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용사는 뭔가요?”

 

마리나의 대담한 질문에 카토는 쓴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종종 이런식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툭 던짐으로써 뭇 스승과 동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그러나 그녀의 질문은 항상 그녀가 얘기하고자 하는 화두의 주제를 관통하는 것이라 섣부르게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토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용사란 주신님의 힘을 받는 인류의 첨병이라네.”

 

그 말에 마리나는 다시 물었다.

 

무엇을 향한 첨병입니까?”

 

그야 주신님의 적이 아니겠는가.”

 

“...”

 

카토의 시원스러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마리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스승님.”

 

한참을 지난 후에야 마리나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용사들은 마물보다 인간과 더 많이 싸우는 것입니까인간이 주신님의 적입니까?”

 

인간중에도 주신님의 적 된 사람이 분명히 있다네생각해보게 마리나주신님의 신앙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이들이 첫 번째 주신님의 적이네주신님을 모욕하는 이는 타락한 이밖에 없을 터타락한 이가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또한 전쟁을 좋아하고 파괴를 일삼는 무리도 주신님의 적이네주신님은 항상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 않는가주신님의 가르침을 반대로 수행하는 자들은 또한 주신님의 적이라네.”

 

“..그렇지요그들은 주신님의 적이지요하지만 스승님.. 저는 스승님이 말씀하신 그런 간악한 무리보다 레스카티에의 적들과 싸운 경험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마리나가 뚝뚝 뱉어내는 그 말에 카토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는 마음속으로 깊이 한탄했다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스카티에가 주신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국가가 아니겠나본디 용사들은 마물과 이단을 향해 검을 뽑아야 하거늘.. 작금의 교단과 국가들은 용사들을 아주 날렵한 정예병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니 분쟁이 멈출 리가 없네..”

 

카토는 크게 혀를 차고는 마리나와 눈을 맞췄다.

 

마리나의 푸른 눈에선 울곧은 신념이 느껴졌다그러나 흔들리는 불꽃처럼 갈피를 못 잡는 그 신념을 카토는 느낄 수 있었다

 

ㅡ어찌하여 주신님은 우리에게 신념을 내려주시고그것을 확신할 지혜를 주시지 않았는가..

 

카토는 그 모습에 깊게 한탄했다그가 봐온 수많은 용사들이 마리나처럼 흔들림을 느끼다가 엇나가버렸기 때문에흔들림을 이겨내고 굳건하게 선 용사는 교단을 이끌 미래라는 칭송을 받던 그의 모든 제자들 중에서도 소수였으니까

 

스승님어제 성기사단 입단식에서 엘트를 만났습니다.”

 

카토는 엘트라는 이름을 듣자 그녀의 모든 고민도방황도 이해되기 시작했다그녀가 사랑하던 청년그녀의 힘이 약해 놓쳐버린 첫사랑그녀가 용사가 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존재이자 그녀가 용사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 그 청년..

 

카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나가 말을 이었다.

 

못 본 사이에 인상이 달라졌지만여전히 엘트는 강한의지와 상냥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나서 너무나도.. 미친 듯이 반가웠습니다그렇지만.. 그렇지만..!”

 

카토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그의 제자를 착잡하게 바라봤다.

 

나아가지 못했나따뜻한 포옹과 사랑스러운 키스아니하다못해 격려의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나?”

 

.. 스승님의 말씀대로한 마디 말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했습니다저는 제가 완전한 용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그런데나아가지도 못하고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했습니다저는.. 전 그저.. 바보처럼..”

 

마리나.”

 

스승님전 용사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이제 어쩌면 좋을까요제가 뭘..”

 

마리나!”

 

카토의 불호령에 마리나는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소리를 참아가며 울었다

 

마리나내 말을 잘 듣게.”

 

카토의 목소리는 애정이 들어있었지만 차갑고 냉철했다.

 

용사는 그저 주신님의 힘을 받는 개인일 뿐이네그렇기에 용사가 되었다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랑과 욕구를 버리라는 뜻은 아니네그런게 가능했다면 모든 용사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네자네는 어찌하여 용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청년과의 사랑을 포기하고본인이 용사임을 스스로 의심하는가어찌하여 스스로 노스크림가에서 만든 새장 안으로 기어들어가 있냐는 말이야주신님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한 자네는 용사네!”

 

..끄윽....”

 

소리조차 참아가며 오열하는 마리나를 보는 카토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그러나 그는 말을이었다.

 

자네가 원하면 잡게그거면 충분하네.”

 

마리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카토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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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오늘 노스크림님과 무슨 말씀을 그렇게 길게 하신거에요?”

 

티토가 그 특유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카토에게 물었다

 

글쎄다연애이야기?”

 

카토 또한 마리나 앞에서 보여주지 않던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카토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 모습에 기겁할 것이다

 

그 소문이라면 저도 들었어요노스크림님께서 평민을 사랑하신다던데요그 이야기를 하셨나요?”

 

그 말에 카토가 살짝 당황했다.

 

ㅡ아는 사람은 분명 소수일텐데.. 노스크림가에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풀었나

 

그래그렇다면우리 손녀가 잘 못 알고 있구나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럼요그럴 줄 알았어요노스크림같은 명문가에서 평민을 어떻게 사랑하겠어요?”

 

그런 말들이 마리나를 힘들게 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카토는 씁쓸함을 감추려 노력했다그때 티토가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맞다할아버지할아버지께서 노스크림님과 대화하고 계실 때 편지가 도착했어요.”

 

그리고 그 편지를 카토에게 건네주었다.

 

아주 고풍스러운 편지였다이런 편지를 카토에게 보낼 이는 한 명 뿐카토는 편지를 뜯어 조용히 읽었다.

 

왕족들 특유의 어렵고 상투적인 인사말들이 나열된 것과는 별개로 핵심 내용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마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조심하십시오만약 상황이 심각해지면 티토님의 딸을 우리 브리탄에서 기르겠습니다.]

 

카토는 그 편지를 힘껏 구긴 후 그것을 태웠다그러자 깜짝 놀란 티토가 황급히 그를 말리려 달려들었다.

 

할아버지편지를 태우시면..”

 

괜찮다별 내용 아니니.”

 

그 말과는 다르게 카토의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ㅡ레스카티에 몰락 65시간 전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