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 원래라면 연인인 H와 함께 걸었을 길을 나는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유는 나와 H간의 의견차로 인한 냉전. 이미 알고 있다시피 H는 내가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싸움이다.


 어떻게 해야 H의 이상성욕을 포기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걸어가고 있을 때.


 “야호오!”


 하늘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것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기 위해 두 팔을 앞으로 내미는 척하다가 붉은 것과의 거리가 3m 정도 되자 슬쩍 뒤로 물러났다. 내 팔에 안착하지 못한 붉은 것은 사뿐히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팟!”


 붉은 것.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 팔에 난 붉은 날개 그리고 무릎 아래가 새의 다리를 닮은 적익족. 나의 친구 R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안 받아 줄 거면 처음부터 받는 자세를 취하지 말지. 왜 괜히 받는 자세를 취하고 지랄이야!”


 입이 걸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다. 서로 욕을 해도 웃어넘길 정도로 친한 사이다.


 “갑자기 무거운 것을 받으면 허리 나가니까. 안전사고는 기본적인 것을 지키지 않으면 일어나는 법이잖냐.”


 “네가 내 몸무게를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무겁다느니 가볍다느니 막말을 해?”


 R은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달려들어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허리를 다리로 조이며 매달렸다. 유달리 커다란 살덩이 두 개가 내 가슴을 압박했다.


 “이래도 무겁냐? 이래도 무거워?”


 R은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종족답게 몸무게는 훨씬 가벼웠다. 하지만 가볍다는 것도 나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이었고 더군다나 부피가 있다 보니 R이 매달리자 나는 비틀거렸다.


 “야 임마. 남들 눈 있는데서 무슨 추태야! 떨어져!”


 나는 R을 떨어트리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R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이이이이이이하아아아아!”


 서부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가 로데오를 할 때 내는 소리를 내며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결국. 철퍼덕 하고 나는 R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내가 밑에 깔리고 R이 그 위에 깔고 앉은 모습으로.


 “후우. 간신히 길들였다. 이번 짐승은 꽤나 난폭했어.”


 땀을 닦는 시늉을 하는 R.


 “임마. 잘못 넘어져서 네가 다칠까봐 일부러 바닥에 깔려준 거다. 비켜.”


 R에게 깔린 채 툴툴 거리는 나.


 R은 낄낄 웃으며 내 위에서 비켜주었다. 나는 일어선 뒤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뭐 나와 R은 대충 이런 장난을 일상적으로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다는 증거로 봐줬으면 좋겠다.


 내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R이 말했다.


 “저기. 저기. 저기. 그 소식 들었어?”


 오늘따라 R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원래 평소에도 활기찬 녀석이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뭐?”


 R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I랑 H랑 헤어졌데.”


 “허어. 그것 참 신기하네. 내가 I인데. 처음 듣는 소식이네.”


 “쯧! 쯧! 그렇게 세상물정이 어두워서야. 어디 제대로 취업하겠어?”


 나는 R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안 헤어졌다는 의미다, 이 자식아!”


 나의 말에 R은 청천벽력을 들은 것 마냥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뭐? 안 헤어져?”


 “안 헤어졌어! 그냥 좀 싸웠을 뿐이지.”


 “날 가지고 논 거야?”


 “가지고 놀긴 뭘 가지고 놀아! 그리고 의견 차이로 인해서 서로 머리 식히려고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 뿐 인데. 그것만 가지고 헤어졌다고 확대해석한 거냐? 너 설마 이거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냐?”


 R은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이런 기쁜 소식은 너랑 제일 먼저 나누고 싶어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지! 우리의 우정을 생각하라고 친우여!”


 “지금의 대화 때문에 나 너와의 우정에 회의감이 좀 많이 든다.”


 R은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유명한 모병포스터를 따라하는 게 명확한 모습이었다.


 “I want you for solo regiment!”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R은 역정을 냈다.


 “네가 H와 헤어지면 우울해 하겠지.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우울하고 약해진 너는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일 테고. 그런 너에게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여자인 친구가 다가가면. 예를 들어서 나같은 여자 말이야! 너는 그 여자인 친구에게 저절로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야.”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착각하지 않았다. 애정보다는 우정의 우선순위가 월등하게 높은 사이이다 보니 착각할 수가 없었다.


