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소설을 읽었다.

단 하나의 완벽한 세계관을 찾기 위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을 때마다 손에 잡히는 작은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작가들을 모욕했다.

5700자의 악플을 보낸다면 소설의 빙의 된다는 뜬소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서였다.

심해 속에 처박힌 소설에 무수한 악플을 달았다.
작가의 간곡한 부탁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만든 세상이 너무나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눈앞이 깜깜해지고 낯선 천장이 보였을 땐,
마지막 경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상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 희망이란 마약에 녹아내린 탓이었다.

하여, 이 저주 받은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썩어 빠진 심성과, 말도 안되는 기적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수많은 이들을 짓밟으며 얻은 결과니, 순탄한 삶을 아닐 거라 예상했다.

여자가 되는 것도 예상한 범위 안이었다.

그랬기에 죗값을 달게 치르겠다고 약속...

아니, 제발 누군가.


-나,는 제파이 가문의 영애 아이리 제파이다!
-제발,로 찾아왔구나. 어리석은 자식!
-살,기가 느껴진다...어째서?
-여, 여자의 적!!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 제발, 살, 여, 저.



***


당신은 어떤 이유로 소설은 보는가?


만화나 영화와 달리 빠른 주기로 나와서?

아니면 활자 특유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사 때문에?


후자의 경우도 적지 않겠지만, 나의 경우는 전자였다.


수년 주기로 나오는 영화나 주 단위로 나오는 웹툰에 비하면,

소설의 연재 주기는 압도적으로 빨랐으니까.


하지만 소설을 보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들기 마련이다.


글자 만으론 무언가 모자란다고.


내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묘사가 아닌,

상상했던 그 자체가 묘사된 것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말이다,


보통은 여기서 만화나 영화를 보러 떠나겠지만, 나의 경우엔 달랐다.



비주얼 노벨(Visual Novel)


글과 그림으로 나열하는 스토리를 골라 진행하는 게임.

이제는 서서히 쇠퇴하는 장르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 게임인지 소설일지 모를 취미에 말이다.


[날 제발 살려줘.]


익숙한 사이트에 나온 정체 모를 게임.


흔하디 흔한 평가마저 없다는 점에서 얼마나 심해에 박혀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걸 해? 아님 말어."


고민하던 내 손가락을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하단의 버튼이었다.


[무료][장바구니에 추가]


"그래 기껏해야 시간만 날리는 데. 못할 건 없지."


[힘든 현실에서 도망치며 살던 난 이상한 세상에 빠지고 말았다.]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이상한 감옥에 말이다.]

[날 제발 살려줘.]


특이한 설명에 화면을 위로 올리니 붙어있는 [공포] 태그.


"귀신이라도 나오나?"


예고편을 보면 단순한 판타지 아카데미 물인데?

갑자기 샘솟는 호기심에 다운로드가 완료되자마자 게임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다운로드만 하고 묵힐 생각이었지만, 이럼 이야기가 다르다.


라는 생각을 해선 안 됐는데.


-거기 당신 감히 아이리의 길을 막는 건가요?


이 게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존나 재미없어.


거기에 점점 진행할수록 텍스트들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나,는 제파이 가문의 영애 아이리 제파이다!


쉼표가 이상하게 찍혀 있지 않나.


-아무것도 할 수 없#&@??


미완성된 것처럼 글자가 출력되지 않았다.


-???????


마치 망가진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듯이 말이다.


"만들다 버린 게임인가."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바닥이 나는 건 내 플레이 욕구였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나는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부#%@.


갑자기 잠시 동안 문장이 선명해졌다. 


-부탁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어두운 화면.


[normal end]


그곳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을 때.


평범한 사람이라면 시간을 낭비한 자신을 원망하겠지만,

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날 제발 살려줘.]


[새로운 시작] [이어하기] [종료]


메인 화면으로 돌아와 [이어하기]를 누를 만큼. 


그러나 나는 게임을 계속할 수 없었다.


??????.


오직 모자이크 된 글자만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 [새로운 시작]을 누르니 다시 게임이 정상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난 그곳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여기서 이 게임을 그만둘지,

아니면 처음부터 단서를 모을지.


처음 한번은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에선 왜 심해에 박혀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세 번 이상 반복된다면?


이것이 한두 번도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는 시점에서

다분히 의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이브 파일이..."


제작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어질 만큼이나 말이다.


 난 첫 장면으로 돌아가 이 게임의 이스터에그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쉼표가 어디 찍혀 있었지?" 


맞춤법이 틀리기 시작할 때부터 모든 텍스트를 받아 적었으며.


"이건 뭐라고 하는 거지?"


혹시 몰라, 망가진 문장에서 알아볼 수 있는 모든 단어도 수집했다.


그러자, 쉼표가 이상하게 찍힌 다섯 문장을 발견했다.


-나, 는 제파이 가문의 영애 아이리 제파이다!

-제발, 로 찾아왔구나. 어리석은 자식!

-살, 기가 느껴진다...어째서?

-여, 여자의 적!!

-저, 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 제발, 살, 여, 저. 


무언가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