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라는 좁은 생태계에서 용과 인간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용은 지구 상에서 따라올 자가 없이 강했으나,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하며 그 격차는 좁혀졌다.


처음에는 나라 하나가 달려들어야 용 하나와 거의 맞먹을까 말까였지만, 이제는 작은 폭탄 하나가 용을 죽이고도 충분히 남는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두고 보았다간 인간에게 멸종당하리라 생각한 용들은 전쟁을 일으켰고, 많은 용이 죽었으나, 그보다 많은 인간이 죽었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이 죽으면 두 명이 복수를 위해 찾아왔고, 둘을 죽이면 열이 찾아왔다. 인간 수천명이 죽으면 용이 한 마리씩 죽었으나, 인간은 수십억이나 있었다.




결국 전쟁 전에 비해서 반도 남지 않은 수가 남은 뒤에야, 용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을 주장한 원로는 모두 죽었고, 미래를 이어갔어야 할 어린 용들마저 죽었다. 용은 자신들의 명맥이 이어질지도 불투명한 상황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야말로, 그 때 인간이 마음만 먹었다면 용이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그러나,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한 동물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듯 용들을 보호해야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는 용을 보호하여 자신들 나라의 국력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용의 미래를 걱정해준 이들도 있었다.



그런 몇 안 되는 이들의 자비 덕분에, 용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피소니르는 그렇게 살아남은 젊은 용 중 한 명이었다.


인간들은 용과 인간 사이에 전쟁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전쟁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용이 죽었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녀 또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원로의 명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피소니르의 역할은 인간과 용 사이의 평화를 주재하는 특사였다.


용이 다시금 전쟁에 휘말렸다간 정말로 멸종해버릴 수 있기에, 용의 중립적인 자리를 지키는 대가로 인류 전체에 이득이 되는 공헌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재해가 덮친 지역에서 건물을 파헤치며 생존자를 찾는 일이기도 했고, 기아가 속출하는 지역에 용의 재보를 풀어 식량과 식수를 공급하거나, 환경오염과 자원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우주개발에 용의 지혜를 보태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인간을 입양하기도 하였는데, 피소니르가 활동을 하며 마주친 부모 잃은 아이들 중 처지가 딱한 아이들을 자신이 직접 입양하다보니, 그 수가 너무나 많아져 동족에게서는 고아원이냐는 비아냥을 듣기까지 했다.


심지어 가끔은 그녀도 집에 돌아오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어린아이였던 자식이 부쩍 커있는 걸 보면 놀라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부쩍 큰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고, 어느새 집에서 독립하고, 어느새 결혼해서 자식을 가지더니, 어느새 죽어버린다.


피소니르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마주한 고아를 거두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집에는 항상 다섯 명 정도의 자식이 머무르곤 했다.




그 날은 피소니르가 한 달에 한 번 있는 자신의 휴일을 맞아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엘리샤, 사마르, 리자, 마르파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못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즐겁게 듣고, 아이들을 침대에서 재워준 뒤, 피소니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피소니르의 방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창문이 있었는데, 이는 피소니르가 날아서 들어올 때 간혹 쓰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피소니르는 그 창문 앞에 앉아,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보았다.



누군가가 옆에서 보았다면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을 것이다. 박애주의자로 알려진 용의 특사는 그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하였고, 그런 그녀가 유달리 슬픈 눈으로 달을 올려다보는 모습은 개체로써 훨씬 강력한 용에게 감히 동정심을 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달을 보고 슬픈 기억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피소니르가 눈을 감고 용의 본성에 집중함에 따라, 다른 용이 피소니르에게 말을 걸었다.



[피소니르, 마지막 불의 숨결이여.]



그 목소리는 피소니르의 집에 울려퍼지진 않았으나, 피소니르의 의식 속에서 근엄하게 들려왔다.


피소니르는 목소리의 주인 앞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원로를 뵙습니다."