 “너는 여자인 친구를 술집으로 데려가 울면서 한탄을 하고 여자인 친구는 너에게 술을 얻어먹으면서 너의 한탄을 들어주는 거지! 자! 얼마든지 너의 한탄을 들어줄테니 술을 사 달라!”


 그러면 그렇지. 남자와 여자사이엔 우정이 있을 수 없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녀석을 보면 그 주장이 틀렸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어지간한 동성 친구보다 더 격식이 없으니.


 “안 헤어졌어. 안 헤어질 거야. 그리고 보통은 그런 일이 있으면 네 쪽에서 위로주를 사주는게 정상 아니냐!”


 “무슨 소리! 상담사가 상담을 할 때 환자에게 돈을 주든? 환자가 상담사에게 돈을 주는 거지!”


 ……그럴싸한 논리네? 이 녀석 괜히 잔머리만 좋아가지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화를 끊었다.


 “야야. 헛소리는 여기서 끝내자. 어쨌든 헤어진 것은 아니라서 술 사주지는 못하겠고 더치페이로 술이나 마시자. 오늘 술 마시고 싶은 기분이니까.”


 “우오오오오오옷! 가즈아아아아아!”


 술 먹자고 하니 너무 좋아한다. 술 마실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구나. 이 녀석 술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고 죽어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네.

 


 

 1차 치킨집에서 대충 배를 채우고 난 다음에 2차로 온 실내 포차집. 소주와 맥주, 대합탕과 염통볶음을 시키고 나와 R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정말로 뭐 때문에 싸운거야?”


 불콰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R은 나와 H가 싸운 이유를 물었다. 나는 술김에 한탄을 섞어서 진실을 말할 뻔 했으나 참았다. 평소 R이 보여주는 언행이 심하게 가벼워 보이긴 해도 남의 험담이나 비밀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나와 H의 문제는 지나치게 이상성욕적이었으니까. 아. 나와 H가 이상성욕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당면한 문제는 도를 넘었다.


 “아니. 뭐. 그냥 좀 그런 게 있어서.”


 그래서 나는 얼버무렸다.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문제 이길래 나한테도 비밀로 하는 거야?”


 “그냥 넘어가주라. 다른 사람이 알아봤자 좋을 게 없는 문제라서 그런 거니까.”


 R은 소맥을 섞으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말했다.


 “너 설마 뒤로 하고 싶다고 했어?”


 “핫뜨거!”


 대합탕 국물을 떠 마시다가 흘리고 말았다.


 “진짜? 그거 잘못하면 병 걸린다?”


 “아니야, 임마!”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부인했다. 너무 큰 소리로 외쳐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힌다. 나는 고개를 숙여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바지에 흘린 국물을 티슈로 닦았다.


 R은 소맥을 마신 후에 말했다.


 “아니지. 너 없으면 죽어 못 사는 H를 생각하면 고작 그걸로 싸울 일은 없겠지. 더 심한 짓도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 그러면 H의 문제인가?”


 이대로 계속 두면 소거법으로 진실에 도달할 것 같았다. 참고로 뒤……아니. 사족이다. 무시해라.


 “야. 제발. 그냥 술만 마시며 다른 이야기 하자. 응?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거리낌 없이 부탁 할 테니까. 진짜로 남한테 할 말이 아니라서 그래.”


 내가 애원하자 R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도끼눈을 뜨는 것을 보면 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게 불만인가 보다. 그렇게 잠시 어색하게 술과 안주를 먹고 있을 때.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R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탁자 밑으로 내 정강이를 툭툭 찼다. 아프지는 않았다. 새의 발을 닮은 R의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있었고 이는 자칫하면 큰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에 R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겠지.


 “야.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치. 사. 해.”


 R은 볼을 잔뜩 부풀렸다. 몸은 누가 보더라도 어른이고 술을 마셔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성인이지만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행동해도 어울리는 게 내 친구 R이었다. 


 “치사해. 내가 H보다 더 오랫동안 너 알고 지냈는데. 치사해. 나한테도 비밀로 하고.”


 “야. 친구사이에도 비밀이 있을 수 있지. 그리고 너 취한 거 같다. 그만 마셔.”


 “취해? 내가? 너 나랑 술 한 두 번 마셔? 내가 고작 이걸로 취할 거 같아?”


 심통을 부린다. 계속 나와 H 사이의 문제를 비밀로 하는 게 섭섭한가보다. 하지만 정말로 남한테 말할 수 없는 문제인 걸 어떻게 하냐고.


