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 너 때문에 망한 파티가 한 둘이 아니야!"

더러운 고블린이라도 본 듯 나를 노려보며 남자가 뱉은 말이었다.

'오늘도 허탕이네...'

오늘로 벌써 3일째 나는 파티 가입에 거절 당하는 중이다.

압도적인 피지컬!

남들의 배는 되는 힘!

말보다 2배 빠른 속도!

이 모든걸 갖춘 나이지만, 단 한가지 단점 때문에 계속 구직에 실패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내가 들어간 파티는 얼마 못 가서 해체된다는 소문 때문.

아니 그게 내가 바래서 된거겠냐고... 다 그년들, 그리고 이 저주받은 피 때문인데.
피 냄새만 맡으면 정신이 돌아가버리는걸 어떡해.



"이게 누구야? 아피에르잖아!"

그렇게 오늘도 허탕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쉬던 순간, 웬 남자가 내 어깨를 잡더니 반가워 하며 말했다.

"뭐여 씨벌, 누구세요!"

곱상한 얼굴에 고생 하나 없었던 듯 고운 피부를 가진, 왜인지 낯설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이야.. 이거 서운한걸? 어떻게 나를 못 알아볼 수가 있어?"

이윽고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곧바로 이어말했다.

"나야, 트라고! 나는 보자마자 알아봤는데 섭섭해지려고 해, 아피에르."



이름을 들으니 팟 하고 머릿속이 밝아졌다.

어릴 적, 내 또래의 아이들은 이마에 뿔이 나고 항상 사납게 굴던 나더러 마족의 피가 섞인 더러운 새끼라고 했었다.

우리 엄마가 아무리 난 마족이 아니라고, 환수의 피가 섞인거라고 말해도 소용 없었다.

뿔을 잡아 뜯기고 꼴도 보기 싫어서 다른 아이들이 안보이는 조그만 언덕에서 혼자 놀기를 반복하던 그 때, 나를 마족이 아닌 인간으로 봐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 친구 트라고.

늘 틱틱 대던 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던 트라고와 그의 동생 위디에 덕분에 어린 시절에 행복한 기억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거겠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는 파티에 소속되어 있는 듯 여자들과 함께 있었다.

"오, 트라고! 이게 얼마만이야!"

며칠 째 구직에 실패해 우울하던 나는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거의 5년 만이지 아마? 정말 반갑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갑자기 궁금한게 생겼다.

"근데 나는 어떻게 알아본거야? 나는 지금도 얼굴만 봐선 모르겠는데?"

확실히 헤어지기 전까지 그는 누가 밀치면 굴러갈 정도로 동글동글해서, 훤칠한 지금 모습만 보고서는 도저히 알아채기가 힘들어보였다.

"핫하! 뿔만보고 바로 알아챘지. 이런 뿔을 갖고있는 남자가 세상에 또 있겠어!"

이내 목에서 목걸이를 꺼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너희 어머니 그렇게 되시고, 네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나랑 너랑 위디에랑 나눠 가진 우정 목걸이! 아직도 뿔에 걸고 있구나!"

그 목걸이를 보니 나는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맞아. 너도 아직 갖고 있었네!"

마을을 떠나고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세상엔 트라고나 위디에 처럼 친절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배웠었다.

"트라고, 누구에요? 저한테도 소개해줘야죠."

그 때, 이야기 하던 내내 트라고와 팔짱을 끼고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아, 참! 내 정신좀 봐. 여기는 아피에르라고, 우리 마을 얘기 했었지? 내가 5살쯤에 정착했었으니 못해도 10년은 같이한 가장 친한 친구야. 아비에르, 이 쪽은 라헬. 나한테는 너무 과분하지만 내 여자친구야."

쑥스러운듯이 웃으며 여자와 눈을 맞추던 트라고가 내게 여자를 소개시켜주었다.

"어머,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저는 트라고 파티의 수습 사제 라헬이라고 해요."

트라고의 여자친구라는 말에 순간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오 제발, 신이시여.'

그러나 요 몇 년간 터득한 표정 관리 기술로 신사다운 표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라헬씨? 아피에르 입니다."

다소 딱딱한 내 인사에도 그녀는 웃으며 마주 고개를 숙여줄 따름이었다.

"..야, 트라고. 5년만에 만나서 처음보는 네 여자친구 두고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했냐?"

다소 급작스러운 나의 귓속말에 트라고는 잠시 고장이라도 난 듯 정지하더니, 이내 얼굴이 빨개져서는 내게 말했다.

