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국정원이 괴뢰군 말고 괴물도 취조하냐?"


전세계 몇몇 곳에서 '균열 개방'이 발생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국장님의 전화를 받고 급히 짐을 싸서 대전 임시 사령부로 가는 헬기에 몸을 실으러 가는 길에 동행한 선배 사무관이 한 말이었다.

나는 재치있는 대꾸는 커녕, 한 숨만 깊게 쉬고 "그러게요." 라고 읊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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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씀 드린 대로, 위협을 느끼거나, 어떤 이유로 취조를 중단하고 싶으시면 '야자 나무' 라는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말하시면 됩니다. 만약 상황이 급박해서 즉시 탈출하거나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면, 허리 좌측의 노란 비상 프로토콜 버튼을 3번 누르시면 취조실 내로 수면 가스가 분출될 겁니다. 버튼을 누르지 못할 상황이 되면, 저희가 알아서 수면 가스를 분출 할테니 그에 대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국방색 전면 방호복을 입은 남성이 말하자, 국정원 방첩부서 소속 박 사무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면 가스가 '저것'에게 먹힐지는 짐작 조차 가지 않았지만, 최소한 위기 상황에서 대처 가능한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은 그의 침통함을 살짝이나마 덜어주었다.


"준비 되셨으면, 복도를 통해 들어가시면 됩니다. 무운을 빕니다, 요원님."


고개를 짧게 끄덕인 박 사무관은, 소총과 방독면, 대전차 무기까지 등 뒤에 맨 707 소속 병사들을 지나쳐 복도 끝의 회색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온몸을 감싼 전면 방호복 때문인지, 그냥 떨리는 심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걷는 것 만으로 박 사무관은 진이 빠지는 듯했다. 


솔직히 말해, 박 사무관은 지금 당장이라도 등을 돌려 이 복도를 뛰쳐나가 밖에서 목을 빼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타 기관 소속 사람들에게 '니들이 하쇼, 난 저 성경에나 나올법한 괴물한테 온몸이 조각나거나, 제정신을 잃고 정신병원에 평생 수감되는 꼴 당하기 싫으니까' 이라 외치고 집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취조실에 누가 처음 들어갈지에 대해서는 국방부 소속 기무사령부, 경찰 소속 국가수사본부, 청와대 직속 국가안보실, 심지어는 사태 초기에 투입되었던 육군 2작사 소속 정보처와 DMZ에서 일부 사단을 빼서 헐레벌떡 달려온 1작사 소속 정보처까지 다들 제각기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이 먼저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기열차게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직속 명령을 받고 달려온 국가안보실 제 2차장이 이런 국가 안보에 직결된 취조는 '전문가인' 국정원에서 우선 진행하는게 맞다며 교통정리를 한 덕에 국정원은 호기롭게 취조를 진행하고자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거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참으로 당연히 '차원문' 너머에서 온 인간들과 '인간 비슷한 무언가'들은 한글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어떤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인지, 라틴어는 할 줄 아는 사례가 몇몇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정원은 허겁지겁 전 직원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 아이비리그 유학 시절에 라틴어 강의 A+을 받은 기록이 있던 '산업스파이' 방첩 부서의 박 사무관을 데려왔고, 질문 목록과 비상 시나리오 훈련을 꼬박 밤을 세워 교육하고 승진을 약속한 뒤 이 취조실에 던져 넣은 것이었다. 박 사무관은 그 승진이 순직으로 인한 추서가 아니길 빌 뿐이었다.


