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산을 타듯 올라가 보면 여러 흔적들이 보인다.



대부분은 흐릿한 안개와 같고, 가끔 깨져서 앞뒤가 안 맞는 조각들도 보였다. 살면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잊어버린 게 많았구나.


기억의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선명한 장면들이 영화처럼 재생됐다. 대부분은 그녀의 선명히 어여쁜 미소로 시작된 영화는 절로 미소 짓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 나이가 들어선지 숨이 가빠 온다. 그래도 정상엔 올라가 봐야지. 하며 그녀의 미소를 보곤 다시 걸었다.


느낌이 온다. 저 정상엔 분명, 내 생에 가장 의미 있던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난 군에서 행군하던 때의 경험으로 꿋꿋이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정상에 들어서자,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만 좀 따라와. 그냥 걷는 거라니까 이 추운 날씨에 뭘 얻어먹으려고."


나는 말했다. 아니, 내가 맞나? 노쇠하지 않은 젊을 적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 뒤엔...


"우연히 가는 길이 같은 게 아닐까? 이런 게 한두 번도 아닌 걸 보면 내 느낌상 운명일지도 몰라!"


"아, 그러셔. 우연히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 마주치고 은근슬쩍 따라붙어선, 맛있는 냄새만 나면 비루먹은 개처럼 눈빛을 보내온 게 수십 번인데 그게 운명이다?"


그녀의 짧은 단발이 찰랑이고, 날 따라오던 네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웃어 보였다. 흰 눈으로 덮인 배경에 시리도록 빛나는 미소였다. 약한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시절, 우린 참으로 이상한 사이였다.

나는 매일 죽도록 일하며 집을 오가다가, 일요일만 되면 산책을 즐겼고. 그녀는 그런 나를 매일 지나가는 시선으로 보다가 어느샌가 날 따라오기 시작하더니, 그녀 특유의 붙임성으로 아저씨처럼 보이는 내게 말을 건 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맨날 잘 사줬으면서?"


그녀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즐거이 웃는다.

그녀는 항상 배가 고팠고, 그런 네가 안쓰러워 잘 쓰지도 않는 돈으로 먹을 걸 사주곤 했다.


"... 야. 저거 봐라."


나는 길가에 세워진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붕어빵이었다.


"붕어빵!?"


그녀가 달려갔다. 나는 손의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아, 기억난다. 내 인생 두번째로 용기를 냈던 날. 나는 말없이 그녀의 입에 붕어빵을 물리고, 나머지를 봉투에 담아 사 가며 어디론가 걸었다.


"야, 너는.. 왜 나한테 관심을 주냐?"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빵빵한 볼을 달고 입가를 오물거리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봤다. 뭐. 사람이 물어볼 수도 있지.


"...꿀꺽. 우와. 아저씨가 나한테 뭐 물어보는 거 처음이야.. 해가 서쪽에서 굴러 떨어졌나?"


왜 굴렀는데? 아니, 이게 아니지.

사실은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사귀는 법도 모르고, 인간관계도 전무했었으니까. 대화를 틀 수 있던 것도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준 덕이었던 점을 보면, 젊을 적의 나는 한마디로, 아싸인 일 중독자였다. 질문 한 마디에 첫만남부터 3달 정도가 걸린 셈이다.


"뭐, 그래서. 답은?"


"아저씨는 왜 일요일마다 산책하는데?"


동문서답이냐.

하지만, 나는 답했다.


"집에 있기 싫어서."


"나도 같지 뭐. 나처럼 젊고 예쁜 애가 같은 시간에 지나치는 아저씨를 수십 번 보다보면 호기심도 생길테고."


나는 질렸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아주 뻔뻔하긴.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 "..."


"... 아니, 갑자기 말이 없으면 안 되지 이 답답아!"


그녀가 소리쳤다. 난 깜짝 놀라 아무말이나 내뱉었다.


"아니 그냥 뭐 생각할 게 있기도 했고 뭐 갑자기 내가 또 질문하면 이상하지 않나 싶기도 하잖냐."


"아, 쫌! 왜 이리 소심해!?"


결국, 그녀의 주도로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서로를 더 이해하는 날이면서, 내겐 세상이 확장된 날이기도 했다. 그 기분은, 굉장히 간질거리면서도 어쩐지 웃음이 나는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며 웃게 되는 날이 잦아졌다.


그 후로,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졌다.

사실 그녀 자신이 더 연상이라는 사실에 충격과 공포가 서린 표정을 짓는다던가, '연하인 아저씨가 사실은 초절정 꽃미남!?' 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다 내게 들켜서, 그런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관리했더니, 가끔 날 보다 침을 흘릴 뻔 하던가 하는, 그런 나날들이 이어져갔다.


기억난다. 

살아가기만 하던 삶이 점차 의미를 되찾아 제 색을 띄게 되던 날들. 점차 충실해지던 하루 하루. 다가오는 일요일이 내게 전부가 되던 그 날들. 그녀에게서 난 삶을 배웠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게서 무엇을 얻었을까?


"세희야. 살면서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응? 갑자기? ..."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렇구나.

나는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와 같았다.

우리는 성격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들 또한 달랐지만. 우리는 분명 같은 점이 있었다. 상처받으면서도 살아가길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일요일마다 밖을 돌아다니려 하던 것이 그랬고, 그 이유가 텅 빈 집안에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랬다.


그녀가 무언갈 맛있게 먹을 때마다, 나 또한 다채로운 맛을 느꼈다. 그녀가 손을 뻗은 밤하늘에 별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고, 그녀가 해온 행동들을 같이 느끼면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의미있게 바꾸고자 했던 거라는 걸.


나는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추워하던 네 손을 잡으며 고백했다. 내 생애 최고의, 첫번째 용기였다.


그날 그녀가 울면서 웃는 장면은, 여전히 시리도록 빛나며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산 정상에서 안개가 차오르는 산을 내려다 보았다.

선명했던 기억들이 점차 흐려져간다. 곧, 밤이 오겠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제발. 마지막으로.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숨이 가빠온다. 약해진 심장이 서서히 느려졌다.

몸에 힘이 빠지고, 나는 어느샌가 누워있었다.

점차, 안개가 나를 감싼다. 포근하면서도 차가워, 그래서 슬픈 안개.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리고.


별이 빛났다.


삐익- 삐익-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그만큼 심장은 꺼져간다.

나는 내 옆에서 침대에 기대 잠든 그녀를 본다. 그녀가 잡은 손은 주름지고 늙었지만, 여전히 빛나는 반지가 있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깨우려 노력했다.

마지막 시험인 것일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깨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가 당신의 삶으로 의미있게 살았음을. 그 고마움을 알릴 수만 있다면..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웃자.

누구보다 행복하게.

나는, 행복했으니까.


"... 여보?"


아, 시야가 흐려진다.


삑. 삑. 삑. 삑.


"여보, 제발. 여보!"


그녀가 내 볼에 손을 대면서 외쳤다.

아, 흐려도, 그녀가 보였다. 보인다.

그녀는 울면서 내게 매달렸다.


심전도의 소리는 점차 빨라지고, 나는 눈을 감으며 행복하게 웃어보였다.


젊을 적에 당신이 보여주었던, 행복한 미소를.



<끝>


심심해서 써본 순애 단편입니다!

마지막은 좀 슬프지만, 그래도.. 순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