"그..그럴리가! 손만 잡아도 이렇게 떨리는걸!"

다행인 일이다. 내가 알던 트라고라면 했을리가 없지. 혹시나 했는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요즘은 혼전순결이라는게 유행이라면서?"

그러자 트라고는 껄끄러운 기색으로 내게 답했다.

"으응.. 근데 우리 이런 얘기는 그만하자. 그보다 네가 파티를 구하고 있는거 같던데, 우리 파티는 어때? 너 힘 하나는 굉장하잖아."

당연한 말이다.

힘하면 나, 나 하면 힘이 아니겠는가?

"그럼. 힘 하면 나지. 거기다 속도도 말보다 2배나 빠르다 이 말씀!"

"굉장해! 역시 아피에르! 그 커다란 방패를 보니 탱커 포지션인가보구나!"

"맞아. 하도 어릴때부터 여러명 한테 두들겨 맞았더니 맷집이 좋아졌나봐. 이게 내 적성에 맞는거 같더라고."

내 말에 잠깐 얼굴이 침울해졌던 트라고가 그의 뒤에 있던 여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내 친구라서 아는데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야!"

그러자 묵묵히 트라고와 라헬의 뒤에 있던, 누가봐도 나는 마녀요 하는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던 여자가 대답했다.

"뭐, 나는 아무튼 좋아요. 누가 들어오던지. 어차피 나 따위보다는 라헬의 의견이 중요한게 아니겠어요?"

은근슬쩍 라헬을 흘기던 마녀가 품에 있는 복슬복슬해 보이는 귀를 가진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 어쨋든 좋다는거지 미리아? 라헬 너는 어때?"

이런 상황이 뻘쭘한 듯 잠깐 나를 쳐다본 트라고가 라헬을 보며 물었다.

"나는 좋아요. 트라고 당신의 친구인걸."

"오, 라헬..."

"트라고..."

그런 그녀의 대답에 감동한 듯한 트라고는 잠시 라헬과 달달한 아이컨택을 하더니 이내 나에게 물었다.

"어때? 아피에르, 파티에 들어와주지 않을래? 너라면 파티원들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러지마 트라고... 난 그런 놈이 아니야.'

거절해야 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트라고를 위해서.

- 꼬르르륽

그러나 3일 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해 빈털털이인 나는 본능에 지배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잠깐이라면 좋아. 대신 정말 잠깐만이야. 내가 사정이 있거든."

나의 말에 표정이 밝아진 트라고는 기뻐했다.

그리고 그런 트라고를 보는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아직은 네가 나를 이렇게 웃으며 볼 수 있으니 다행이야, 트라고. 그리고 제발 지금의 네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해.'

"좋아! 기쁜 일이 있으니 한 잔 해도 되겠지? 라헬, 미리아, 그리고 아피에르! 오늘은 파티 가입 기념 파티야! 하하!"

그렇게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파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선 안됐는데.

그걸 바로 다음날 때마침 방문을 열다 술기운을 빼기 위해 운동을 다녀오던 나와 마주친 트라고와 라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트라고 설마?"

머쓱했는지 고개를 돌리는 트라고와 부끄러운지 그런 그의 뒤에 숨는 라헬을 보며 나는 내 이마 양쪽의 뿔이 욱씬거리는 것을 느꼈다.

"맞아.. 아피에르, 미리아한테는 비밀로 해줘..."

제기랄, 트라고. 그러지 말았어야지.

열린 방문 틈으로 흘러나온 흐릿한 피내음.

몸에 새겨진 유전자는 알기 싫어도 저절로 그게 라헬의 처녀혈이라는걸 알려온다.

그래, 그 달콤한 향기가 내 몸의 반을 차지하는 저주받은 피를 깨우고 만 것이다.

바이콘의 피를.

'이러면 나도 참을 수가 없잖아..'

"그럼, 트라고. 친구잖아."

친구니까 내가 무슨 환수의 피를 타고 났는지는 알고 있었어야지.
이건 네가 나쁜거야.

"그나저나 오늘도 한잔 하지 않을래? 취한 네 모습은 처음 보는거 같아서."

어제 보니 라헬이 술에 약한거 같던데 말이야.

"아. 아피에르 너는 나랑 술을 처음 마시는구나! 친구의 부탁인데 하루 쯤은 더 마셔도 괜찮겠지!"

미리 감사를 전할게.

"고마워. 트라고."

오늘 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안는다.

"그리고 앞으로 파티원은 나한테 맡겨!"

조만간 네 파티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