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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산과 마을의 경계에 있는 작은 초가집은 밤늦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중얼중얼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초가집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거의 뼈대만 남은 상태에 비바람도 겨우 막을 정도로 위태하고 낡아빠진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겉부분에 돌을 쌓고 여기저기 뚫린 곳도 새로 황토와 지푸라기를 발라 보수하여 지금은 그나마 좀 봐 줄만한 모습이 되었다. 


소년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 소녀, 그러니까 산 속 깊은 곳 개울의 신령이 큰 맘 먹고 힘들게 보수한 것이었다. 



인간들은 돌을 봐도 그 겉모양만 겨우 구분할 줄 알지, 돌에도 수돌과 암돌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수돌 위에 수돌을 쌓으면 쉽게 무너지고 암돌 위에 암돌을 쌓으면 돌들이 서로 밀어낸다. 


하지만 수돌 위에 암돌을, 그 위에 수돌을 쌓으면 누군가 일부러 밀거나 걷어차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신령은 암돌과 수돌을 구분할 수 있었기에 그 툭 하고 건드리면 넘어갈 것만 같았던 초가집을 튼튼하게 고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글을 읽는 주인공은 당연히 함께 사는, 공부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 소년이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어 매일 매일 호구지책을 강구하던 소년이 어떻게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등잔과 기름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소년이 글을 읽다 말고 잠시 쉬려는 듯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키더니 중얼거렸다.




"뭐가 말이야?"




등잔불 건너편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신령이 물어보았고, 소년은 웃으며 말했다.




"그 분이 날 제자로 받아주신 거 말이야. 이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을 못 하겠어. 요새는 계속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해."




그 말을 들은 신령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운이 좋긴 좋았지. 나도 이렇게까지 일이 잘 굴러갈 줄은 몰랐거든.


신령은 속으로 생각하며 몇 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때는 또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소년이 서당 옆 길에서 들려오는 글 소리를 읽으며 바닥에 글을 적고 있던 날이었다. 


신령은 집중하고 있는 소년을 놔두고 몰래 서당 근처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담을 넘었다. 


꽤 높은 담이었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그 정도 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었고, 또 모습을 슬쩍 감추고 열린 서당 창문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했다. 



서당 안에서는 나이 지긋해보이는 훈장과 꾸벅꾸벅 졸면서 천천히 쓰러져가는 제자들이 글을 읽고 있었다. 


글 읽는 소리의 8할은 훈장이었고 나머지 2할은 학생들이었으니 서당 안 광경이 얼마나 엉망이었는가는 굳이 더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훈장의 표정이 예술이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말을 온 얼굴로 하고 있었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거의 꿈나라로 떠나기 일보직전인 제자들이 한심한지, 한번은 글을 읽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우루루 빠져나가고 나자 훈장은 가득 쌓인 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또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배움에 대한 욕심도 없는 것들을 어찌 가르치랴. 내가 이러려고 관직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왔나... 에휴..."




훈장은 정리를 하다 말고 더운 날씨 때문에 더욱 성질이 나는지 치우던 책들을 그냥 바닥에 휙 던져 버렸다. 


그 말을 들은 신령의 머릿속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잘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질러 보고 봐야했다.


잘 안 되어봤자 지금 상황에서 더 나빠질 수는 없을 테니까.


마침 밖에서는 소년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숙제를 대신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책들을 한아름 떠안고 서 있었다.



신령은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를 훈장의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더운 날씨와 끔찍하게 들러붙어오는 습기가 곧 위력을 발휘했다. 


창문을 열어 놨는데도 방 안이 심하게 덥고 습해지자, 훈장은 안 그래도 제자들 때문에 났던 마음 속 열불이 더욱 타오르는지 성질이 난 얼굴로 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나왔다가 서당 옆 길이 시끌시끌한 것을 보고 대문을 나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려다가, 제자들이 소년에게 숙제를 떠맡기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훈장의 얼굴은 도깨비마냥 울그락푸르락 해졌고, 제자들은 훈장의 얼굴을 보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버렸다.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나자 그들의 책을 들고 뻘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불쌍한 소년이 훈장의 눈에 들어왔다. 


훈장은 처음엔 숙제를 대신 해 준 놈이 이 녀석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는지 소년도 화난 얼굴로 노려보았지만, 소년의 앳된 얼굴과 낡고 더러운 복장이 눈에 들어오자 표정을 약간 풀었다.




