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몬붕, 김몬붕이라 불리우는 자가 있었네.


천지를 떨치는 용맹과, 산을 가르는 무위와, 그 오만한 용마저도 벗으로 두고 함께 창공을 가른, 전설 그 자체라 불리우던 자가 있었네.



김몬붕, 김몬붕이라 불리우는 전사가 있었네.


태곳적 예언이 조각된 벽화에, 세상의 불길과 혼란을 잠재우러 오리라, 그리 예견된 전사가 있었네.


천지에 울리는 명성과, 바다너머 이역만리 뻗어나가 칭송받는 무위와, 그 오만한 악마마저 굴복시켜 사역했다 알려진 전사가 있었네. 



김몬붕, 김몬붕이라 불리우는 영웅이 있었네. 


천지를 떨게 하던 마왕과, 산을 부수고, 바다를 마르게 하던 힘을 가진 사천왕과, 그 오만한 군단을 깨부수기 위해 이 땅에 도래했다는, 영웅이 있었네. 



김몬붕, 김몬붕이라 불리우는, 사내가 있었네.


오만한 마검을,


오만한 용을, 


제 벗으라 부르던 자가 있었네. 그들과 함께, 마왕에게 맞서던 전사가 있었네. 


모두가 무릎꿇고, 광명이 꺼지고, 어둠이 도래하던 그 땅에, 다시 한번 여명의 빛을 몰고 온 영웅이 있었네. 


우리의 곁으로, 한 줄기 빛이 되어 돌아온, 위대한 영웅이 있었네. 


천지를 가득 메운 슬픔과, 산과 바다에서 몰려든 사람과, 그 오만하던 왕국과 제국의 제왕들마저 고개숙여 경의를 표한, 영웅이 있었네.


천지를 채운 꽃과, 산과 바다 넘어, 이역만리에서 찾아든 온갖 금은보화가 그를 위해 바쳐졌다네. 


허나,

허나,



김몬붕, 김몬붕이라 불리우는 사내가 있었네. 


오만한 자들의 조의를 받은, 김몬붕이란 사내가 있었네. 


용과, 악마의 눈물로 짠 수의를 걸치고, 꽃과 보화로 장식된 언덕의 위에서 한 줄기 빛살이 되어 떠오르던,그런 김몬붕이라 불리우던 사내가 있었네.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잊혀지지 않을 전설을 쓰고, 


산과 바다가 그 자리에 머무는 한, 영원히 기억될 전기를 남기고, 


악마와, 용과, 오만한 자들의 눈물로 적셔진 피안길을 넘은, 



김몬붕, 김몬붕.

그런 사내가 있었네. 









그러고 보니, 그런 자도 있었지.


데오노라는 펜을 놓았다. 오늘로 몇 일 째인지. 격무에 시달려 잠을 이룬 적은 언제이던지. 강인한 용의 육신으로도 쉬이 이겨내지 못할 피로가 어께와 머리를 짓눌렀다.


그런 와중에, 잠시간의 휴식을 위해 부른 자였다. 데오노라는 화장을 덮어 힘겹게 가린 피로가, 건조한 눈을 적시는 눈물을 부르는 것을 느꼈다.


아아, 하품은 안 돼...


하지만, 용이라 한들 생리적 충동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는지라. 데오노라는 결국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하품을 하고야 말았다. 소리는 없었지만, 여왕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는 없었다.


음유시인이 황망해하며 물러나고, 뒤늦게 데오노라가 그를 안심시킨다.



" 진정하거라. 시인이여. 네 목소리는 맑고, 곡조 또한 훌륭했노라. 이것은... 아니, 미안하군. 여봐라! "



이 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내려라. 그러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자들이 음유시인의 옆으로 다가섰다. 음유시인이 고개숙여 말했다.



" 감사합니다. 공정하며 자비로우신 여왕 폐하. "

" 그래. 가 보아라. 고맙다. "



음유시인이 떠나가고, 데오노라는 한 박자 늦게 왕좌에서 일어나 몸을 푼다. 이제는 다시 격무에 시달릴 시간이었으므로, 하다못해 이 짧은 간격동안 굳어진 몸이라도 풀어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피로를 풀기에 안성맞춤이면서도, 품위를 어지럽히지는 않을 정도로.


데오노라는 목과 어께의 관절들을, 그리고 근육들을 풀어주었다. 우득거리며, 혹은 소리없이 부드러워지는 그 스트레칭은 데오노라가 즐겨 하는 동작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을 하고 나서,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리고 잠들기 이전에도 반복하고는 하던 동작들이다.


요즈음에는 습관적으로 행할 뿐인, 일종의 일상적인 버릇이었지만-


노래를 듣고, 데오노라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러한 버릇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떠올렸다. 오래 전에, 잊었던 기억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러고만 싶었던 기억이었을런지도.


김몬붕.


우스꽝스런 이름이다. 데오노라, 늙은 용의 눈이 회한으로 물든다. 

아아, 그 때에는 그러했지. 

기억의 조각들이 합쳐진다. 휘날리는 망토, 태양을 등지고 선 전사의 얼굴을 가리는 역광, 빛나는 성검과 저주로 타락한 검 두 자루를 짊어진 채 황야를 헤매던 기억.


건조함이 눈을 따갑게 한다. 데오노라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촉촉한 습기가 묻어나온다. 건조하구나. 건조해. 예전같지가 않아. 손을 뻗어 눈약을 찾는다. 몇 방울씩 넣고 나니, 따가움이 잦아든다.