 R은 단숨에 소맥을 비웠다. 그리고 빈 컵에 소주를 채우기 시작했다.


 “어? 야.”


 소주잔이 아닌 소맥용 컵에 소주가 가득 차자 R은 순식간에 그것을 비워버렸다.


 “미쳤어, 너?”


 나는 재빨리 R의 컵을 뺐었다. 그러나 이미 소주를 다 마신 후였다.


 “끄윽! 이 정도는 마셔야 취하겠구나 라고 말할 수 있지.”


 “급성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지고 싶냐? 자. 여기 물.”


 나는 물잔에 물을 채운 후에 R의 입에 갖다 대었다. R은 잘 받아 마시는 듯하다가 “브웨에에.”소리를 내며 물을 내뿜었다. 넘친 물이 R의 커다란 가슴 위로 떨어져 옷을 적셨다.


 환장하겠다. 정말.


 나는 티슈를 뽑아 물을 닦……아니. R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운이 나쁘게도 몇 장 올리지도 않았는데 티슈가 다 떨어졌다. 나는 점원에게 티슈를 리필 해달라고 달려갔다. 그리고 내가 티슈 뭉치를 받아서 돌아왔을 때에는.


 “브어어어어어어.”


 새로 딴 빈 소주병과 혼이 나간 R이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하하하하. 진짜. 어른애야. 어른애. 자기가 원하는 데로 안 해준다고 술 마시고 뻗어버리는 주정을 부리는 것을 보면.


 어휴 씨. 얘를 어쩌냐.


 

 

 “우웨에에에에에에엑!”


 어쩌긴 뭘 어째. 내 자취방에 데려왔지. 어찌 되었건 R도 여자니까 그런 애를 함부로 버리고 방치할 수야 없지. 그리고 이런 일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내가 H랑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뜸해지기는 했지만 조금 먼 곳에서 자취를 하는 R이 술에 너무 취해서 집에 돌아가기 힘들 때에는 자주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노파심에 밝히지만 진짜 잠만 자고 갔다. 아니 고백하자면 밥도 먹었다. 진짜로 그 뿐이다. 불건전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다시 말해서 강조하지만. 나는 문란한 생활을 해서 부모님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에엑!”


 그리고 R은 지금 변기를 끌어안고 아까운 술을 다시 게워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R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으이구. 멍청아. 멍청아. 이렇게 될 걸 알면서 그렇게 무식하게 술을 마시냐.”


 “내. 내가 우웨에에에에에에엑!”


 “변명은 다 토하고 난 다음에 해.”


 R은 한참을.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을 때까지 토하고 난 후에 간신히 세수와 양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R은 내가 미리 깔아 둔 이불에 자빠져서 신음소리를 냈다.


 “멍청이.”


 “반사.”


 “아직 진이 덜 빠졌나보네. 더 토해라, 너.”


 “하라고 하면 내가 못할 줄 알고? 해 버린다! 나! 한다면 하는 여자야! 진짜 이불 위에 해버린다!”


 나는 R이 잠옷으로 입을 만한 옷을 R에게 던져줬다.


 “갈아입고 얼른 자.”


 R은 몸을 일으키고 내가 던져 준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날개가 달린 팔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외쳤다.


 “나 자고 있을 때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지! 야동처럼!”


 “너 그냥 집에 가라.”


 이런 식으로 농담을 주고받고 우리는 낄낄 웃었다. 성적인 농담도 진짜 농담으로 끝나는 게 나와 R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R의 뒤처리를 하고 세수와 양치를 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 화장실에 나왔을 때에 R은 조용히 자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R의 몸을 보고 정욕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R은 커다란 가슴과 발달한 골반으로 이성을 유혹하기에 최적화된 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 보고 달려드는 것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적잖은 짐승들도 상대의 의사를 존중한다.


 그리고 나는 R에 대해서는 성애보다는 우애의 우선순위가 훨씬 높았다. 고작 성욕 때문에 R과의 우애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연인이 있다. 연인을 두고 다른 여자와 성교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비록 나의 연인이 그것을 원하더라도! 음마이지만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아들인 내가 문란한 생활을 해버린다면 어머니께서 평생 고통받으시면서 관철해온 생활에 흠이 갈 게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일부러 R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펼쳐둔 이부자리에 들어갔다. 술을 마신 덕분인지 나는 오래지 않아 잠이 들 수 있었다.






(여사친 R 그림 by 이코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