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림표--







"내게 검을 들이민 그 선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트리아인이여."


흑기사는 투구를 쓰고 자세를 잡은 아론을 향해 도발적인 손짓을 했다.


"들어와 보거라."


평범한 체격의 자신보다 큰 아론을 눈앞에 두고서도, 흑기사는 일말의 동요조차도 없었다.


오히려, 여유가 넘쳐보이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지?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갔나?"


흑기사는 붉은 회로가 각인된 새까만 장검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 내가 한합 정도는 받아주겠다 했거늘."


아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보고도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는 사내는 네놈이 두번째다."


"고작해야 낡은 갑옷따위를 걸친 네놈에게 당황할 이유는 없지 않나."


흑기사는 검을 내리고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으로 다시 한번 그를 도발했다.


"시작해봐라. 그 갑주의 성능을 내게 보여봐라."


아론은 각오를 다지고 흑기사에게 돌진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의 육중한 대검이 흑기사를 향해 휘둘러졌다.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철덩어리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흑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흐아아아아-!!!"


터엉-!!!!


흑기사의 몸통을 향해 내지른 일격이 묵직한 철소리를 냈다.


단번에 인간을 토막내는 아론의 무지막지한 검격을 맞은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론은 노보시비르의 제일가는 검사로써 이름을 날리고 있는것이다.


"무슨...?!"


하지만, 그런 그의 명성이 무색하게도 - 무방비하게 서서 아론의 일격을 맞은 흑기사는 태연히 서있을 뿐이었다.


아니, 서있기만 했을 뿐이라면 아론은 당황하지 않았을것이다.


"내...검을...?!"


아론의 키보다도 크고, 보통의 검 보다도 두꺼운 대검을, 흑기사는 잡아냈다.


그것도 한손으로.


기기기기긱...


"크윽...!"


"...과연. 성능 하나는 확실하구나."


검은 건틀릿에 쌓인 왼손에 잡힌 아론의 대검을 천천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흑기사.


"주인님!"


블레이크는 당황한 아론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검을 놓고 탈출하셔야 합니다!"


그의 투구에 포착된 흑기사의 정보가 아론의 시야를 가렸다.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으로 착용자인 아론과의 전투력을 비교했던 그녀였지만, 우월한 신체능력을 지닌 아론의 검을 고작 한 손으로 막아내는 상황을 상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블레이크는 현재상황을 토대로 새로운 시뮬레이트를 개시했다.


상대와 착용자의 전투데이터를 비교해 연산을 거듭한 블레이크는 그 답을 내놓았다.


"주인님께서 대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시는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서 대피를!"


"...저걸 눈앞에 두고...도망치는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블레이크?"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에게 눈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아론은 얼어붙었다.


"...지금껏 검을 휘두르면서, 내 검을 막아낸 이들은 많았네. 아주 많았지. 하지만....그걸 손으로 막아낸 이는...저 남자가 처음일세."


아론은 식은땀을 흘리며 흑기사를 바라봤다.


"...아무리 힘을 줘도, 검이 빠지질 않아...마치, 처음부터 이랬던 것처럼...!"


그가 아무리 검을 힘껏 당겨도, 흑기사가 쥔 대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누구와 대화하는거냐, 아트리아인."


흑기사는 검을 잡은 채로 아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넓은 방에 서있는것은 너와 나 둘 뿐일진대, 네놈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구나."


그는 오른팔을 들어 아론의 가슴팍에 검을 가져다 댔다.


"...그렇군. 네놈은 갑주와 대화하는 것이렷다."


투구를 뒤집어 쓴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왔다.


"정말이지 역겨운 일이 아닐수 없군. 자의식 따위가 존재치 않을 물건마저도 마물이 되어버리다니."


흑기사는 가슴팍에 댄 검을 거두고 아론의 대검을 잡아당겼다.


"우윽...?!"


갑작스레 느껴지는 흑기사의 힘에 아론은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들었다.


흑기사는 다가온 아론의 목덜미를 콱 잡아내고 그를 바라봤다.


"...증오스러운 마물녀석. 네년의 안에 든 인간을 뱉어내라. 지금 당장."


"컥....!...네....이놈...!"


아론은 최후의 저항으로 흑기사를 향해 대검을 내리쳤다.


카앙-!


흑기사는 오른손에 쥔 검으로 그의 대검을 가볍게 막아내고 왼손에 힘을 줬다.


기기기긱...!


"컥...커헉...!?"


"당장 이놈을 꺼내라. 그러지 않겠다면, 이 자의 목을 꺾어 죽여주지."


"주인님...!"


"컥...끅...!...블...레이...크...!...그만...두게...!"


흑기사는 계속해서 아론의 목을 압박했다.


"이놈이 죽기를 바란다면, 그것도 좋겠지."


"헉...끅...흐윽...!"


아론은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며, 눈 앞이 흐려졌다.


