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애웅!


흰둥이가 울었다.


호랑이라서 그런지 작게 울어도 우렁찬 게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다.


“조용히.”


-크르르….


흰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가죽으로 덧댄 문 대용의 천막을 치우고 초가집 안으로 들어선다.


원룸을 연상케 하는 단칸짜리 초가집 한가운데에는 초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오늘도 명상이세요, 할아버지?”

“….”


두터운 가죽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인은 말이 없었다.


예전엔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에 놀라서 어깨를 붙잡아 흔들곤 했었다.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이 초가집은 여자와 노인이 머물기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며 숨죽이며 미리 대비하자고 난리를 쳤던 게 엊그제 같건만.


이제는 나보다 튼튼하다는 걸 알기에 걱정은 진작 내려놓은지 오래다.


“그래도 숨은 쉬고 계시네.”


혹시나 싶어 코에 손을 대어보니 콧수염이 살짝 씰룩인다. 쿡쿡 입을 가리며 웃은 뒤 식사 준비를 위해 활을 비롯한 장구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와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넣고 불을 지핀다.


-애웅?


집에 오기 무섭게 다시 바깥으로 나오자 흰둥이가 슬그머니 고갤 내민다.


나는 걱정 말라며 흰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따가 고기 줄 테니까 흰둥이도 안에서 쉬고 있어. 너 불 싫어하잖아.”


- 애웅.


짧게 답한 흰둥이가 고갤 끄덕이며 슬그머니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진짜 영물이긴 영물이네.”


살면서 저렇게 사람 말 잘 듣는 호랑이는 난생 처음이다.


조심스레 고갤 기울여 문 대용인 가죽 아래 틈새로 훔쳐보자 침대 아래로 몸을 비집고 들어간 흰둥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는 이미 한참 전에 성장기가 끝나 덩치가 족히 내 두 배는 되는데도 여전히 어둡고 구석진 곳을 좋아하더라.


“하여간 고양이들 습성이란.”


어깨를 으쓱이곤 어제 미리 푹 고와서 우려낸 육수를 살짝 맛본다.


“오. 생각보다 괜찮네?”


종일 우려냈더니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난다.


여기에 버섯과 대파, 그리고 손질한 고기를 넣고 다시 푹 고우면 감칠맛이 폭발하는 훌륭한 고깃국이 탄생한다.


아무래도 조미료를 구하기 힘든 동네라 너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밍밍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려면 잘 우려낸 육수와 버섯 같은 재료의 활용이 중요하다.


덤으로 무거운 솥뚜껑을 들어 밥솥도 확인했다.


다행히 조밥이 조금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까진 거뜬하겠네.”


저장고에서 나물 등을 꺼내고, 조밥에 국까지 곁들여 한상차림을 마련한다.


마지막으로 오늘 사냥의 주인공이었던 흰둥이를 위한 생고기를 따로 커다란 그릇에 덜어준다.


평민에겐 어쩌다 한 번 먹을 법한 고기 가득한 밥상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나는 식사 준비를 마친 뒤 식탁으로 날랐다.


초가집은 어디까지나 물건을 놓고 자는 공간이라 식사는 바깥에서 해야만 했다.


마침 어설프게 통나무를 잘라서 대충 땅에 박아놓은 간이 식탁과 의자가 있다. 누가 만든 건지는 몰라도 제법 유용하게 쓰고 있다.


“흰둥아! 밥 먹자!”


-크헝!


내 부름에 흰둥이가 잽싸게 기어나온다.


덩치 때문에 침대가 쿵, 하고 들썩이는 소리가 들린다.


“급하기는.”


헐레벌떡 달려온 흰둥이의 부드러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는 상 앞에 앉았다.


자신의 밥그릇이 뭔지 아는 이 영리한 고양이는 곧장 내 옆에 발라당 누워 생고기를 꼭꼭 씹어댔다.


“할아버지는 안 드세요?”

“이미 들고 있다.”

“엄마야!”


혹시나 싶어 불러봤는데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좌선하고 있었으면서 어느새 내 맞은편에 앉아 고깃국을 후루룩 쩝쩝 맛보고 즐기고 계셨다.


“또 축지인가 뭔가 그거에요?”

“으음. 맛이 훌륭하구나. 이제 슬슬 시집가도 되겠어.”

“아니. 저는 그럴 생각 없다니까요.”


또 이런다. 내 질문엔 답해주지 않고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조밥을 고깃국에 말았다.