'쓸데없이 미국 유학 시절때 상류층 문화를 배운답시고 A+를 받은 라틴어 과목이 마침내 내 인생에서 활용처를 찾았으니 다행이네. 인류 최초로 이세계 생명체를 취조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니 충분히 만족... 은 개뿔. 씨발, 하나님, 부처님, 제발 저 온몸으로 '난 대악마다' 라고 외치는 저 생명체가 사람 영혼을 빨아먹거나, 정신을 이차원으로 날려버리거나 노려보자마자 사람의 사지를 분해시킬 수 있는 개같은 능력은 없게 해주세요. 아니, 유럽에 나타난 차원문은 미군이 어찌저찌 통제 했다는데 굳이 내가 지금 목숨걸고 이짓거리를 하는게 맞는건가? 지구 방위대 미군이 몇일만 있으면 온갖 신묘한 방법으로 정보를 뽑아낼텐데 다 끝내면 번역본이나 달라고 하면 안되는 거냐고??'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 치는 가운데, 박 사무관이 무표정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 시선을 방 내부로 돌리자, 백색 취조실 한 가운데의 무미건조한 은색 테이블 맞은편에는 거대한... '대악마'가 바닥에 앉아 턱에 손을 괴고 있었다.


박 사무관은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그 '무언가'를 보자마자 믿지도 않는 기독교의 '대악마'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게 해주는 적색 피부, 그리고 3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근육질의 여성형 몸매와 그 위를 덮은 흑요색을 깎아낸 듯한 칠흙빛 갑주와 검정색 날개, 그리고 악마를 다룬 조형물 에서나 볼 법한 양옆과 앞 뒤로 자란 뿔 세쌍.


마침내 그 뿔 바로 아래의 인간의 것이 아닌 검은자위 한 가운데의 노란 동공과 마주치자, 박 사무관은 저절로 허리 좌측의 '비상 프로토콜' 버튼에 손을 올렸다.


'안돼. 국정원 10년차가 지금 쪽팔리게 뭐하는거야? 지금 밖에 온갖 정보기관 소속 공무원들이 다 보고있을텐데 국정원 이름에 먹칠하는게 말이나 되냐고? 프로페셔널 하게 하자. 프로페셔널 하게.'


사회생활에 찌든 그의 생각 회로 덕분에, 간신히 원초적 공포를 참아낸 박 사무관은 침을 꼴깍 한번 삼킨 뒤 아무렇지 않은 듯 취조용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그런 그의 행동을 쭈욱 지켜보는 '대악마' 를 향해 입을 열었다.


"Potestis intelligere me?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의 말에, 턱에 손을 괴고 있던 '대악마'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한번 크게 뜨더니, 장난기 있는 얼굴로 씩 웃으며 말했다.


"Minimē. (전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에, 잔뜩 긴장했던 박 사무관은 맥이 탁 풀렸다. 최소한 유머를 할 정도의 지능, 그리고 여유가 있다는 건 여러모로 얘기가 쉽게 풀릴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웃는 모습이 좀 무섭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는게 어딘가.


다시한번 침을 삼킨 박 사무관은, 눈 앞의 '대악마'가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최소한 입을 열자마자 목을 부러뜨리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자, 라틴어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이 세계의 차원문이 위치한 영토의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정부 소속 공무원으로,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몇가지 있어 여기에 왔습니다."


그의 말에 '대악마'는 '흠' 소리를 낸 뒤, 다시금 대답했다.


"좋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협조하도록 할게. 애초에 그려러고 온거니. 물어보고 싶다는 것은?"


"먼저, 당신의 소속과 이름은?"


"'키메라' 기사단 소속, 기사단장 에쉬르나."


'기사단장...? 기사단장이면, 꽤 높은거 아닌가? 대체 왜 홀로 아군 진지로 걸어와서 항복 한거지? 그런... 말도 안되는 능력을 가지고 말이야.'


사태 첫 날에 YTN에서 나오던 믿을 수 없는 차원문 주변의 긴박한 카메라 영상들에 대해 생각하며, 박 사무관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항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항복' 이란 단어는 좀 마음에 안드는데... 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제발로 온거라고. 아, 물론 뒤통수 치려는 비겁한 술수 같은건 아니니까 긴장하지는 마. 어차피 난 정면으로 싸우는 스타일이거든."


에쉬르나는 다시금 씩 웃으며 말했다. 박 사무관은 불안해지는 마음을 뒤로 하고 애써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원하는게 있다는 말입니까?"


"아, 물론. 물론. 뭐 별건 아니야. 아, 말하기 전에 내가 배가 좀 고파서 말인데..."


"잠시만요. 저희 국민의 생명에 위해가 갈 수 있는 항목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걸어도 안됩니다."


