감싸온다. 감싸안는다. 그들의 품속은 차갑고, 날카롭다. 그런 날카로운 품에, 찔린다. 아프다. 정신적인 아픔이 아니라, 신체적인 아픔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둘 다에 해당된다. 그것은, '정신'에서 비롯된 아픔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으려고 팔을 움직였었다. 그 때문에, 안정― 절대적인 안정이 깨지고 말았다. 팔을 쿡쿡 찌르는 가벼운 통증부터 시작하여, 곧 온몸을 두른 '그것'. 그 때문에, 그때에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통증, 달려오는 트럭에 부딛혔던, 그때의 통증이, 기억 ― 정신 ― 의 형태로, 뇌를, 마음속을 파고들어, 터진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졌다. 그녀는 달려왔다. 그렇게, 그때의 기억이 겹쳐 보인다― 쓰러진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


  다시 눈을 떴다. 감각은, 원래대로였다. 눈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정신만 뚜렷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대로임을 인식하자, 혼란스러웠던 순간, 다급한 목소리,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차례차례 떠올랐다. 쓰러졌던 것일까.

  머리가 아프지만, 손을 움직일 수 없다.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다.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굴리던 중, 누군가…… 그녀가 내 침대 시트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팔을 베개 삼아 머리를 시트에 파묻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나를 보살피다 잠든 듯했다. 비록 대답은 못 들었지만, 아니 질문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녀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좋아해……."

  그리고, 그녀는 "좋아해"라고,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답했다. 이건…… 고백에 대한 답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 아니, 그녀도 잠결에 말을 한 것이니, 내 말에 "좋아해"라고 대답했던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잠결에 한 말이 아니야."

  '……뭐?'

  당황했다. 내가 말했음에, 그녀가 답했음에 당황했다. 왜인지 느껴지는 맥락의 부재. 겉잡을 수 없는 전개. 나는 왜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다시 말할게. 좋아해."

  ―라는 그녀의 말이, 귀에 꽂혔다.

  "네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너무 불안해져서……. 사라지면, 너무 허전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생각했더니, 내 삶에 네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참 많다는 걸 깨달았어. 예전에, 초등학교 체육대회 때, 기억나? 나 때문에 꼴찌 했었던 거."

  '……응.'

  "그때, 애들이 날 욕할까 봐 숨어 버렸었지. 정작 애들이 뭐라 하는지는 듣지도 않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널 찾아서…… 숨을 거면 애들이 뭐라 하는지는 듣고 숨으라고, 적어도 나는 널 탓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지. 그게 좋은 위로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때 네가 했던 말, 적어도 내겐 위로가 됐어. 하도 옛날이라 기억이 좀 흐릿하긴 한데…… 적어도 난 널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좋았던 것 같아. 그 말로 두려움이 해소됐냐 하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분은 나아졌던 것 같아."

  '…….'

  "그리고 또……."

  그녀는 한동안 나와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중학교 때 짝꿍이 되었던 일, 서로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던 일, 크리스마스 파티 때의 일……. 근 7년간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운 추억들을 회상했다. 첫 만남부터 차례대로 재생했다. 12살, 13살 …… 19살, 오늘. 추억들의 나열은, 오늘에 다다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테이프는 더욱 길어졌다. 지금 이 순간이, 추억이 되어 쌓이고 있었다.


  그녀의 추억 회상에, 나는 대답했다. 그러면 그녀는 더욱 이야기했고, 나는 물음이 나올 때마다 또 대답했다. 그런 대화가 한동안 이루어졌다. 그렇게, 시간은 더욱이 깊어져갔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너도, 기억나지?"

  "당연하지."

  내가 그 말을 하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


  "그럼, 이제 갈게. 내일 또 만나!"

  그녀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진 채였다. 나는 손을 흔드려고 하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다시, 그때, 트럭에 치인 직후 그대로였다.

  그를 알아챈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순간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트럭에 치여, 의식이 없는 상태였을 텐데,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고, 어떻게 사고할 수 있었던 것이며, 어떻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인가.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가득 차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엉망진창인 머릿속에서 하나 뚜렷이 보이는, 말[語]이 있었다. 그 말은, 내가 끝끝내 꺼내지 못했던 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곁을, 항상 유일하게 지켜 주었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내 곁을 지켜 주었던 그녀를 위한 말,

  "사랑해."


  그 말을 품속에서 꺼내, 폭죽처럼 터뜨렸다. 폭죽 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하지만 그 형태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늘에 넓게 펼쳐진 새빨간 불꽃의 놀이를 보는 듯했다.

  그 아름다움에 만족스러워하며,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병실을 나서려던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었다.

  ……


***


  "……나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