하지만 과하게 흘려넣은 탓일까. 한 방울이 눈꺼풀 너머로 넘친다. 굴곡을 타고 흐르며 화장을 지운다. 피로의 흔적들을 지우려 덧씌운, 가면과도 같은 화장은 순식간에 번져나간다.


이런, 낭패였다. 데오노라는 급히 거울을 찾았다. 분칠 뿐이라면 그녀 혼자서도 가능하다. 왕은, 용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되는 법이라. 거울을 찾아 헤매던 손이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고, 빠르게 여왕의 얼굴을 자신의 상 위로 투영한다.


언제 봐도 아름답군. 데오노라는 살짝 미소지었다. 거울 속 용의 얼굴이 미소짓는다. 비늘들이 번쩍이고, 위풍당당하게 솟은 뿔이 수백년 전에도 그러했듯 단단하게 뿌리박힌 고목처럼 서 있었다.


그야말로 용, 그리고 그들의 여왕다운 풍채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겠다만..


데오노라는, 비늘로 덮힌 손이 굴곡을 따라 흐른 흔적 위로 덮히는 것을 본다. 한 쪽 시야가 어둠으로 덮힌다. 흘러넘친 눈약은 지워진 화장의 계곡을 만들어내었다.



김몬붕, 김몬붕이라 불리던 사내가 있었네.



여왕의 눈이 흔들렸다. 손이 가리는 부위가 늘어난다. 여왕은 입술을 짓씹었다. 흐릿한 피의 맛, 그리고, 고통.


하지만 그 감정들, 침전된 검은 덩어리들은 늪처럼 그녀를 끌어당긴다. 깊은 수렁 속으로, 데오노라는 그녀 자신의 발이 적셔지는 것을 느낀다.



김몬붕, 김몬붕이라, 내가 부르던 사내가 있었다.

내 적수, 나의 라이벌, 내게 첫 패배의 쓴맛을 가져온, 

어쩌면 지금보다도 강할, 전성기 시절의 그녀를 굴복시킨 전사가 있었다. 



몰아쉬었다. 데오노라는 한숨을 닮은 그것을 하품이라 여기기로 했다. 아아, 잊혀지지 않은 과거여. 그녀는 턱을 들어올렸다. 맺힌 눈물이 굴곡을 타고 흐르지 못하도록, 그저 말라 날아가도록 고개를 들었다.



내 사랑, 내 연인, 나의...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멈춘다. 여왕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날선 동공이 보이지 않는 기척을 향해 발톱을 들이민다.


어째서, 저 년이 이 곳에.


분명 그 곳에, 그와 함께 잠들었어야 할 텐데. 그리고, 어둠 속에서 악마가 솟아올랐다. 휘날리는 긴 흑발, 피처럼 붉은 검, 음란하나, 동시에 경건함마저 불러 일으키는 내제된 에너지. 용이 위협적으로 울었다. 마검은 다만 웃었다. 



" 아하하. 진정해... 데오노라. 위대한 용의 여왕님. 드래고니아의 명예로운 용기사왕. 긴 긴 세월이 결국 네 뇌를 완전히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모양이지? 네 오랜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까. "

" 헛소리하지 마라. 악마. "



여왕은 왕좌에서 일어나고, 곧 그 발톱과 이빨을 세웠다.



" 설사 이 손에 검이 없을지라도, 네년의 거짓 육신은 쉽게 찢어발길 수 있으니. "

" 어머나.. 기대되는걸.. 고귀한 여왕님과의 싸움이라니. "



악마는 날갯짓하며 떠올랐다. 그 다음 순간에, 그녀는 데오노라의 옆에서 나타났다. 짐승처럼 볼을 맞대고, 냄새를 맡았다. 팔을 휘둘렀지만, 악마는 이미 멀리 떨어진지 오래였다.



" 정말 오래간만에 맡는 냄새인걸,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렇지? 어쩜, 낭만적이어라... "



여왕은 입을 짓씹었다. 여유롭게 유영하는 저 악마의 입을 당장에라도 짓이겨 놓고만 싶었지만, 데오노라는 참았다. 돌고래처럼 허공 속을 헤엄치던 악마가 다시 대지를 밟았다.


꼬리가 흔들리고, 악마들 특유의 오만한 얼굴이 샹들리에의 빛 아래에서 푸르게 빛났다. 역안, 검은자위와 흰자위가 역전된 그들 특유의 눈이 조금정도 누그러진다. 곤색 입술이 요사스럽게 휘어졌다.


하지만-



" 격한 재회의 포옹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도록 할까.. 친구? 오늘은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거니까. "

" 용건? "



데오노라가 물었다.



" 그래.. 용건, 이를테면... "



악마의 눈이 젖어들었다. 악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어린다. 다만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그녀는 환희 속으로 빠져들고만 있는 듯 했다.


네가 사랑하는 그이가, 내가 사랑하는 그이가...



" 근처에서, 다시 한번... 깨어났다면, 어때? "

" 뭐...? "


용의 비늘이 곤두섰다.









저는 드래고니아에 압류되어있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은 진실입니다.

저는 당근을 흔들고 있지 않으며, 아마 그것은 치즈태비 고양이일 것입니다.

이 글은 데오노라님의 사주를 받고 쓰여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