박 사무관의 다급한 말에, 에쉬르나는 놀란 눈을 하다가 박 사무관의 말을 이해 하고는 책상을 치며 크게 웃었다. 


"풋..... 푸하하핫! 큭큭...."


스테인레스 테이블이 그녀의 갑주 아래에서 살짝 우그러지는 걸 본 박 사무관은 다시,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슬쩍 손을 버튼에 올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비웃음이나 화가 난건 아닌것 같았고, 무슨 연유에선지 정말로 웃겨서 그런 듯 했다.


"아, 진짜 재밌네. 아니, 당신... 날 무슨 신화 속의 재앙신... 뭐 그런걸로 보는거야? 내가 이렇게 말할거라 생각한거야? '제물을 바쳐라~ 맛있는 인간을 내놔라~! 뼈째로 잡아먹을테니 후식으로는 아이를 달라~!' 푸하핫!!" 


목소리를 깔고 아동 영화나 연극에서 나올법한 악당 목소리를 따라한 에쉬르나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뭐, 인간 이라면 내가 조~금 무섭게 보이긴 할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간거 아니야? 진짜 엄청 광신적인 제국 성기사단원이나 믿을 법한 소리네... 푸핫!" 


"...그럼,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 입니까?"


머리속이 복잡해진 박 사무관이 간신히 뱉어낸 질문에, 에쉬르나는 그제서야 웃는걸 간신히 멈추고 대답했다.


"어떤 '존재' 라니? 내가 상당히... 개성 있는 모습이고 잘 싸우기는 하지만, 내가 악신이나 재앙신 같은 범접할 수 없는 그런건 아니라구? 물론, 누군가에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큭큭."


그 외형과는 다르게 상당히 '인간'적인 대답에, 박 사무관은 심장을 옥죄고 있던 압박감이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다. 손짓 하나로 도시 하나를 날리거나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거니까.

...그렇겠지?


"아무튼, 난 배고프니까 뭣 좀 먹고 말하면 안될까? 당신들, 음식 하나는 엄청 맛있던데? 그... 무슨 원판 빵 위에, 고기하고 채소들을 잔뜩 올려서 치즈로 구워낸거. 그거 한 개 먹을 수 있어? 아, 진짜 맛있던데."


그녀의 설명에 박 사무관은 들고 있던 노트북에 무언가를 검색한 뒤, 화면을 돌려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말하는거죠? '피자' 라고 하는 요리입니다." 


그가 노트북 모니터를 돌려 '피자' 사진이 가득한 구글 검색 결과를 보여주자, 에쉬르나는 신기하다는 듯 거대한 몸을 기울여 노트북 모니터를 향해 다가왔고, 박 사무관은 반사적으로 의자를 조금 뒤로 옮겼다.


"오오, 마법 액자? 엄청 선명하네! 우리 사령부에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모니터의 '피자' 대신에 모니터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진 에쉬르나가 신기하다는 듯 액자를 만져보았다.


"아, 잠깐..."


안타깝게도, 보호 필름도 없었던 LG 노트북의 연약한 LED 패널은 날카로운 이세계의 칠흑빛 갑주와 상성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에, 그녀가 한번 모니터를 쓰다듬자 깨진 LED 화면의 선을 따라 무지개빛 줄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빛을 발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그녀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 으음... 비싼건 아니지?"


"아니,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담담하게 말하는 박 사무관은 오히려 그녀의 이런 행동이 고마웠다. 최소한 자신과 얘기를 하고있는 이 압도되는 존재가 전지전능한 대악마는 아닐 확률이 높다는 말이니.


"...피자는 줄거지?"


확실히 전지전능한 대악마는 아닌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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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냥 포기하지 않는거야? 영원한 쾌락이 눈앞에 있는데!"

같은 세계관의 작품임.

맨날 머릿속에 생각하던 세계관이 있어서 아~~ 함 소설 써보고싶다~~ 했는데, 장편을 못 쓰는 조루라 그냥 이렇게 각기 다른 인물들을 짧게짧게 다루는게 더 맞을 것 같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