“다 드시고 또 안에 틀어박혀 종일 명상만 하실 건가요?”

“오늘은 천기를 읽어볼 생각이다. 요즘 하늘의 흐름이 꽤나 흥미롭더구나.”


해석하자면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하늘 보며 명상하겠다는 뜻이다.


“하아. 벌써 가을이에요. 그러다 감기 걸려도 몰라요?”

“하하핫! 고뿔 말이더냐? 걸린다고 죽진 않으니 괜찮다.”

“할아버지 나이면 감기… 가 아니라 고뿔도 조심하셔야 하거든요?”


가을은 짧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열사병만큼 추위로 훅 가신 어르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다. 모자라도 쓰고 다니면 모르겠는데. 눈앞의 할아버지는 맨날 산발로 돌아다닌다.


“아무리 머리숱이 풍성하셔도 머리가 차면 훅 가신다구요.”

“흐하하핫! 그래. 조만간 내 가죽모자라도 걸쳐보마.”


할아버지는 내 핀잔에도 머리가 풍성하다고 한 게 마냥 기분 나쁘진 않았는지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며 꺼이꺼이 웃어넘긴다.


“일단 가죽은 많으니까. 대충 안에 있는 것 중 하나 골라 쓰세요. 벽에 걸어놓은 건 마을에 가져다 팔 거니까 건들지 마시고요.”

“음! 그래. 내 꼭 기억해두마!”


별로 신뢰는 가지 않았지만, 나는 얌전히 식사를 재개했다.


그릇이 비었을 즈음 할아버지는 또 바람처럼 사라져 있었다.


텅 빈 그릇만을 남겨둔 채 말이다.


“진짜 삐쩍 마르셨는데 밥은 엄청 잘 드신다니까.”


-애웅!


나는 어느새 고기를 다 먹고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흰둥이의 배를 살살 긁어줬다.


대충 그릇을 정리하고 고갤 들자 청명한 하늘이 나를 반겼다.


벌써 가을인데도 완전히 빛을 잃지 않은 어슴푸레한 하늘엔 새하얀 달과 더불어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아. 보는 맛은 있네. 그치 흰둥아?”


-애웅!


“그래그래. 너에겐 이 하늘이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흰둥이의 턱을 살살 긁어주며 그리운 과거를 회상했다.






“제엔장…!”


짜증나.


차마 부모님 눈치가 보여 지르지 못한 괴성을 짧은 욕짓거리로 대신한다.


답답하다.


뭐라도 좋으니 이 분노를 해소하고자 샷건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다.


까드득!


이를 갈며 모니터에 비친 미남을 쳐다본다. 좌우에 나란히 선 수염쟁이들과 다르게 털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에 엘프처럼 귀가 길고 뾰족하게 솟아난 청년.


유비 현덕.


지금 나한테서 분노를 유발시키는 원흉의 이름이었다.





대략 2년 전에 발매된 ‘삼국지 ~답보기행전~’ 이라는 게임이 있다. 커뮤니티에서 부르는 약칭은 삼답보, 기행전, 삼월드 등 다양하다.


나는 삼월드라 부르고 있다.


일단 이 게임을 요약하자면, 삼국지를 기반으로 만든 오픈월드 게임이다.


삼국지인데 오픈월드라고?


자연히 세대를 불문하고 삼국지를 사랑하는 모든 남자 게이머들이 열광했다.


최근 나오는 삼국지 게임들은 죄다 기존 IP의 무한복제에, 양산형 모바일 게임만이 즐비해 더는 신선함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진짜배기 대형 신작, 오픈월드 삼국지 게임이 나타난 거다.


제법 비싼 가격인데도 유저들은 거리낌없이 거금을 지불해 삼월드를 즐겼다.


아예 삼월드만 즐기는 스트리머가 나타나기도 했다.


삼월드는 캐릭터 생성 한 번에 역사 하나를 통째로 새롭게 즐길 수 있었고, 플레이어 자신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시나리오에 변주를 주었다.


역사 개찬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삼국지 덕후들 사이에서도 망상으로만 치부되는 IF 삼국지가 매끄럽게 진행된다고 난리였다.


예를 들어, 조조가 동탁 암살 실패 후 여포에게 죽었다면.


원소가 공손찬에게 패배했다면.


관우가 형주에서 죽지 않았다면.


주유가 남장여자였다면.


