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생일 축하 파티에 좀처럼 친하지 않던 친구가 불쑥 얼굴을 내비치는 것처럼.



어떤 의미로든 참혹하며, 냉정하고, 불쾌한 녀석이다.



시련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극복할 만큼만 준다는 소리는 귀에 닮도록 들어보았지만-(이 세상에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말이다).



근위축성측색경화증.


흔히들 루게릭 병이라고 불리는 이 병명은.



"앞으로 1년정도 남으셨습니다."



나의 신체로부터 자유를 빼앗아갔다.



"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



너무나도 손쉽게 말이다.



내가 여태 쌓은 지위, 돈, 명성들을 모조리 박살내고도 남았다. 



한 손으로 소설을 쓰려니까 죽을 맛이더라.



왼손가락부터 찾아온 마비는 내 몸을 단단한 고치안에 가두는 느낌이었는데.



번데기가 우화를 하듯, 나비가 되기 전의 준비를 하듯이 내 몸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나는 나비처럼 날아 오를 수 없었다!


애초에 점점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오만상을 찌뿌리면서 손에 힘을 준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6번째 손가락을 움직이려 노력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맞으려나.



전장에서 지뢰밭을 해쳐나온 군인과도 같이, 왼손과 왼발의 감각이 날아간 후에야 나는 결단을 내렸다.



나는 오늘 죽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작가로서의 혼이 살아있을때에 죽기로.



[살아있는 채로 매장을 당하는 기분이다.]



[축축하고 딱딱한 흙을 누군가가 삽으로 퍼서 내 머리 위에 매일 한 웅큼씩 올려놓는 기분.]



[제발 살려 달라고 신에게 빌어봐도 변하지 않았다.]



익숙치 않은 오른손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죽음이라는 무게는 이토록 가볍다. 때문에 나는 더욱더 가벼워지기 전에 죽기로 했다...]



유서를 모두 작성한 뒤 몰래 병실 밖으로 나섰다.


왼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곤 터벅터벅 움직였다.



대형 병원에는 보행로라고 하는 경사로가 존재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환자를 위해 층을 오를 수 있게 해둔 곳이며.



내가 8살의 나이에는 희망을 잃지 않고 병마와 싸웠던 곳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불행은 소아백혈병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좆같은 일에 좆같은 일이 겹치면, 사람은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가 보다.



못난 어른이라서 미안해.



그것이 어린시절의 나에게 해줄수 있는 유일한 충고이자,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기도 했다.



"후아!"



겨우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면서 층을 올랐다. 



성인병동의 칙칙하고도 암울한 냄새를 지나서.



이 한밤중에도 불이 켜져있고, 온갖 알록달록한 장식이 꾸며져 있는 희망의 층에 도달했다.



어린이 병동에서의 추억은 아직도 내게 향수가 깊었다.



밖에 나가면 햄버거를 원없이 먹고 싶어하던 순수.


언젠가는 빡빡민 머리와 어머니께서 손수 짜주신 털모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재활 열심히 하라는 간호사 언니와 물리치료사 오빠들의 응원.



지금과는 정반대였다.



입까지 완전히 마비되기 전에 먹어야 한다면서 전국팔도를 돌아다녔다.



하루하루 하고싶은 일을 적던 일기를 멈췄다.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들을 정리했다.



평생을 약속한 연인은 내가 차버렸고.



날 위해서 골수를 기증해준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대로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뿅'하고 사라져도 아무도 알아채주지 않겠지.



달칵-.


옥상의 철문이 열렸다.



"춥다아, 그것도 엄청."



12월의 날씨는 칼날과도 같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얉은 환자복 사이로 느껴지는 추위는 나를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들어 주었다.



살아있다.


살아있어.



이빨을 딱딱 맞부딪히고, 몸을 덜덜 떨면서 나는 1년만에 살아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긴 투병생활로 인해서 정신이 맛이 가버린건지.



아니면 이 구질구질했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것이 행복했던 건지 모르겠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목이 막히면서 호흡이 흐트러졌다.



몸에 힘이 가득 들어가 떨린다.



"끄흑.. 흐읍.."



아, 울면 안되는데.



10층 높이에서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을 지켜봐서 일까.



갑자기 못다한 꿈이 생각 나기 시작했다. 



'좀 더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작품을 써보고 싶었어.'



나는 수액과 약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병자가 아니라.


아직도 꿈이 많았던 작가였으니까.



"글... 더 써보고 싶었는데..."



그 증거로, 옥상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하는 소리가 이렇다.



고작 이거.


단 한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멍청한 말이었지만.



나는 죽기 싫다고 발버둥을 쳤던 걸지도 모르겠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의 자살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백양 아가씨, 오늘 세자전하가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날 백발벽안의 미소녀의 모습으로 조선에 날려버린 신에 의해서.






이제 누가 이 이후로 백발벽안 조선제일 미소녀(그 당시기준은 추녀)로 환생하는데, 세자가 빙의자여서 여주인공에게 반한뒤 순애 찍는 거 "써줘"


그리고 주인공은 작가가 되어서 글쓰는거지


장붕이는 여주물 잘 몰라!

시달소보다가 떠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