그녀는 태초를 목격하였고, 신에 가장 가까우며, 영겁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존재이자,


점점 강해지는 인간을 증오하였고, 인간과의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그 끝에 죽었다고 알려진,


원로였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름 용의 대표자로 취급되는 피소니르조차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허락받을 수 없었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벌써 10년이 지났더냐?]


"그렇습니다."


[이곳에서는 해가 바뀌는 것을 알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간 별일 없었느냐?]


"원로의 은혜 덕에 무탈합니다."



원로는 피소니르의 예의바른 대답에 흡족해하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인간은 요즘에 어떻지?]



피소니르는 그 자리에서 원로에게 자신이 아는 사실을 고했다.




인간이 승리한 뒤로, 지구는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작은 공간에서 서로를 적대하며, 이미 지구를 자신들과 함께 공멸시킬 정도의 무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돈을 위해서 수천년간 내려져온 숲과 유적을 파괴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어딘가에서는 남은 음식을 버리는 동시에 어딘가에선 사람이 굶어죽어간다.


자원을 두고 나라는 서로를 경계하며 싸움을 벌이고, 자신과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고 죽이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든 과정 끝에 이들은 지구를 너무나 망쳐버렸다.


몇 개의 나라가 물에 잠겨 사라졌고, 1년 내내 타오른 산불과 태풍으로 숲과 초원이 사라졌으며, 지구의 끝과 끝에 존재하던 얼어붙은 땅은 그곳에 살던 수많은 생명과 함께 사라졌다. 때때로 예고없이 불어오는 유독한 안개와 폭풍은 식물과 가축마저 죽여버려, 밭과 농장은 이제 모두 건물 안에 존재하는 시설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되돌릴 방법을 찾지 못하자, 인간은 우주로 나가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야한다며 우주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런 성과도 없으며, 이에 매달리는 연구자들조차 자신들이 성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특이한 사항은 없습니다."



그 모든 말을 피소니르는 한 마디로 전하였다.



[예상한 것과 다르진 않구나.]



별로 기대하고 물어본 것도 아니었던 원로는 그렇게 답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선 안 됐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모조리 죽였어야만 했는데.]



원로는 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인간이 강해지기 전에 몰살시켜야 했는데, 자비를 베푼 것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다는, 자책이었다.




"하지만 원로님, 모든 인간이 어리석지만은 않습니다."


피소니르는 원로에게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자비롭고, 용만큼이나 지혜롭기도 합니다. 이들은 지금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남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모두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피소니르, 너는 여전히 너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두둔하는 것이냐?]


"네, 제가 죽인 이들의 가족들이 저를 용서하였기에."



한 때 불의 숨결이라 불리었던 용의 일족은 피소니르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말았다.


하지만 피소니르의 손이 깨끗한 건 아니었다. 전쟁 중 그녀가 죽인 사람들도 가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는 피소니르 때문에 마지막 남았던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게 된 자도 있었다.


모든 이가 피소니르를 용서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피소니르를, 나아가서 용을 용서하였다.


그 자비 덕분에 피소니르는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변한 이들이 과오를 되돌리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질러놓은 것에서 도망칠 궁리나 하는 것을 어찌 과오를 되돌린다고 부를 수 있겠느냐?]



하지만 피소니르의 간절한 옹호에도 원로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잠시 언짢은 소리를 내더니, 원로는 차가움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하였다.



[피소니르, 인간은 끊임없이 쌓아올리는 생물이다.]



그것은 원로가 몇 번이고 피소니르에게 해준 이야기였다.



[그들은 태어나면 새로운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백년도 되지 않는 찰나에 죽고 만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 부모가 지은 집 위에 새로운 집을 짓기 시작하지. 그렇게 그들은 계속해서 탑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있던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위태롭게 탑을 쌓아올린 결과가 지금의 이 세상 아니더냐?]


"하지만 원로님, 이번만큼은 정말로 다를지도 모릅니다."


[그 이야기도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구나. 이들이 정말로 해결책을 찾을 생각은 있더냐? 네가 지금도 의심하듯이 연구를 돈을 모을 핑계거리로 삼는 게 아니라?]