여포가 조금은 더 똑똑하고 인정이 있었다면.


이런 IF 시나리오를 플레이어의 활약에 따라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스토리 연계가 이어졌다.


정해진 스토리 라인을 따르거나, 전략 게임으로서 활약하던 기존 삼국지 게임하고는 사뭇 다르게 시나리오 비중이 매우 높았다.


약간 루트랑 분기점이 더럽게 많은 실시간 스토리 게임 느낌?


그렇다고 시나리오에 집중해 게임성을 포기한 건 또 아녔다.


수많은 게이머들을 피방으로 향하게 만든 초고사양 그래픽과 용량, 제법 무게감 있는 전투와 피 말리는 전쟁, 진짜 과거의 지식인들을 상대하는 듯한 두뇌전, 그리고 미연시보다 복잡하고 치밀한 인간관계까지.


올해의 GOTY는 따놓은 당상이었고, 서양에 삼국지가 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는데도 아주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동아시아 삼국에선 아예 차세대 국민 게임이라고 불리던가.


특히 나름 색다른 캐릭터 해석과, 미려한 그래픽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장들의 모델링은 기존 19금 모델링판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삼월드에서 추출한 모델링으로 3D 창작을 하지 않으면 꼴알못 소리를 들을 정도.


모드도 성행하고 있어 IF 시나리오를 아예 모드째로 이식하거나, 모든 무장들을 여체화 시킨 일명 연희 모드도 존재한다.


후자는 수십 명의 모델링 장인들이 진짜 한땀한땀 기존 장수들의 특색을 살리며 깎은 모드인데. 아예 개발사가 그들을 전부 채용하거나 보상을 주고, 연희 모드를 사들여 공식 DLC로 판매하기에 이른다.


나도 샀었다.


도원 브라더즈 중 유비가 특히 새끈하더라.


역시 매력캐.


하여튼.


삼월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진행 방식은 신무장으로 이고깽 먼치킨물을 찍는 것과 실제 삼국지 무장이 되어서 역사를 개변하는 것 둘로 나뉜다.


뭔가 소셜 게임 마냥 자기 영지랑 인재들을 키우는 걸 좋아하는 유저는 구석진 지역에 짱박혀서 심시티를 즐기기도 한다.


원체 게임의 자유도가 높다보니 손책과 주유가 했던 것처럼 약탈혼 등도 성행한다. 대상은 주로 초선이나 강동이교 같은 삼국지 대표 네임드 여성 무장들이다.


너튜브엔 유목민족 마냥 중국 전토를 누비며 약탈혼으로 여성 무장만을 노려 하렘을 차리는 유저도 있었다.


물론, 나처럼 그냥 신무장으로 자유롭게 삼국시대를 여행하는 부류도 있다. AI가 워낙 뛰어나 어지간한 대화는 다 받아줘서 간혹 인터넷 친구를 대하는 느낌이 든다.


삼월드 유저 중엔 이런 자연스러움에 푹 빠져서 게임의 NPC들과 새로운 인간 관계를 구축해나가며 삼국시대를 대리만족하는 이들도 굉장히 많은 편이다.


나는 삼월드의 유명한 넷카마 유저였다.


넷카마가 맞나?


정확히는 여캐 유저라고 하는 게 맞겠다. 스스로 여자인 척을 하는 건 아녔으니까.


약간 어렸을 때 넷카마질을 한 기분으로 매력을 최대치로 찍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헬레나 같은 역할도 해보고, 달기처럼 황제가 된 조비를 망가뜨려 위나라를 멸망시킨 적도 있다.


하지만 정치 싸움이 쫄깃하긴 해도 경국 플레이는 심적으로 꽤 많은 심력을 소모한다.


그래서 나중엔 무력에 몰빵해 여자 여포 소리 들으며 전장의 여신 취급도 받아봤다.


도중에 형주에서 관우한테 일기토로 개기다가 패배하고, 부하들을 살리는 조건으로 관우의 첩이 되었다가 번성 전투에서 나란히 뒤졌다.


내가 그래도 관우란 존재를 나름대로 리스펙해서 끝까지 살려주려고 했는데.


자만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빨갱이 새끼를 살리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더라.


엔딩에서는 그래도 내 죽음에 눈물을 보였고, 목이 베이고서도 같이 묻혔다고 하니 나름 짠하긴 하더라.


- 조조 : 관공! 어찌하여 목만 오셨소! 그런데 곁에 있는 여인의 시신은 또 누구더냐?

