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뜨지 않은 한밤중.



신령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신령의 옆에서는 예전의 그 구미호가 불안한 눈빛으로 신령과 호랑이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둘의 앞에 호랑이 여인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신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1년 전의 일이였다.

신령 녀석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 게 말이다.



녀석은 그 동안 이래저래 많은 걸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전보다 자신의 계곡 앞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갑자기 울기도 했지만, 곧 기운을 차렸다가, 갑자기 다시 울기도 했다.

그래도 녀석이 살 의지를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서, 계곡물이 다시 마른다던가, 상태가 나빠진다던가 하는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호랑이 여인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신령이 복수에 그렇게나 집착을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복수가 하고싶지 않냐고 신령을 부추겼던 건,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고 기운도 내지 못하고 있던 신령 녀석을 어떻게든 기운차리게 해주기 위해 한 것이였다.

기운을 잃은 채로 계곡물도 저렇게 마른 채로 계속 놔두었다간, 신령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기에.



그저 그 순간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 말이였는데...

이렇게 1년동안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고, 실행 날짜까지 다 정했을 줄은...




실로 놀라운 집착이였다.



호랑이 여인은 약간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때 복수하라고 부추겼을까... 그게 최선이였을까?


끄응, 머리 아파.





"나, 다녀올게."



"...진짜로 복수하러 가는거야?"



"응."



"... 진짜 꼭 해야겠어?"



"이거 왜이래? 나보고 복수하라고 부추길 땐 언제고."





신령이 호랑이 여인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호랑이 여인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너도 이젠 알겠지만 너 기운 차리게 해 주려고 했었던 말이란 말야...


난 솔직히 너가 이렇게 계획까지 다 세세하게 짤 줄은 몰랐고..."





"우후후..."





신령은 음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솔직히 처음엔, 그냥 잊어버려고 했어.



덕분에 기운 차린 건 아직도 고맙게 생각해.

복수 생각을 하니까 기운이 번쩍 나는 거 있지?


그런데 그 다음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회의감이 느껴지더라고.

복수한다고 그이가 내게 돌아와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하면서 울다가 갑자기, 그이가 다른 년이랑 사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거야.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는 모습이 말이야.


그러니까 갑자기 열이 확 뻗치더라고?



못 잊겠어.



그이도, 복수도.

그러니까 지금 해결하러 가는거야.


걱정 마. 별일 없을테니까, 언니."





신령은 말 끝에 언니라는 호칭을 붙여주며 호랑이 여인을 향해 싱긋 웃었다.

호랑이 여인도 마지못해 마주 웃어주었다.





"언니라... 또 참 오랜만에 듣네... 잘 다녀와. 별일 없기를 바랄게."



"응."





눈치만 보고 있던 구미호는 둘의 대화가 끝나자 품 속에서 여우구슬을 꺼내들었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하는 검까?"



"응. 가자. 이번에도 잘 부탁해."





예전과 마찬가지로, 구미호와 신령은 단 몇 발자국 만에 순식간에 호랑이 여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호랑이 여인은 걱정을 잊기 위해 입에 담뱃대를 물었지만, 불안감은 옅어지기는 커녕 더욱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의미없이 담배를 태우다가, 불안감 때문에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그만 담뱃대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악! 뜨거워! 씨팔..."










=====










"...음. 약간 긴장되네."



"저도 그렇슴다. 왜 저까지 긴장되는지는 모르겠습다만..."



"...그러고보니 너는, 왜 날 도와주겠다고 다시 나선거야?

굳이 그래 줄 필요는 없었는데..."



"음... 그건 그때 신령님이 쪼까 불쌍했달까요. 어떻게든 도움을 조금 드리고 싶어서...

그... 안 좋은 일을 당하신 걸 코앞에서 보고 나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구요. 그래서... 헤헤..."




신령은 어색하게 웃는 구미호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구미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마워."



"앗... 아.. 헤헤... 네..."





한밤중의 수도 시내 걷기를 몇 분, 둘은 곧 목표한 곳에 도착했다.





1년 전, 신령이 사랑하던 남자가 신령을 배신하고,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던 바로 그 집 앞이였다.



신령은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열이 등골을 타고 뻗쳐 오르는게 느껴졌다.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자. 계획한 대로만 일을 치르고 가는거야.





