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monmusu/33420045
2편 https://arca.live/b/monmusu/33574865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마신과 악마들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의 흑발 여성으로 변한 마신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지금껏 수많은 정령들을 봐 왔지만, 이런 건.. 나도 처음이구나."


모든 하프엘프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제에게 일종의 세례를 받아야 했고, 덕분에 빛의 정령과 연결된 그들은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국민들의 생명력을 순식간에 빼앗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연결 덕분이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엘프들의 상태였다. 한밤중에 기습당하여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엘프들은 몸으로라도 그들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귀를 쳐죽이자고 끊임없이 외치던 그들의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광기가 충만했다. 처음에는 마신조차 그들이 마법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빛의 정령의 치밀한 계획 덕분에 거의 모든 국민이 그녀의 광신도가 되어 있었다. 명령이라면 자기 가족마저 죽일 수 있을 만큼 엘프들의 믿음은 굳건했다. 정령의 연료 신세가 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그녀와 하나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엘프들은 졸지에 개죽음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마신과 악마들은 어렵사리 생존자 5명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생명력을 흡수당하지 않았던 남자 넷은 목숨을 구해줬음에도 되려 그들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개같은 마귀 새끼들! 하나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봐, 우린 너희를 구해줬을 뿐-"


"헛소리 마라! 그분께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네놈들만 아니었어도.."






전쟁에 참여한 악마들 중에는 왕국에서 제일가는 장군 다곤의 부관인 아이작이라는 이가 있었다. 17살이라는 꽤 젊은 나이부터 출중한 실력을 뽐낸 아이작은 페어리 같은 희귀종의 아이를 납치, 타국으로 밀매하는 거대 조직을 궤멸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26살이라는 나이에 상당히 높은 직급에 오를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애타게 생존자를 찾던 그의 눈에 젊어 보이는 엘프 하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몸 상태는 다른 이들보다는 비교적 나은 듯했다. 가까이 가 보니 피골이 상접한 엘프에게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생명력이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이봐! 정신 차려!"


의식이 없는 그녀를 안고 아이작이 악마들에게 돌아갔다. 때마침 그들은 생존자들과 말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너희 동족들이 모조리 죽어도 상관없는 거냐?"


"개소리 집어치워! 우리는 너희 같은 마귀들과 다르게 구원받아 천국으로 갈 운명이다."


"잠깐, 장군님! 여기 생존자 한 명이 더 있습니다."


그녀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던 다곤이 엘프들에게 물었다.


"이 여자는 이대로 놔두면 죽는다. 괜찮다면 우리가 데려가서 치료해 줘도 되겠나?"


"마음대로 해라! 쓸모없는 년 같으니.. 당장 여기서 꺼져!"





마신의 손짓과 함께 엘프를 품에 안은 아이작이 검은 연기에 흽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생존자를 찾는 등의 뒷수습을 하는 동안 아이작은 상태가 위독한 엘프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오밤중 온갖 소동이 일어난 끝에 그날 새벽 엘프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옆에서는 아이작과 지쳐 보이는천사 하나가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왕국에서 제일가는 의사였던 그녀는 자신의 체력까지 나누어 줘가며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엘프를 간신히 살려냈다. 비록 반쪽짜리라지만 엘프 특유의 강인한 육체도 큰 몫을 했다.


"매번 신세만 지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아이작의 상처도 몇 번 치료해 본 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몇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뭘요. 당신도 너무 무리하진 마요,"


"고마워요. 저 녀석.. 괜찮을까요?"


"일단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조금만 있으면 정신을 차릴 거에요."


때마침 엘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으, 음..."


아직 정신이 혼미했던 엘프가 아이작과 천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정신이 들-"


"마, 마귀...!"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더니 대뜸 둘에게 마귀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역시..."


이미 하프엘프들과 얘기를 나눠 본 아이작은 이 상황을 대략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령의 가르침에 따라 외부인에 대한 적개심이 특히 강했다. 더군다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엘프와 오크를 제외한 다른 종족을 본 그녀에게 둘은 마치 사악한 괴물처럼 보였다.


"여긴.. 어디지?."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아까 혹시 기억나?"


"맞아. 난 분명 하나님께 구원받고.."


"그래. 방해해서 미안하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당장 말해!"


무언가 이상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한 구석에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 녀석은.. 죽었어."




참고로 지난 화는 사이비 종교에서 가끔 일어나는 집단 자살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뒤에도 실제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 조금씩 나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