- 조조 : 뭐라고? 관공의 첩? 이런 안타까울 데가…!


조조가 내 캐릭터를 보며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걸 봤을 땐 좆같아서 접을까 고민하기도 했다만….


하여튼, 그래도 시간까지 하는 미친놈은 아니라서 고이 잘 묻혔다더라.


그렇게 여러 회차를 거쳐 이번에는 사냥꾼을 겸한 떠돌이 컨셉을 즐기고 있었다.


굳이 이런 컨셉을 잡은 이유는 네임드 플레이가 슬슬 질렸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앞서 말한 경국 컨셉처럼 재미는 있는데 너무 피곤하다.


삼월드는 여타 삼국지 게임들처럼 복식이나 무기 등에서 고증 파괴가 일상이었는데. 대신 이상한 부분에서 고증을 지켰다.


여성이란 신분이 가진 디메리트가 가장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이 게임에서 여자는 아무리 능력이 빼어나거나 명성이 올라도 늘 성별이 발목을 잡는다.


당의 측천무후 전까지 고대 중국에선 여자 군주라는 명제가 거의 성립되지 않았다.


때문에 모드를 설치하지 않는 이상, 대다수 무장은 여성을 군주나 상관으로 인정치 않았다.


아무리 허수아비라고 해도 조정 역시 여군주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반란 세력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면 유능한 인재 영입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


그나마 중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런 경향은 줄어드는데. 알다시피 변방으로 내려갈수록 유능한 인재의 영입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게 된다.


오히려 거병했어도 이민족들의 여왕 취급을 받아 토벌 대상이 되기 일쑤다.


대충 4회차인가 5회차 때 내가 여자 여포 컨셉으로 시작해서 관우에게 종속됐을 때도 이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관우가 직접 토벌을 하러 올지는 꿈에도 몰랐다가 아주 탈탈 털렸다.


그렇다고 문벌 귀족 여식으로 시작하자니 정치적인 목적으로 혼처에 팔려나가기 일쑤고, 재수없게 낙양이나 장안 출신 귀족이 되면 동탁에게 걸려 그냥 육변기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일부러 남장여자 컨셉도 한 번 해봤는데.


여자인 걸 들키기 무섭게 주군을 덮치려는 중남충들 때문에 때리쳤다.


하반신으로밖에 생각 못하는 새끼들 같으니라고.


그럼에도 나는 여캐 플레이를 포기 못했다.


연희 모드는 삼국지를 하는 맛이 안 났고, 시커먼 남정네보단 여캐를 플레이하는 게 더 즐거웠으니까.


사람은 누구든 귀엽고 예쁜 걸 더 선호하기 마련이다.


사실 여성 무장이 지닌 디메리트도 적응되면 그럭저럭 할 만했다.


또 게임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런 디메리트를 파훼하거나 역이용할 수도 있다보니 그저 삼월드 개발진의 꼼꼼함에 놀랄 따름이었다.


“근데 진짜 이건 아니지!”


나는 이번 회차에 떠돌이 여사냥꾼 컨셉을 골랐다.


‘정치고 정략이고 시발 다 꺼져! 난 나만의 평온한 플레이를 즐기겠어!’


같은 하찮은 이유로 말이다.


가끔은 빡빡한 게임 플레이보단 느긋하게 즐기면서 힐링을 받고 싶었다.


스타트 지점도 일부러 형주를 골랐다.


형주는 치안이 무난하며 전쟁하고도 거리가 먼 동네다.


비록 훗날 역병신 유비와 엮이면서 시끌벅적 달아오르긴 하지만, 늘 전쟁과 반란으로 정신없는 기주, 사주, 연주, 그리고 서주보단 사정이 낫다.


전쟁의 화마가 형주까지 번져도 미리 눈여겨봐둔 네임드 무장하고 친분을 쌓아두면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거기에 유비는 없었다. 내가 이 새끼하고 엮여서 잘 된 꼴을 못 봤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니! 왜 자꾸 들러붙냐고 이 귀쟁이 새끼야!!”


유비 유비 유비 유비 유비!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유비의 이름을 저주했다.


전부 이 빌어먹을 귀쟁이가 문제다!


- 유비 : 은명 소저, 부디 이 유모의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나는 끈질기게 치덕이는 유비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잘못 걸렸어.”


뭐가 퍼펙트한 계획이냐.


