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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하늘과 같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의 볼을 간질인다.

원래라면 이맘때 쯤 한창 곡식의 수확이 한창일 남서쪽의 곡창지대.

황금빛 논밭이 휘황찬란하게 방문객들을 맞이해주던 이 마을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잿빛으로 죽어버린 토양만이 방문객을 반길 뿐이었다.



까악ㅡ 까악ㅡ



"재수가 없으려니까."



참새가 지저귀는 숲속과 달리, 이곳에서는 까마귀들이 불길함을 읊조리고 있었다.

시원한 산들바람을 타고 미세하게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강현성의 코를 간질였다.

하물며 하늘의 색감도 걸음을 이어나갈수록 점점 황폐화되어버린 잿빛의 광야와 같이 구름인지 안개인지로 인해 회색빛으로 얼룩지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는 혹시라도 남서쪽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가 있다면 그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 아닌지...



"존나 무겁군..."



현성이 허리에 묶어놓은 밧줄과 연결된 거대한 가죽 자루의 안에서 쇳덩이가 부딪히는 불쾌한 소음이 그가 걸을 때마다 귓가에 거슬리게 울려왔다. 그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무너져내린 대장간에서 온갖 쇠붙이들을 챙겨왔기에 이 자루의 무게는 어림잡아도 몇백 kg은 우습게 넘을 것이다.


드드드득ㅡ 드드득ㅡ


가죽이 돌바닥에 질질 끌리며 언제라도 자루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를 내고 있다.

전력을 다하면 이 정도의 금속을 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무의미하게 에너지를 낭비했다간 언제 갑작스레 벌어질 전투가 두려웠기에 현성은 적당하게 힘을 주어 자루를 힘겹게 끌어가고 있었다.



"...너무....많이....가져왔나...."



처음부터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바퀴가 달린 녹슨 수레에 자루를 얹고, 그 수레를 조종하여 아주 '쾌적'한 모험길을 떠나왔었지만 인생이 그렇듯 얼마 가지않아 수레의 바퀴가 자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아버렸다.



".....씨발...좀 버릴까."



그리하여 이제 와서는 소중한 무기를 버리고 가야 하는지 고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대략 1000자 동안 쓸데없는 서론이 길었던 것 같은데, 서서히 하늘의 색이 변해가고 있었다.

드넓은 광야의 논밭과 하늘이 잿빛이 된 순간부터 까마귀들의 '지랄'이 중구난방에서 울려퍼졌었으나 무거운 자루에 정신이 팔린 채 계속 걸어나갔더니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

그리고....



'....감성있군. 땅 주인이 제법 낭만을 아는 것 같아.'




시간상 분명 대낮인 오후 1시.

그러나 현재 현성의 머리 위에는 피처럼 붉은 커다란 달이 떠 있었다.

보통 갑작스런 주변 환경의 변화에는 경각심을 갖기 마련, 그것도 이렇게나 시각적으로 위협적인 환경으로의 변화를 맞이한 인간은 심박수가 빨라지거나 심하면 패닉에 이를 수도 있는데, 확실히 신의 권능을 받았다는 것을 자각한 용사의 정신력은 그러한 두려움도 이겨내는 듯 싶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건가.."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보라색 나무 줄기를 타고 새빨간 과일이 열려있었다.

그 과일의 중심부는 마치 부릅뜬 눈동자처럼 생겨 있어, 현성을 노려보는 것 같이 보였으나 '쓸데없이 묵직한 가죽 자루' 안에 가득한 현성의 자신감의 '근거'들이 있기에,

현성은 그 불쾌한 과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보거나 나무를 발로 차 매복하고 있는 마물인지 확인까지 할 여유가 있었다.



푸드득ㅡ



".....으...박쥐...공수병 걸린다. 저리 가."



눈이 하나뿐인 박쥐가 신기한 생물체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현성을 바라보며 뒤틀린 나무 위에 앉아 기이한 광경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현성은 혹여나 광견병이라도 걸릴지 모를 야생동물의 위험을 잘 알기에, 그것을 향해 검을 설렁설렁 휘둘러 내쫓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 박쥐의 눈이 어째서 하나뿐인지, 그는 미처 거기까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



모험의 서, 지식의 신 에스가 읽어서는 안 될 금서중 하나로 분류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세계관에 있어서 남서쪽의 영주는 현명함의 극치였다.

