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의식이 다시 되돌아왔을 때, 눈앞의 여인이 처음으로 건네온 말은 그것이다.

“…계약?”

계약이라. 멋모르고 했다가는 한순간에 삶을 나락 보낼 수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래, 계약. 힘이 필요하지 않아? 아니면 간절히 원하는 염원이라도?”

물론 있다. 필요한 힘도, 간절한 염원도.

그렇지만….

“대가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힘을 주고 간절한 염원을 들어준다니. 그건 설사 그 말을 꺼낸 것이 자애의 여신이라 할지라도 그 속내를 의심해 봐야 했다.

더군다나.

눈앞의 여인은 금색 자수가 박힌 검은색 페도라를 머리에 쓴 채, 넥타이, 셔츠, 재킷까지 모두 검은색 일색인.

그야말로 ‘타락’ 그 자체를 형상화 시켜둔듯한 의상을 입고 있었기에 나는 맘 편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별거 없어.”

“거짓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거짓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지라.”

나 같은 인간을 한둘 상대해 본 것이 아닌지, 여인은 익숙하다는 듯 검은색뿐인 이 공허한 공간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 놓인 것은 세계의 온갖 술을 모아둔듯한 거대한 찬장과, 그것에 비례하듯 사람 서너 명이 위에 누워도 남을 커다란 크기의 책상이다.

“계약 내용 정도는 들어봐도 나쁘지 않지 않나?”

“전형적인 사기꾼의 대사네.”

“진짜 사기꾼은 그런 틀에 박힌 대사 따윈 내뱉지 않지만 말이야.”

여인의 말은 무시한 체, 나는 그곳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한 잔?”

어느샌가 여인은 자신 쪽에 커다란 얼음이 담긴 잔에 고급 진 위스키를 따르고 있었다.

언제 다가와 앉은 것일까. 분명 내가 의자로 다가와 앉을 때만 해도 그 자리에 멀대같이 서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모로 묘한 여인이다.

“뭐든 있다고? 한 병에 웬만한 서민이 수백 년은 고생해야 살 수 있을 거액의 와인부터, 시궁창에 사는 버러지들조차 먹는 것을 주저할 쓰레기 밀주까지. 원한다면 뭐든 꺼내주지.”

“술은 먹지….”

“않기로 하셨겠지! 딱 봐도 그렇게 보여.”

꿀꺽꿀꺽, 최소 40도는 가볍게 넘길듯한 위스키를 물처럼 삼킨 뒤 여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그럼 담배는 피나? 아님 마약이라도?”

어느샌가 여인에 손에 들린 것은 커다란 시가로 변해있었다. 풍겨져오는 냄새로 볼 때 아주 독한.

찬장에 담긴 것 역시 수백 가지 종류의 궐련과 시가, 물 담배와 딱 봐도 마약처럼 생긴 말린 잎들로 변해있었다.

“…원하는 게 뭐지?”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아무튼 간에, 요즘 사람들은 너무 올곧아서 문제야. 뭐, 나는 그런 게 좋지만.”

키득키득 거리며, 여인은 시가를 재떨이에 짓눌러 껐다.

“내가 여기서 뭔가를 하는 것을 원하는군. 그렇지 않나?”

“맞아. 아, 의례상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혹시 여색은 밝히나?”

내 질문을 가볍게 인정한 여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훅하고 풍기는 여성의 살냄새.

그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주변의 검은 공간은 온통 수많은 여인들의 살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를 홀리는 농밀한 향기에 잠시 혹하면서도, 혀를 짓씹으며 다시 시선을 여인에게로 돌린다.

“지금 장난치는 거야?”

"풋, 농담이야. 술이랑 담배에 안 넘어간 사람이 굉장히 오랜만이라. 하긴, 당신은 내 눈에도 굉장히 숙맥처럼 보이니까.”

여인이 손짓하자, 다시 공간은 검은색뿐인 공허한 장소로 돌아온다.

“본제로 돌아올까? 우리들의 계약으로.”

여인의 눈빛이 변하고, 여인은 서랍에서 거무튀튀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계약을 말하며 꺼낸 종이라기엔 잘못 꺼낸 것 같은.

“이게 뭐, 계약서라도 작성하자는 건가?”

“아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날 텐데. 적어도 기억이 난다면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울부짖었을 테니까.”

묘한, 두루뭉술한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여기 오기 전까지의 기억이 단 하나도….

“조금 도와주지.”

딱, 하고 그녀가 손을 튕기자.

머릿속에 샘솟은 기억들은 온통 붉었다. 분명 빛처럼 찬란했던 것 같은데, 그러한 기억들이 마치 시궁창에 처박힌 듯 끔찍했다.

‘당신은 도망쳐, 여긴 내가…!’

이렇게 말한 여인은 죽었다.

‘고마워요, 전부다 당신 덕분이야.’

이렇게 말한 여인도 죽었다.

‘당신뿐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말한 여인도…죽었다.

끔찍한 기억에 아까 넘긴 술과 담배가 간절했다.

너무나도 간절해서….

뭔가를 달라면 주저없이….

줘버릴 것만….

콰직!

커다란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피와 나뭇조각이 비산했다.

“하아…하아….”

“봐. 돌려보네 달라고 질질 짜며 울부짖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랬으면 굉장히 추했을 거야.”

찌그러진 채 반쯤 주저 않은 책상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는 나를 놀리듯 아까 꺼낸 종이만큼은 치워둔 채 그렇게 촌평했다.

“계약. 할거지?”

종이를 좌우로 휘적이며 말하는 여인의 웃음은 마치 악마의 그것을 닮았다. 허나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뺏어 들었다.

“계약. 내용. 조항.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최대한 빨리.”

“하~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알려줄 걸 그랬네.”

“빨리!”

“네, 네. 간단해. 하나, 당신은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을 ‘기회’를 딱 한 번 얻는다. 둘, 그 과정에서 타락하지 않는다. 끝이야.”

계약 조항이라기엔 지나치게 간단하고 명료한. 사기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내용. 허나 자신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거라도 잡아야 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의구심이 드는 것은.

“…‘타락’하지 말라는 건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야. 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염원을 등한시하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판다면.”

“…판다면?”

“끝이지. 타락한 그 시점에서 끝. 뭔가 엄청난 대가가 있을 것 같았어? 아쉽게도 그런 건 없네.”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계약하지.”

“좋아.”

***

“오고곡♡♡♡헤엑…타락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 데에…지키기로…오곡!♡♡♡”

“야, 얘 뭐라는 거냐. 자지만 박아주면 좋아죽는 년이.”

“몰라, 꼴리면 된 게 아닐까.”

“그렇긴 하네.”

사실 중간까진 진지하게 쓰다가 ‘과연 이딴게 재미가 있을까?’해서 그냥 TS 암컷타락 드리프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