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monmusu/53695819?p=1


왕국의 개척지를 위협한다는 보고가 들어온 엘프 부족을 토벌하기위해 우리를 이끄는 젊은 대위와 이곳에 왔다. 마물과의 교전에 이골이 난 우리지만 우릴 태우라고 보내진 수병들은 거진 마물을 구경도 못해본 자들이라 걱정이 많았다.


배는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엘프의 마을에서 1km 떨어진 지점에 정박했다. 대위는 하선을 명령했다. 강을 따라가면 마을에서 더 가까운 지점까지 갈 수 있었지만 대위는 엘프들이 눈치챌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엘프들은 이미 우리가 배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가 막 배에서 내려 숲을 향해 진군할때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가 배에서 멀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즉시 응사했지만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화살은 아무렇게나 날아왔고 어디서 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총알은 허비되었고, 대위는 돌격을 지시했다. 타당했다. 이 상황에서 등을 보여봤자다. 


소위인 나는 앞장서서 뛰어야했다. 병사들과 내가 숲에 들어가자 엘프들이 보였지만 토끼보다 빠르게 숲의 안쪽으로 사라지고 다시 그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화살이 내리꽂혔다. 엘프들이 나무꼭대기에서 활을 쏘고 있는 것이었다.


도리가 없었다.


"승산이 없다! 퇴각하라!"


화살이 점점 더 빗발쳤고, 병사들은 무의미하게 총을 쏴서 나무를 맞추며 물러났다. 나는 나무 위를 문득 보고 비교적 낮은 위치의 엘프 하나를 피스톨로 쏘자 금발의 엘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여기저기에 화살을 맞은 병사들이 기어다니고, 나머지는 완전히 패주하며 배를 향해 달렸다. 숲 깊숙한 곳에서 활을 쏘던 엘프들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그물이 들려있었다. 칼을 칼로 상대할 줄은 알지만 그물은 처음이다. 나는 제일 가까이 다가온 엘프에게 덤볐지만 그물에 칼이 얽혔고 곧 여럿이 던진 그물에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 * *


우리를 싣고 온 배는 떠났고, 타지 못한 이들은 포로가 되어 묶여있었다. 죽은 이는 없었다. 그들의 화살은 신기하게도 맞은 자가 다치지않지만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주신교단은 언제나 병사들에게 '마물에게 잡혀간 이들이 편한 죽음을 맞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운명이 죽음만도 못한 것일까?


엘프들은 큰 짐승을 사냥하는데 성공한 원시부족처럼 자기들끼리 깔깔 웃으며 우리들을 훑어보고 있다. 치욕이다.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하다니... 유일하게 우리 부대가 한 것은 내가 쏴서 떨어트린 나무 위의 엘프년 하나 뿐이고, 그나마도 살아서 부축을 받아갔다.


그때 갑자기 엘프의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니 또다른 소위, 내 동기였던 친구가 묶인 손으로 숨겨둔 단도를 꺼내 자기 목을 찔렀다. 엘프들은 유난히도 달려들어 소리를 질렀고, 온갖 주문을 외며 이 친구를 살리려했다. 피가 순식간에 터져나온 터라 친구는 손 쓸새없이 절명했다. 


모든 엘프들이 충격에 빠졌다. 친구의 목을 부여잡고 있던 엘프는 울음을 터트렸고 다른 엘프들도 엉엉 울기 시작해 눈물바다가 되었다. 묶여있던 우리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 죽어서 그들이 날리는 노예값이 어마어마하기라도 한가?


이긴 자들도 진 자들도 모두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엘프들의 마을로 압송되었다. 어쩐지 끌고 가는 쪽이 우리 눈치를 더 살핀다. 바위에 머리라도 날려 죽기라도 할까봐? 나도 그럴 궁리를 해봤지만, 용기가 없었다.


나는 되뇌이고 있었다.


'신이시여. 영광받으소서. 가장 용맹한 순교자를 거두어주시고, 그를 보아서 죽을 용기가 없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 * *


엘프의 마을에 들어선 우리는 적잖이 놀랐다. 지붕을 고치던 남자가 우릴 보고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우리를 열띤 눈으로 보던 엘프 뿐이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남자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내 옆에서 걷던 엘프에게 말을 걸었다.


"여어, 루시아. 수고했어. 근데 표정이 왜들 이래? 모처럼 횡재했구만."


"말도 마. 끔찍한 일이야. 남자 하나가.... 스스로 죽어 버렸어. 우리한테 안 잡히겠다고....."


남자가 그 말을 듣고 벙져있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 * * 


나는 포로들 중에서 따로 불려나와 마을 중앙의 큰 집으로 갔다.