마물들의 공습에도 자신의 영지에 있는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사병을 모조리 투입했고, 그 결과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한 채 마물에게 산채로 몸을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그 마물은...지금도 남서쪽의 대저택에서 인간들을 사냥하여 산채로 피와 정기를 갈취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번엔 꽤나 먹음직스러운 아이네...♡ 빨리 이곳까지 와주련...♡"



새하얀 머릿결과 새하얀 피부, 그러나 그에 대비되는 새빨간 두 개의 눈은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말하는 듯하였다.



"저 자루에는 뭘 그렇게나 가득 채웠을까나.... 외눈박쥐 하나 못 잡아 자루에서 무기를 꺼내 허우적거리는 꼴이라니... 귀여우면서도...괴롭히기 딱 좋게 생겼네..♡"



백발홍안의 여인은 고급스러운 금빛 장식으로 치장된 의석에서 일어나 앞에 놓인 붉은 액체로 3분의 1가량 채워진 와인잔을 들고 사뿐사뿐 맨발로 드넓은 저택을 노닌다.

가녀리지만 얇지 않은 적당한 두께의 팔과 다리, 볼륨감 있는 가슴과 굴곡진 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엉덩이 라인은 서큐버스 못지않게 매력적인 성적 어필을 하는데에 충분해 보이는 몸매였다.



"~~~"



여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 춤을 추듯 저택 내의 방 문 하나를 열더니, 안을 향해 두 팔 벌려 다정하게 말했다.



"아아...정말 좋은 날이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친구들이라도 있는 걸까?

여인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방 안에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들어가 자신이 인사한 다음 다가가 다시금 상냥하게 물어왔다.



"있지~ 나 조금 외로웠단다. 그동안 너희가 내 말을 잘 안 들어주는 바람에 다들 이렇게 되어버렸잖니?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아무런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여인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 뒤면...너희의 새로운 친구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방 안의 남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다들 어째서인지 의자에 앉아서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숨을 쉴 뿐이었다.



"새로운 친구가 생기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란 말이지...♡...후훗....♡"



여인의 눈이 반쯤 감겨 초승달처럼 휘어져 약간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듣는이로 하여금 달콤한 ASMR의 향연이었지만, 그럼에도 방 안의 남성들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 다들 너무한 거 아니니? 내가 이렇게나 기쁜데 아무도 내게 호응을 해주지 않는다니...눈과 혀, 온몸의 힘줄을 끊어놓은 것 때문이려나? 너무 나약하구나 정말. 인간이란.."



여인의 말대로였다.

남성들은 이 흡혈귀의 저택에 각자의 이유로 발을 들인 대가로, 그녀의 '친구'가 되어버렸다.

처음엔 강압적으로 피와 정기를 착취당할 뿐이었지만 계속해서 도망가려하자 처음엔 발목의 힘줄을, 팔로 기어서 도망가자 팔의 힘줄을, 자신을 노려보는 눈이 마음에 안 든다며 두 눈을, 자신을 모욕하는 입이 가증스럽다며 혀를 잘라내었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남성들의 몸에 강제로 자신의 피를 두 방울 씩 섞어넣었다.

그 결과, 이 자들은 죽지도 못한 채 최소한의 영양분으로 시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어두컴컴한 방 안 의자에 묶인 채 하루에 두 번씩 백발홍안의 흡혈귀 여인에게 피와 정을 강제로 빼앗기는 삶을......말이다.



"새로운 친구....빨리 만나고 싶어라...♡"



여인은 씨익 웃으며 방 문을 닫고 저택의 복도 창가에 기대어 붉은 달이 떠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행복감에 몸을 떨었다.



.....



'....뱀파이어라면 십자가 모양으로 조각해서 가져가야 하나..'



한편, 현성은 잠시 쉴 겸 외눈박쥐를 쫓아낸 후 자루 안의 온갖 냉병기를 바라보며 쓰잘데기없는 생각에 잠겼다.



'.....칼로 찌르면 죽겠지 뭐...'



곧이어 귀찮은 듯 가죽 자루에 몸을 기대어 바닥에 드러눕는 현성.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새빨간 달과 붉은 안개가 낀 듯 자욱한 하늘은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아서 묘하게 기분나쁜 소름이 느껴져온다.



".....거 정말 마음에 안 드는 하늘이군.."



현성이 처음 이 하늘을 보고 낭만있다고 말한 뒤로 겨우 10분.

이 소름끼치는 하늘은 단 10분만에 그의 예술감각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ㅡㅡㅡㅡㅡ



항상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