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냐?"



 

물가에 가만히 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여인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털털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이 씨... 소리 죽이고 걸어오지 말라니까..."


"푸흐흐, 호랑이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거 아니야?"


 



여인의 곁에 커다란 호랑이가 다가오더니 이내 물가에 몸을 숙이고 물을 햝짝햝짝 마셨다.


 


 


"음, 언제나처럼 물맛은 좋구만."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데."


 


여인은 살짝 어깨를 튕기며 자랑하듯 말했다.



"근데 오늘은 뒷맛이 약간 이상한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산짐승들은 속일 수 있을 지 몰라도 나는 못속인다. 너 방금까지 이상한 생각하고 있었지???"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호랑이의 멱살을 잡았다.





"이, 이상한 생각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어이쿠, 흥분하는거 보니 떠본 게 맞았나보네.

근데 일단 이건 놔라. 저기 다람쥐가 쳐다보고 있는데 쪼그만 계곡의 신령한테 멱살이 잡히면 산군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그래도 여인이 멱살을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호랑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펑 소리와 함께 인간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자, 마음 편하게 이야기해 보셔. 이 모습이 더 편하지?"


"..."


"왜, 가슴 크기를 줄일까? 너보다 커서 신경이라도 쓰이..."


"멱살 말고 뺨을 갈기기 전에 조용히 해!"


"아따, 이년보게. 진짜 뭔가 큰일이 있나보네. 얼굴이 아주 새빨개졌다고. 한철 동백꽃도 그렇게 새빨갛지는 않을거다."


"이이익... 진짜아..."


"너는 물맛이랑 얼굴빛에서 속내가 다 드러난다고 이년아.

너 거기서 더 빨개지면 계곡물까지 너 따라서 끓어오르게 생겼으니 그만 부끄러워하고, 빨랑 이야기나 해 보셔."


 


여인은 잡고있던 호랑이의, 아니 호랑이의 눈빛과 모피를 가진 여인의 멱살을 놓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물가에 주저앉았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응?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신이 인간을 뭐? 너 어디 많이 아프냐?"



"나 진지해. 넌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아? 조언이라도 좀..."



"...조금 진지하게 조언 하나 하자면, 우리 같은 것들은 인간이랑 그렇고 그런 쪽으로 안 엮이는게 제일 좋아.

좋게 끝나는 꼴을 한번도 못 봤단 말이다."



"...하지만, 진짜, 정말로 좋아한다면..??"



"아이고,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구나. 그래, 니가 푹 빠진 인간이 누구인지나 좀 들어보자."



"매일 아침마다 물 뜨러오는 그 애..."



"응? 그 앞머리 길고 눈 밑에 점 있는 애?"



"응..."



"...너 개가 완전 하룻강아지 꼬꼬맹이인 건 알고 있지?"



"...응."



"미친년."



"하, 하지만 너무 마음에 드는 걸... 그리고 불쌍하기도 하고..."



"불쌍?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미행이라도 했냐?"



"인간으로 변신해서 마을로 쫒아 내려가 봤어..."



"아이고, 진짜 했구나. 갈 데까지 갔네."



"부모님이 전쟁때문에 돌아가셔서 혼자 산대... 마을 근처에 버려진 작은 오두막에서 사는데, 너무 초라하더라구..."



"저런, 부모 일은 좀 안됬다."



"그런데 그 아이, 혼자서 마을 심부름을 돌거나 하면서 매일매일 벌어먹고 사는거야. 성실하게."



"짐깐, 네 말대로면 그 아이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거 아냐? 내가 알기론 그 애 매일 아침 여기에 물 뜨러 올때 고수레할 음식 들고 오는데?"



"그러니까! 안 되는 형편에도 나한테 물 뜨러 오면서 고수레도 하고 간다구. 오늘 아침에도 밥 몆 덩이를 짚에 싸가지고 놔두고 갔다니까?"



"캬, 대단한 녀석이네. 네가 푹 빠진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구만."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는 지랄이, 그래도 그렇지 몆백살은 쳐먹은 년이 몇 살 먹지도 않은 꼬맹이를 사랑해? 에라이 미친년."



"...하지만 너무 좋은걸..."


 



호랑이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펑 하고 커다란 호랑이로 변신했다.


 

"네가 뭘 하든 말리지는 않겠다만, 내 경험 상 인간이랑 엮여서 좋을 건 없어. 너도, 인간도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 거다. 난 경고했어."


 

호랑이는 몸을 살짝 움츠리더니 이내 폴짝폴짝 뛰어 물가와 풀숲을 가로질러 숲 속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물가의 여인, 계곡의 신령은 호랑이가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입을 꽉 다물더니, 공중제비를 돌고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했다.


 


 


 


 


=====


 


 


 


 


 

 


이른 새벽, 닭이 울기도 전에, 한 소년이 빈 물통을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길은 그닥 험하지는 않았으나, 나무뿌리가 많아 아직 좀 캄캄한 새벽에 걷기는 좀 위험한 길이였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다니는 익숙한 길이였기에 소년은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으며 산을 올랐고, 곧 목표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곡가에 도착한 소년은 물통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품속에서 준비해 온 고수레거리를 꺼냈다.


어제 심부름 값으로 마를 얻었는데, 꽤나 큰 마라서 다 먹지 못하고 남겼던 것 중에서 성한 것만 추려 짚 속에 소중히 싸서 가져온 것이였다.


그것을 계곡 바로 앞에 두고 잠시 신령님께 올리는 기도를 하고는, 물을 뜨기 위해 물통을 집어올렸다.


 


"저, 저기... 너도 여기 물 뜨러 오니?"




소년은 물통을 든 채로 앞으로 고꾸라질뻔했다.

바로 옆에서 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였다.

겨우 정신줄을 잡고 옆을 바라본 소년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고 웃고 있는 예쁘장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소년의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첫번째는, 

이거 귀신 아닐까?



아님 구미호? 날 홀리려는 건가? 잡아먹으려고?



두번째는, 

이야, 이렇게 예쁜 귀신/구미호면 잡아먹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 나, 나도 매일 여기로 물 뜨러 오거든... 그런데... 너... 매일 여기 오니? 하하... 그, 그런데 난 왜 너를 못 봤을까. 하하..."


 


소녀는 부끄러운건지, 아님 뭔가가 대단히 어색한 건지 얼굴을 붉히고 더듬더듬 횡설수설하며 말을 건넸다.



소녀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긴장이 풀렸다. 아무래도 귀신이나 그런 건 아닌 듯 싶었다.


 


"그... 만나서 반가워! 우...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


 


소녀가 갑자기 불쑥 손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소년은 어어 뭐지? 하는 눈빛으로 그 내밀어진 손과 소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홀린 듯이 그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헤헤... 너 손 따뜻하구나..."


"으, 응..."


 


소년은 소녀의 비현실적으로 부드러운 손의 감각을 느끼면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걸까, 이 예쁜 아이는 대체 누굴까 하고 의문을 품었다.



한편 그 광경을 멀리 풀숲 속에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어쭈... 같은 나잇대 모습으로 변신이라,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호랑이 모피를 입은 듯한 모습의 여인이 턱을 괸 채로 그 광경을 복잡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샌가 저 멀리서 여명이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고, 

산 아래 마을로부터 새벽닭 우는 소리가 멀리멀리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