엘프족 족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이 자 맞니? 너를 쏜 남자가?"


"네, 맞아요."


옆에는 붕대를 감은 엘프가 누워있었다.


"네가 내 딸을 다치게 했다. 어떻게 책임질거지?"


"......"


책임이고 자시고가 어딨냐. 포로로 잡혀 묶여있는데.


"다시 물으마. 너희가 우리의 터전으로 쳐들어와서, 내 딸의 목숨을 빼앗을 뻔 했다. 어쩔 것이냐?"


'포로는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그게 전부지, 이겨놓고는 잡아놓은 자에게 책임을 지라하는건 승자답지 못한 일이 아니냐? 좋을대로 해라.'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실제로 한 말은 이랬다.


"...어떡할까요? 나을 때까지 내가 업고 다닐까요?"


썅. 내가 무슨 말을 한거야. 딸이 헉,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리고, 족장은 그녀와 눈빛을 교환했다.


"책임을 질 의지가 있는가보군. 좋다. 우리 마을 뒤의 봉우리로 가면 그 곳에만 피는 붉은 꽃이 있지. 그 꽃은 깊은 상처를 낫게하는 영약을 만드는 재료다. 풀어줄테니 딸을 위해 네가 그것을 가지고 와라. 우리는 네 동료들을 전혀 해치지 않았다는걸 기억하거라."


* * *


나는 천신만고 끝에 봉우리에 올랐다. 급경사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하면서 이틀이 꼬빡 걸렸다. 늦어지다가 족장의 딸이 잘못되거나 그들이 내가 도망친 줄 알기라도 하면 내 부하, 동료들은 끝이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 누워있던 엘프의 눈도 어른거렸다. 그 존재가 죽게 하고싶지 않다. 엘프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다만 우리 중 하나가 스스로 죽었을 뿐이다. 더이상은 그날의 일로 인해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싶지가 않다.


봉우리 위에 서자 화사한 붉은 꽃들이 가득했다. 나는 안도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숲이 끝이 없어 인간의 몸으로 빠져나갈 희망은 없어보였다. 나는 다시 침울해져서 꽃을 따모았다. 그때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어라, 오빠. 그 꽃을 누구 주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하피였다. 내겐 무기도 없어서 당황했지만 하피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엘프 족장의 딸이 위독해서 이게 필요하대.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나." 


하피가 쿡쿡 웃었다.


"정말, 그 딸이 '급하긴' 하지. 당신은 엘프들이 잔뜩 잡아온 남자들 중 하나구나. 참고로 말해두는데, 당신 하고 비슷한 옷을 입은 친구들이 가득한 배가 저쪽 바다 바위에 걸려있어."


뭐라고! 나는 하피가 가리킨 쪽의 바다를 봤지만 배가 보일 턱은 없다.


"말 나온 김에 구경이나 가야지. 그럼 행운을 빌어!"


하피는 퍼덕거리며 날아가버렸다. 나는 머릿속이 한층 어지러워진 채 하산했다.


* * *


"가지고,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꽃을 들고 마을에 뛰어들어오자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족장이 걸어나왔다.


"그 꽃은 소용이 없네. 상처를 치료하는데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죠?"


"치료마법이란게 괜히 있지 않으니까."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족장의 딸이 걸어나왔다. 상처입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후후... 그 꽃은 저를 위해 구해오신건가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저만을 위해?"


"그, 그런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엘프와 인간 남자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대체 어떻게 된거야?


"그 꽃은 엘프족의 족장이 반려가 될 남자에게서 받아야만 하는 꽃이에요. 전승에 따르면, 족장의 반려가 될 자격이 없는 남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이걸 어째야하나,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부대원들도 보인다. 내가 산에서 고생하는 동안 대접 한번 잘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총을 쏴서, 미안해....." 


나는 꽃을 내밀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흉터도 남지 않았어요." 엘프는 아름답게 웃으며 꽃을 품에 안았다.


* * *


환영의 축제가 끝나고 우리는 자살한 친구를 위한 무덤을 만들고, 주신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그를 위해 기도했다. 엘프들은 다시 눈물을 보였다. 어쩌면 이렇게 고귀한 영혼들이 있을까. 다시는 이런 일은 없어야한다. 


새로 탄생한 가족들을 위해 마을을 넓히느라 정신없는 동안, 우리는 배를 타고 떠난 이들의 소문을 하피들과 다른 마물들로부터 간간히 전해들었다. 그들은 숲 속에 기지를 짓고는 다른 마물들과 접촉을 피하며 배타적으로 굴고 있다고한다. 언젠가는 그들을 찾아가봐야겠다. 


물론 그때쯤 내가 그들을 설득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이 땅의 영혼들은 이방인에게 언제나 따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