"그놈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었다. 그런데 너같이 어린 아이일 줄은 몰랐는데."




훈장은 여전히 엉거주춤하게 서서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는 소년을 흥미롭다는 듯 살펴보다가, 소년이 바닥에 끄적거려놓은 한자들을 보고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네가 적은 거냐? 이건 오늘 읽은 내용이구나. 안쪽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따라 적은 게냐?"




소년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가 혼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겨우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훈장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마치 낡은 장신구 상자를 뒤져보다가 예상치 못한 비싼 패물이라도 찾아낸 듯한 얼굴이었다. 




"너, 글 배워 볼 생각 없느냐?"




그 이후로 소년의 생활은 훨씬 편해졌다. 


전처럼 힘든 일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도록 훈장이 돈과 먹을 것을 어느 정도 대 주기 시작한 것이다. 


어두운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낡은 등잔과 기름을 받은 건 덤이었다. 


게다가 책과 종이, 붓까지 새로 받고, 그토록 하고 싶어하던 공부를 밤낮 안 가리고 계속해서 할 수 있으니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아예 일에서 손을 떼고 글공부만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며칠에 한번씩은 마을 일을 도와야 했지만, 예전보다는 사정이 훨씬 더 나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저기 있잖아. 그거 알아? 널 만난 이후로 갑자기 인생이 행복해진 느낌이야." 




소년의 말에 신령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했지만 적절한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또 버벅거리고 있는 신령에게 소년은 웃으며 다가갔고, 신령은 갑작스러운 소년의 행동에 들고 있던 바느질감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때 소년의 눈에 그녀의 손에 난 빨간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바느질을 배우다가 다친 흔적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손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여기저기 거칠어져 있었고, 굳은살도 살짝 박혀 있었다.


소년이 글을 배우는 동안 신령은 삯바느질을 하거나 마을 일을 도와주며 집안 형편에 내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그녀에게 너무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정말 고마워. 그런데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난 너한테 정말...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네 행복한 모습이 내겐 가장 큰 선물이니까. 

신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소년이 그녀의 상처 난 손을 잡았다. 

신령은 머릿속이 순간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샌 배워본 적 없던 바느질을 배우며 손을 다친 것도, 고된 마을 일을 하느라 힘들었던 것도 전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좋아."




신령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몸에 힘이 빠져 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소년의 얼굴도 신령의 것처럼 빨개졌다. 

예쁘장한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남자아이도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나도, 나도 네가 좋아..."




둘은 한참동안 손을 잡은 채로, 눈을 마주친 채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르던 간에, 영원히 그러고 있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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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듣고 있어?"



"응, 당연히 듣고 있고 말고."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난 이즈음에서 언니가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신령은 호랑이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로 호랑이의 밑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대며 칭얼거렸다. 




"그야 네가... 엄청 행복했을 거란 건 알 수 있으니까? 게다가 네 사생활까지 전부 그렇게 깊이 파고들고 싶진 않걸랑."



"뭐야 그게에..."




신령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다가 그만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저런, 많이 피곤했나보다. 업어서 집에 데려다 놔야겠네.



호랑이는 신령의 예쁜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넘겨주며 생각했다. 

신령 녀석이 마을에 내려간 이후, 개울은 이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해졌다. 녀석이 직접 관리를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신령의 감정과 기분은 개울의 상태와 연계된다. 

따라서 그녀가 마을에 내려가 있는 내내, 소년과 함께하는 내내 행복하고 즐거웠을 것임은 그녀를 직접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고생이란 걸 모르던 신령의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상처가 난 건 안타까웠지만, 그 덕분에 신령의 순진무구하고 어리기만 하던 얼굴이 아주 약간은 어른스러워진 느낌이었다. 

행복과 고생은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배운 덕분이리라. 



그러나 재난도 행복과 함께 찾아오기 마련이지. 

정확히는 행복의 한 가운데에 갑자기 재난이 그 흉측한 고개를 들이밀고 사악하게 웃어대는 꼴이지만.



호랑이의 머릿속에 갑자기 그런 불길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이 아이는 나와는 다를 거야. 



호랑이는 고이 잠든 신령을 조심스레 들어올려 등에 업고 생각했다.

그녀는 신령을 데리고 조심스레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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