"자....결정해라, 마물. 이놈을 꺼내고 살릴것이냐, 아니면 죽일것이냐."


흑기사는 갑주를 바라보며 블레이크를 협박하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블레이크는 하는 수 없다는듯, 갑주의 잠금장치를 하나씩 해제했다.


갑주가 찰칵거리며 움직이자, 흑기사는 사로잡은 아론의 목덜미를 놓고 그를 팽개쳤다.


"큭...콜록...콜록...우웩...!컥...!"


"그렇게 나오셔야지."


널부러진 아론의 몸에 둘러진 갑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잠금을 해제시켜갔다.


"...주인님. 대상의 목적은 마도갑주인 저입니다."


블레이크는 차분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숨을 쉬기 시작하는 아론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저의 기능을 사용해 대상의 눈을 가릴테니, 주인님께선 신속히 대피해주세요."


"콜록...블레이크...멈추게...!"


"죄송합니다, 주인님."


블레이크가 갑주를 완전히 열어 아론을 빼내려 하는 그때, 흑기사는 오른손에 쥔 검을 어깨에 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는 아직 '선'을 넘지 않았으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아트리아인이여."


흑기사는 갑주를 완전히 해제시켜, 무방비하게 노출된 아론의 멱살을 잡고 그를 들어올리려 했다.


찰칵. 삐빅!


바로 그때, 흑기사의 등 뒤에 무언가가 부착되는 소리가 들리고, 그를 향해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이 망할새끼야!"


쓰러져있던 그렘린이 흑기사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손에 쥔 기계장치를 눌렀다.


"이것은 설마...?!"


흑기사는 그렘린의 손에 쥐어진 기계장치를 보며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늦었다, 망할자식아!" 


퉁퉁 부은 얼굴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 그렘린이 흑기사를 향해 중지를 날렸다.


"더러운 마물년이...!!!"


흑기사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갑작스레 휙, 사라져버렸다.


"아흐...콜록. 퉷."


그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입에 머금어진 피를 탁 뱉었다.


"공간좌표가 어긋나서 어쩌나 싶었는데....운이 좋았다고 해야하나...젠장."


그녀는 손에 쥔 기계장치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쓰러진 아론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거기 아저씨! 괜찮아?"


아론은 누운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블레이크."


"네, 주인님."


"갑주를....다시 입혀주게."


"...네, 주인님."


온 몸에 힘이 빠진 아론이 힘겹게 말하자, 블레이크는 자신을 가동시켜 갑주의 잠금장치를 가동시켰다.


다시금 찰칵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론의 체형에 맞게 자동적으로 입혀진 갑주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며, 아론의 눈에 다시금 문양들이 떠올랐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움직일수가 없네. 도와줄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주인님."


"고맙네."


아론은 블레이크의 지원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우...."


블레이크는 아론의 신체 구석구석을 체크하며 부상의 여부를 검사했고, 소스라치게 놀라 검사결과를 말했다.


"주인님께서 방금 전의 흑기사에게 목을 잡히셨을때, 체내를 순환하던 마력의 일부가 그에게로 흡수된것 같습니다."


"그런가...어쩐지 힘이 빠져나가는것 같았다만, 내 마력을 흡수해간 게로군."


아론은 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줍고 블레이크에게 물었다.


"그 남자...정체가 뭐였는지 알겠나? 그는 자네를 노리고 있었네."


블레이크는 잠시 침묵하더니 풀이 죽은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분명합니다. 아마 그와 함께 이곳에 찾아온 저 소녀의 정보를 기반으로 저를 노린것으로 사료됩니다."


"어이! 어이!! 아저씨! 무시하지 말라고, 망할자식아!"


그렘린은 불만스러운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흠. 자네 생각도 그런가."


아론은 고개를 돌려 그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군. 잠시 대화를 좀 하느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거야? 여기에 그쪽이랑 나 말고...."


그렘린은 화를 내다 말고, 아론이 입은 갑주를 바라보며 견갑에 손을 올렸다.


"....카본 플라스틸에 아다만틸을 섞은 합금소재를 사용해 열과 충격, 내부식성의 강도를 높이고, 통상 갑주보다 추가적인 장갑을 장착해 방어력과 내열성을 더욱 높였네..."


"...으흠..."


아론은 눈을 빛내며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그렘린의 손길을 부담스러워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렘린은 핫, 하며 정신을 차리곤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대화를 한다느니 뭐라느니, 이상한 헛소리는 하지말라고!"


"거짓이 아닐세. 나는 자네가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이 갑주와 대화했네."


"뭐?"


"블레이크. 갑주를 벗겨주게."


"괜찮으신가요?"


"그녀가 날 부축해주겠지."


"...저 소녀가 주인님의 무게를 견딜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네의 존재를 입증하려면, 이것 말고 좋은 방법이 없지않나. 어차피 자네의 목소리는 나 말고는 들을수가 없다고 했으니 말일세."


