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비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 냉철함이야말로 자신의 부족 왕국을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힘이었고, 덕분에 지금의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도 공황에 빠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분명히 늙어 파리에서 병상에 누워 죽은 자신이 다시 젊어진 채로 갑주를 입고, 애용하던 장검과 도끼까지 차고 말짱히 서 있는 현실.


장소는 웬 황량한 동산 위, 자신의 뒤에서 사람들이 놀라 웅성대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앞에는 동방풍 복식의 병사들이 무기를 빼들고 자신을 향해 뭐라 고함치고 있다. 그리스어 같기도 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그리고 시선을 조금 위로 올리자, 세 개의 커다란 십자가와 각각 매달린 사람들이 있다.



클로비스는 신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현장은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모를 수 없다.


문득 아주 어릴 때의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리우스파 수도사가 자신에게 성경을 가르쳐 줄 때의 기억.


예수님께서 온갖 고난을 받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자, 꼬맹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더랬지.


"저와 제 용감한 부하들이 거기 있었다면 예수님을 구해드렸을 텐데요!"


수도사는 난처하게 웃으며, 선량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분개할 일이지만, 결국 주님께서 반드시 역사하셔야 할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하신 피조물이자 아드님으로, 인류의 원죄를 떠안고 희생되셔야 할 어린 양이셨다고.


나중에 아내를 따라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정통파 신앙으로 개종한 뒤에도, 어쨌든 대속이 벌어졌어야 할 일이라는 설명은 같았다.


그러나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린 가시 면류관을 쓴 사람 -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애매한 상태의 산송장을 보자, 그 모든 교리와 논쟁들이 지금 이 순간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클로비스는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포로와 죄인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적도 허다했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척들까지도 죽였다. 시체나 산송장 따윈 차고 넘치게 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그 행보에 죄책감 따윈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참혹한 몰골의 예수님을 보고 있으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점점 커져갔다.


그저 기독교인으로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통치자이신 나의 주님께서 눈앞에 현현하셨기 때문일까?


혹은 불경하지만 그저 한 명의 인간이 괴로워하는 모습밖엔 보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지금 자신의 몇 가지 행동만으로 역사 자체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배덕감과 짜릿함일까?



클로비스는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이성적인 건 맞지만, 언제나 냉정한 판단 하에 행동한 건 아니었다. 공정한 전리품 분배를 주장하던 부하의 대가리를 쪼개버린 것도 -위아래를 분명히 하려던 의도도 물론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꼴받았을 뿐이다. 어차피 이유야 나중에 갖다붙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의 원인과 결과는 무시하고, 그저 가슴을 한가득 채운 이 감정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병사가 내지르는 창을 장검으로 쳐내고 도끼질 한 방에 머리를 분리하자, 주위의 군중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로마군 병사를 죽이고 있자니, 문득 수아송에서 자칭 최후의 서로마군을 쓸어버리던 때의 생각이 났다.


그 뒤로는 숱한 전투에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타고난 본능과 감각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적들은 모두 토막나 있었다. 바로 지금같이.


마지막 놈을 베어버리고 바닥에 있던 나무 받침대와 못을 뽑는 집게를 주웠다. 나중에 시체를 내릴 때 쓰려던 거겠지.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 밑에 받침대를 놓고 올랐다. 가시 면류관을 벗기고 예수님을 박은 못을 뽑아냈다. 잠깐 성정(聖釘)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냥 바닥에 버렸다. 지금은 그저 피 묻은 못일 뿐이었다.


당장에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태의 예수님을 조심스럽게 안고 십자가에서 내려왔다. 그 신성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성혈(聖血)이 온몸에 묻었지만, 지금은 주님을 한가롭게 돌볼 여유가 없다.


장검을 칼집에 꽂고, 한 손에 도끼를 들고, 반대쪽 손으로 예수님을 어깨에 들쳐메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방향도 목적지도 모르는 채.


뒤에서 웬 여자들이 -성모 마리아와 막달레나 등등이겠지- 울부짖으며 자신을 쫓아 달렸지만 무시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나머지 도적 두 명도 악을 썼지만 -자신들도 풀어달라는 거겠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들쳐멘 예수님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지만 분명한 프랑크어로 "놓아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무시했다.


설명할 수도,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 기묘하고도 상쾌한 기분에 몸을 맡기며 계속 달릴 뿐이었다.



지금 클로비스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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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썰 보고 짧게 써 봄. 대역갤에 올렸다가 장챈에도 올려봄.


뭐 전설은 전설일 뿐이고, 클로비스 1세는 원래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였으니까 십자가형이 뭔지 모를 리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