"준비 다 되셨음까?"



"응. 가자."





둘은 높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담을 넘고 두 발이 안마당에 닿자마자, 거대한 형체가 불쑥 튀어나와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예전의 그 가택신이였다.





"바깥 귀신은 들어올 수 없다. 나가라."





1년 전 그때와 다름없는 딱딱한 말투의 가택신을 노려보면서, 신령은 뭔가를 꺼내들었다.

가택신은 신령이 꺼내든 것을 보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이거 너한테 아주 중요한 거지? 그치?"





가택신은 신령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줏단지였기 때문이였다.





"그, 그걸 어떻게?"



"궁금해? 안 알려줄건데? 너 이거 부숴지면 죽지? 이거 함 부숴볼까?"



"말도 안돼. 넌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 단지는 집안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었다. 네가 그걸 꺼내왔을리가 없다. 내가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렇게 믿어? 정말? 그럼 한번 네 믿음을 시험해보지 뭐."





신령은 손에 든 신줏단지를 안마당의 우물 속으로 던져넣어 버렸고,

가택신은 그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커다란 몸을 날려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신줏단지가 우물 바닥에 닿기 전에 가택신은 아슬아슬하게 단지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게 진짜 신줏단지였다면 말이다.





"...이, 이건."





부적이 팔랑거리며 돌덩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평범한 돌 덩어리에 주술을 걸어 신줏단지로 보이게 한 것이였다.


속은 것을 깨달은 가택신은 우물 밖으로 기어나오려고 했으나, 우물 밖에서 구미호가 뚜껑을 재빨리 덮어버리고는 그 위에 털썩 앉아버렸다.





"제가 마저 막고 있겠슴다. 아가씨 하셔야 할 일 빨리 하십쇼. 저도 엄청 오래는 못 버팁니다. 가택신들은 워낙 강력해서..."



"응, 고마워! 나중에 쓰다듬어줄게!"



"쓰... 쓰다듬...?"





다시 얼굴이 새빨개진 구미호를 뒤로 하고, 신령은 안마당을 넘어 그 커다란 기와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










신령은 신통력을 써서 집 안 어디에 누가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투시하기 시작했다.




저쪽은... 사랑방.


저쪽은... 손님방이네.




그리고 저긴...





신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그이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이의 곁에 다른 여자가 함께 누워 있었다.



그 둘의 곁에는 아기를 감싸는 포대기가 있었다. 그것도 두 개나.



신령은 분노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참아내며 냉정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 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쁜 놈..."






신령은 질근질근 씹어대듯 웅얼거리고는 그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신령은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방 안으로 내딛었다.


그이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고, 곁에 누워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면 살해 충동이 일어날 것 같았기에, 신령은 그 둘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저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포대기가 놓여 있는 곳으로 조용히 걸어가 포대기를 풀어냈다.





아기 둘이 포대기에 따로 싸여 곤히 잠들어 있었다.


둘이 굉장히 닮은 것을 보니 아마 쌍둥이인가보다.


게다가 둘 다 사내아이다.





신령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두 아기는, 그이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저 눈매하며, 오른쪽 눈 밑의 작은 점까지도...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신령은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방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아가들아, 너희의 부모를 원망하려무나."





신령은 두 눈을 꼭 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깊이 잠든 두 아기의 목에 살기넘치는 차가운 손을 가져다 댔다.










=====











"다 끝났어. 가자."



"끝났슴까? 생각보다 빨리 끝내셨네요."





구미호는 깔고 읹았던 우물 뚜껑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택신은 아직도 그 아래에 갇혀서 뚜껑을 두드려대고만 있었다.


둘은 다시 담을 넘어 집을 빠져나갔다.





"... 복수는 제대로 하셨슴까?"



"응."





신령의 두 눈은 공허했다.


허탈하면서도 어딘가 섬칫한 기색이 보였다.






"하하... 기대되는걸. 내일 일어나서 그이가 두 아들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결국 진짜 저지르셨군요."



"하하하... 내일 아침이면 온 집안이 뒤집어질거야..."







애써 웃는 신령의 텅 빈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악한 짓을 할 만큼 대범하지도, 악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분에 받쳐서 결국 일을 저질러버리고는 흘리는 눈물이였다.


신령은 이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순수한 사랑을 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