".....하아. 알겠습니다."


블레이크는 스스로의 잠금장치를 해제시켰고, 온 몸의 갑주가 해제된 아론은 그렘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시....부축좀 해주겠나."


"뭐...?! 잠깐, 아저...?!"


갑주의 잠금해제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렘린의 어깨에 아론의 큼지막한 손이 얹어졌다.


"우윽...! 무거...!"


흑기사 일행에게 사로잡혀 근력을 보조할 장비를 모두 빼앗긴 그렘린은 약하디 약한 팔로 힘겹게 아론을 부축했다.


"...고맙군."


"갑자기 뭔 영문모를 짓거릴 하는거야, 아저씨...!"


"...블레이크."


블레이크는 홀스터에 넣어두었던 판떼기를 꺼내 스스로 움직여 글자를 휘갈겼다.


'안녕하세요.'


"...말도안돼...리빙 아머 시리즈엔 약인공지능밖에 없을 텐데....?"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네만...저 아이의 이름은 블레이크. 갑주 속에 혼이 깃든...'리빙 아머'일세."


블레이크는 손가락을 움직여 그렘린을 향해 내보였다.


'처음뵙겠습니다. 저의 이름은 블레이크. 마공학 갑주 '리빙 아머 시리즈'의 시험모델에 내장된 AI 인터페이스입니다.'


"...그렇다는군."


아론은 블레이크를 향해 손을 뻗자, 블레이크는 판떼기를 집어넣고 갑주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론이 블레이크의 손을 잡자마자, 펼쳐진 갑주가 그의 등에 입혀지며 찰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렘린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갑주를 입는 아론을 멍하니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MK.2(2호기)의 양산모델에는 저런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인공지능이 내장되어있지 않았는데...?"


갑주의 잠금장치가 모두 잠겨져 동기화가 진행중인 블레이크가 아론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마도공학에 관한 심도있는 지식을 가지고있는 모양입니다."


"뭐, 당연하겠지. 그녀는 그렘린이니까."


"그렘린?"


"그래. 유적에 잠든 유물들을 발굴해내거나, 독자적인 실험작을 만들어내는 학자와도 같은 자들이네."


"...그렇습니까."


아론은 입혀진 갑옷의 어깨부위를 손으로 만지더니, 그렘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내가 누구와 대화하고있는지 알겠나?"


".......줘."


"..음? 지금 뭐라.."


"네가 입고있는 그 갑주, 당장 내게 넘겨줘!"


"....그게 무슨..."


"갑주에 내장된 약인공지능이 유구의 세월을 거친 결과, 자신을 개량시켜 강인공지능이 되다니! 이건 역사가 뒤바뀔 정도의 대사건이야! 어서 그 갑주, 내게 넘겨줘! 사례는 톡톡히 할테니까!!!!"


그렘린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에메랄드빛의 눈동자를 빛냈다.


"하아...하아...이건 정말...세기의 대발견이야....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인간의 영역에 다다른 새로운 인격체라니...!! 굉장해...굉장히 흥미로워!!"


마치 광인처럼 눈을 빛내는 그녀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올라왔다.


그렘린은 천천히 아론에게 다가와, 블레이크의 갑주를 어루만졌다.


"시험제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소재를 사용해 제작된 갑주 자체로도 굉장한 가치가 있는데, 그 안엔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지성을 가진 AI가 있다니....이걸 연구해 다른 인격체를 만들어낼수만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시대가 뒤바뀔거야. 검과 마법만을 최고로 치는 이 세상에 기계와 과학이 세상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도록 할수있겠지..!!"


"......주인님."


"....듣고있네, 블레이크."


".....절대, 안됩니다. 결단코 거부하겠습니다."


"....말 하지 않아도, 알고있네..."


아론과 블레이크는, 눈 앞에서 몸을 비비꼬며 흥분하는 그렘린에게 조금의 경계심을 가져야겠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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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피 '페니' 마키나 멘델하이머


세상에 과학혁명을 불러일으키고픈 테크니션


1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


에메랄드빛의 눈동자와 짙은 녹색 머리칼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고대인의 유물을 발굴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마도구를 만들어내는 그렘린.


마도공학을 이용한 기계장치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렘린들 사이에서도 괴짜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하지만 그 괴짜라는 소문과는 다르게, 그녀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유물의 활용능력만큼은 다른 그렘린들마저도 한수 접고 들어갈 정도이다.


레스카티에 주변의 유적들을 탐사하던 도중, 레티에라 및 아트리아 유적지의 좌표를 발견해 누구보다도 빠르게 아트리아로 달려왔으나, 그 과정에서 사로잡히고 만다.


기계와 과학에 관련된 모든 부문에 큰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세상에 과학혁명을 일으켜 마법을 쓸 수 없는 이들도 불편함과 열등감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단 목표를 갖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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