그냥 처음부터 남양군을 오는 게 아녔다. 아니, 형주 자체를 오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연주에서 스타트할 걸 그랬다.


그도 아니면 저 멀리 떨어진 기주나 여성도 말만 탈 수 있으면 취급이 썩 나쁘지 않은 서량이라던가.


“진짜 넌 왜 꼭 나랑 엮이냐고….”


뭔가 인겜 무장과 플레이어 사이에 상성 관계가 존재한다면, 내 천적은 틀림없이 눈앞의 귀쟁이 유현덕이 될 게 틀림없다.


“못 도망치겠지…?”


나는 유부남 주제에 쓸데없이 영화에 나오는 엘프 마냥 잘생긴 미청년을 노려봤다. 입촉 때도 수염 안 난 얼굴 때문에 모욕을 받았다고 하던데.


“저게 누가 봐서 맏형이야. 막내지.”


누가 봐도 관우처럼 생긴 남자와 산적처럼 생긴 남자 사이에 낀 미청년은 삼국지 게임을 으레 즐겨온 내게도 상당한 괴리감을 안겨주었다.


어째 이 도원 브라더즈는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 유비 : 은명 소저?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입덕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생긴 외모와 성격이다.


문제라면 나는 남자라 녀석이 얼마나 느끼하게 굴던 역겹기만 할 뿐이고, 또 과거 회차에서도 유비와 엮여서 좋은 결말을 맞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비호감 스택이 잔뜩 쌓여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 뭣도 모르고 그냥 요망한 여자 컨셉으로 게임을 시작했을 때, 평소 촉빠였던 나는 유비를 치맛폭으로 감싼 뒤 배후에서 조종해 삼국을 통일시키려 했었다.


일종의 리스펙트였다.


‘어차피 넌 통일 못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대신 해줄게.’


실로 삼국지 게이머다운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름도 노골적으로 소달기라 지어 나는 유비를 럭키 주왕으로 만들어주고자 했다.


근데 이 시발 귀쟁이는 아이라곤 유선 꼴랑 한 명밖에 없었으면서 무슨 정력왕이라도 되는지 내 달기랑 함께 침실로 들어가더니 이후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나오게 만들었다.


일부러 악한 성향까지 첨가해서 만든 내 소달기는, 아주 유비한테 푹 빠져버렸다.


내가 그린 큰그림도 동시에 찢겨졌다.


통일이란 목적은 완수하긴 했는데. 과정이 마음에 안 든다.


본래 목적은 유비를 손에 쥐고 흔드는 거였는데.


이 미친 색녀가 역으로 유비한테 푹 빠지더니 아주 그의 아이를 숨풍숨풍 낳더라.


당시 내가 만든 소달기는 예구 특전으로 무력을 제외한 능력치가 전부 최상치였던 터라 유비랑 낳은 아이들 역시 죄다 능력치가 출중했고, 유비는 뒷방 노인네가 되었으나 끝내 자식들로 천하통일을 이뤄냈다.


“진짜 어이가 없었지….”


나는 뒤늦게 커뮤니티에서 유비가 뉴비 킬러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여자 여포짓 하다가 관우랑 엮인 건 이미 말했고.


음.


또 한 번은 와룡봉추를 꼬셔보자 어릴 때무터 물밑작업을 다 해놨는데 기껏 작업쳐둔 게 무색하게 유비가 죄다 꼬셔갔다.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나는 복수한답시고 파촉으로 넘어가 유비를 담가버리려 했으나 쓸데없이 잘 키운 봉추 때문에 실패.


자승자박하는 꼴이 되었다.


나중에 파촉 정벌이 끝난 뒤엔 사로잡혀서 처형될 위기였는데. 제갈량과 방통이 유비에게 사정해서 처형하는 대신 개인 저택에 감금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평생 둘의 내조를 하며 아이도 넷이나 낳고 잘 살았다.


아니, 나는 둘이 기꺼이 구멍동서가 되어서까지 내게 집착할 줄은 몰랐지….


나름 가스라이팅도 잘 해놨었는데 대체 어쩌다 그런 엔딩이 난 거지…?


이렇듯 내 컨셉 플레이는 대개 실패의 역사였다.


그나마 경국지색 컨셉으로 성공할 뻔했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 양귀비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로 유우를 꼬셨을 때일 거다. 그때도 결국 유우의 능력 부족과 깡패 새끼인 공손찬 덕에 저잣거리에서 참수 당했다.