원로는 너무나 간단하게 피소니르의 마음을 읽으며 말했다.


연구자들은 진지하다. 후원자들 중에서는 진심으로 이것이 인류의 미래라며 자신의 인생을 쏟아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에 반해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구는 멸망하지 않을 거라며, 이제는 고작 수십년 뒤에 아무런 가치도 없어질 돈을 끌어안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남은 시간이 없다. 그 안에 인간들이 한다는 연구가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 설령 그 연구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용조차 우주에서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인간이 가능하겠느냐?]



죽었다고 알려진 원로는 사실 우주에 살아있었다.


원로는 자신과 함께 떠나기로 했던 용들과 함께 우주로 나간 달의 지하에 자리를 잡고, 언젠가 다시 지구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동면을 취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과 전능한 마법, 수천년의 지혜로도 우주에서 용이 살아갈 환경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지금처럼 그저 죽지 않고 최대한 버티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이게 가능했던 것도 용의 튼튼한 신체 덕분이었다.


무력과 수를 제외하면 용에 비해 훨씬 약한 인간이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원로께서는 그 사실을 인간에게서 숨기시는 겁니까?"



피소니르는 자신의 원로에게 원망을 담아 말했다.


사실 피소니르는 몇 번이고 이 사실을 인간에게 알릴까 고민했다. 저 별들의 사이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없다고, 우주에서 용과 인간의 집이 되어줄 곳은 이곳 뿐이라고,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이들이 변할 것이라고,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의 답에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말하고 나서는 당장 듣는 척은 하겠지. 하지만 1년이 지나면 말을 들었던 이의 대부분이 잊을 것이고, 50년이 지나면 말을 했던 것은 단순히 부모가 겪었던 일이, 100년이 지나면 조상의 일이, 천 년이 지나면 전설로 치부되며 잊혀질 게 뻔하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는 자들이 있으면 설령 전설이 되더라도 거기서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자가 얼마나 되겠느냐? 내가 전해주었던 무너질 탑을 쌓지 말라던 이야기조차 이제는 아무도 그 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일은 아직 젊은 피소니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로, 원로가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시기였다.


원로가 아직 인간을 증오하지 않았으며,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인간을 변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믿던 시대였다.


마치 자신의 가족을 감싸듯 인간을 두둔하는 피소니르를 보며, 원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피소니르, 그들이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현혹되지 말아라. 인간의 악의는 개인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쌓아올린 탑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쌓아올린 탑에 의해 모두 죽게 될 거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런 길이어야만 합니까? 이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모두 죽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이것 말고는 답이 없다. 우리는 인간이 쌓아둔 탑을 부술 수 없다.]



원로는 다음으로 할 말이 피소니르에게 얼마나 잔혹한 말이 될지를 알기에, 그리고 이 말을 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신물이 났기에, 망설임이 없으면서도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마지막 불의 숨결은 계속해서 지켜보아라. 인간이 지구를 해치지 않고 인간을 모두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할 때까지.]



용의 원로는 용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인간이 달성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전했다.


한 때 지구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용이었을 때, 용에게 유일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 용이었듯이.


지금 지구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건 인간들 뿐이었기에.


원로는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피소니르가 조용히 눈을 뜨자, 창문 중앙에 떠있던 달의 끝자락이 창문 너머로 천천히 움직이며 사라지고 있었다.


피소니르는 환하게 비춰지던 달빛이 사라진 방 안에서 작은 불빛을 마법으로 만들어내고, 집으로 가져온 서류들을 보며 꼼꼼하게 검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궁리했다.


원로는 그저 기다리라고 했지만, 피소니르가 하는 일은 전혀 달랐다. 피소니르는 비극 없이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고치고자 노력하였다. 중립으로 존재해야하는 용의 대표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예정된 파멸만큼은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피소니르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에게 베풀어졌던 용서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그 자비에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면, 인간이 변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세상은 젊은 용 하나가 막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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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꿈에서 달에서 사는 용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