딴에는 내가 커스터마이즈한 양귀비를 보고 음심이 생겼는지 살길 청한다면 살려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대답 대신 침을 뱉어줬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목을 베더라.


그 회차 이후 백마 깡패는 쳐다도 안 보게 되었다.


‘뭐, 그래도 복수는 했지만.’


일부러 오환에서 새로 스타트해서, 흩어진 부족을 힘으로 규합한 뒤 공손찬의 목을 땄다.


도원 브라더즈랑 조운이 합류하기 전에 끝내야 해서 제법 스릴이 넘쳤다.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가족 목을 베고 자살했던 그 공손찬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그렇게 복수를 성공했으나 공손찬의 빈자리를 유비가 차지한 게 문제다.


이전 회차의 인연을 생각해서 가급적이면 원소가 유우를 팽할 때까지 버티다 그를 보호해주려고 했는데.


딴에는 복수한답시고 공손찬의 가족을 몰살시킨 게 실수였는지 줄곧 평화를 외치던 유우와 관계도 틀어지고, 공손찬의 잔존 세력을 흡수해서 강해진 유비에게 또 탈탈 털렸다.


엔딩은 안 봐도 뻔해서 그냥 강종했다.


특히 관우가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더라. 넌 두씨나 잘 잡아 씨….


이렇듯 시종일관 유비와 엮일 때마다 원하는 플레이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 내가 유비와 엮이고 싶을 리가 만무하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일념 하에 유비의 끈질긴 제안을 계속 거부했다.


하지만 뉴비 킬러 유비는 고단수였다.


- 은명 : 좋아요. 유황숙이라 불리는 분의 정중한 청을 거절할 순 없지요.


거절해! 제발 거절하라고!


이상하네? 내 캐릭터가 내 말을 안 듣는다.


나는 설마 싶어서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은명 -> 유비 70


유비 -> 은명 70


역시 뉴비킬러! 시작부터 서로 호감도가 무려 70?


완전 천생연분이네요!


오이오이 젠장! 믿고 있었다고!


“하아. 다시 해야겠다.”


어지러운 게임 진행에 곧바로 일시정지를 누르고 의자에 축 늘어진다.


나는 새삼 커뮤니티에 올라온 유비의 악명을 다시 떠올렸다.


고인물들은 그를 귀쟁이나 윱므 파탈이라 부른다.


조조가 뒤틀린 취향으로 유부녀와 미망인에 집착하는 인처 킬러라면, 유비는 순수하게 특성부터 유능한 인재를 낚기에 최적화된 인재 킬러다.


본래 삼국지 시리즈에서 유비의 특성은 도주에 특화된 특성이거나, 민심을 다루는 계통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높은 매력 수치는 덤이고.


근데 삼월드의 유비는 특성이 매혹이다.


….


그래. 매혹이다.


삼월드의 모든 무장들은 간단히 세 종류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각각 패도, 왕도, 그리고 중립이다.


왕도 성향에 속하는 인물은 유비, 유우, 공융 그 외에 각종 청류파 인사들이다.


패도 성향엔 조조, 손책, 동탁, 여포, 원소, 원술 등 그냥 대다수 군주가 여기 속한다.


나머지는 중립에 속한다.


유비의 매혹 특성은 왕도 성향을 지닌 이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호감도가 팍팍 올라가서 등용이 쉬워지고, 그게 아니더라도 호감도가 여타 인물들보다 쉽게 쌓을 수 있어 인맥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


하필 은명도 왕도 성향 캐릭터라서, 유비가 끈질기게 들러붙자 함락당한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택지 중에 거절이 없는 건 너무하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일시정지 화면 속에서 유비에게 헤픈 웃음을 보이는 은명을 노려봤다.


아니, 넌 그러라고 만든 캐릭터가 아니야 은명아!


고고하면서도 신비롭다.


냉정해 보이나 내면은 다정한 갭모에를 지닌 치명적인 여사냥꾼.


“내가 원했던 컨셉은 대체 어디에…?”


차라리 중립 성향을 고를 걸 그랬다. 형주에는 왕도 성향 인재랑 호족이 많다. 그들과 인맥을 쉽게 쌓으려고 캐릭터 메이킹 때 왕도 성향을 고른 게 독이 되었다.


유비 근처에만 안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일단 다시.”


나는 게임을 종료한 뒤 다시 캐릭터 메이킹에 들어갔다.


저장한 프리셋을 불러오고, 세부 사안은 이전과 동일하나 성향만 왕도에서 중립으로 바꿨다.


성 : 은(殷)

명 : 명(暝)

자 : 無

성별 : 女

성향 : 중립

성격 : 냉정

특성 : 백발백중, 직감, 신비, 행운

능력치 : 무력 95 지력 70 매력 120(+20) 통솔력 20 정치력 20

장비 : 튼튼한 활, 천녀의

소속 : 無

휘하 : 백호


제법 만족스러운 상태창이다,


어차피 임관할 생각이 없어 통솔력과 정치력은 문제가 없을 정도로만 낮췄고, 무력과 지력은 아무래도 홀몸으로 여행하다보니 조금 힘을 썼다.


사실 매력을 낮추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싶지만.


내가 직접 커마한 여캐인데 매력이 낮은 건 용납할 수 없지. 전투에 하등 도움이 안 되고 매력 수치만 보정해주는 신비 특성을 고른 이유이기도 하다.


백발백중이야 사냥꾼으로서 활을 쓸 거니 당연한 거고.


직감 역시 홀몸으로 여행할 땐 반쯤 필수 특성이다.


행운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능력치가 빠방한 대신 장비는 조금 뒤쳐진다.


활은 기본으로 지급되는 녀석이고, 천녀의는 전투 관련 보정이 없다.


매력 수치 보정을 빼면 룩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장비다.


휘하는 일종의 파티 개념인데.


일행이나 펫이 여기 속한다 보면 된다.


참고로 백호는 예구 특전 중 하나로 전투력은 괜찮은데 가성비가 떨어지는 펫이다. 유지비가 네임드 장수의 2, 3 배 이상 들어가나 간지라 포기할 수가 없다.


원래 경국지색 컨셉 땐 호위로 자주 쓰였는데.


이번 만큼은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줄 예정이다. 사람보다 짐승이 더 신뢰가 가는 쓰리킹덤이란 대체….


“이제 스타팅 지역만 고르면 되는데….”


일단 시대 배경은 동탁 사후로 정했다. 동탁이 살아있으면 사주 쪽을 구경하기 어렵다. 

어디에도 임관하지 않고 야인으로서 살아갈 경우 자신을 지키려면 역시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장비를 파밍하려면 역시 역대 황제나 귀족들의 무덤이 즐비한 사주가 최고다.


반동탁연합 시절 장안으로 천도하며 동탁이 온갖 무덤을 죄다 도굴해가긴 했으나 진시황릉 같은 곳은 아무도 건들지 않았으니 문제없다.


문제는 역시 스타팅인데….


“일단 기주, 서주, 형주는 아웃. 양주도 손책 때매 위험하고. 아예 이참에 확 변방으로 가서 익주에 정착할까? 한중 정도면 그래도 썩 나쁜 동네는 아닌데.”


오두미교가 문제이긴 하다.


도교에 큰 획을 그은 양반답게 장로는 사이비 관련 특성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서 유비의 매혹 종교 버전이다.


마침 이 양반은 성향이 중립이라 꽤 위험하다. 난 내가 만든 캐가 느닷없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꼴은 보기 싫다.


“그러면 역시 남은 선택지는….”


청주다.


공손찬과 원소, 그리고 원담과 조조 때문에 여러모로 바람 잘 날 곳이 없는 곳이나 관도대전까지만 잘 버티면 무난하게 조조의 지배 영역에 들어가니 뱃길을 타고 사주와 연주, 그리고 기주를 오가기가 쉬워진다.


일신의 무력을 지닌 떠돌이가 유유자적 지내기 딱 좋다는 뜻이다.


나는 바로 청주를 스타팅 지역으로 골랐다.


시야가 갑자기 멀어지더라.


그리고 원치 않게 깨달았다.


“하아.”


미녀는 한숨 소리조차 아름답다는걸.






오잉 아카 기준 1만자나 되네? 아무튼 이거 누가 좀 써줘.

게임 배경이라 연의나 정사 맘대로 스까 써도 되니 시나리오에서 무척 자유롭다고. 


참고로 주인공 저때 리트 안 했으면 유관장 중 하나에게 첩으로 꼬이거나 꾀여 조운 아내로 강제 보쌈당했을 것.


장비는 하후씨랑 사이 한창 좋을 때니 아마 유관 중 하나 아님 조운일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