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채널

오컬트 부실의 분위기는 빈 말로도 썩 좋지 않았다.


리아스 선배는 혼란스러워 했으며, 토죠와 히메지마 선배는 그 눈치를 보았다.

단연 최악이라 할 수 있는 건 역시 키바였다.


악마가 되기 전, 그는 교회에서 생활했던 모양이다.

그 이상은 꽤 민감한 화제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지만.


"잇세.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니?"

"네."

"천계에서 네 침공을 불문에 부치자고 한 것도, 설마?"

"네. 전 그때 깨달았어요."


그것만이 아니지만, 굳이 전부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런가......뭐,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겠지. 그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 쳐들어 왔으니까."

"오래된 악마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화 협정이라도 맺는 답니까?"

"아마. 일단 3대 세력의 톱끼리 모여 회담을 가진다고 해. 몇 차례를 계속할지, 혹은 한 번에 끝낼지는 모르겠지만......그 장소를 이곳, 쿠오우 학원으로 정했어."

"......이유는?"

"적룡제인 너를 보증인으로 세우고 싶대. 요컨대, 학원과......우리는 너를 참석시키기 위한 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이 도시 자체가 인질이 된 셈이야."


도시 자체가 인질. 응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즉, 책임을 떠넘기겠다고?


"천계 측에서 요청해 온 겁니까?"

"세 진영 전부 다. 너 뿐만 아니라, 백룡황도 참석시킬 거라고."


영웅파......아니, 재앙의 단에서 손을 쓴 건가.

등잔 밑이 어두운 건지, 아니면 아자젤도 알면서 동참하는 건지.


지금은 일단 입을 다물고 있을까.


"알겠습니다. 저도 참석하죠."

"괜찮겠니?"

"안 될 거 뭐 있겠습니까."


저쪽에서 먼저 '선'을 넘는다면, 이쪽도 참고 넘어갈 이유 없고.

책상 엎어버린다는 결말만 나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


똑똑, 리아스 선배가 회담실 문을 노크한다.


"실례합니다."


리아스 선배가 문을 열자, 거기에는 특별히 준비했다는 게 뻔히 보이는 고급진 테이블. 그것을 둘러싸듯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올바른 의미로, 사람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정적에 뒤덮여 있어, 전원 진지한 얼굴이었다.


"세 분 빼고, 다 아는 얼굴이구만 그래."


리아스 선배보다 먼저 입장한다. 어그로는 내 쪽에서 전부 끌고 갈 테니, 긴장 푸셔요, 선배.


"자네가 예의 적룡제인가. 만나서 반갑군. 서젝스라고 하네."


붉은 머리칼의 미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다가온다.

아마 이 남자가 리아스 선배의 오라버니. 즉, 마왕 루시퍼라는 거겠지.


"효도 잇세라고 합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멋있는 분이시네요."

"칭찬 고맙군. 리아스가 내 얘기를 자주 하나 봐?"

"아뇨, 그건 아닌데 한 번 말할 때, 브라콘인 티가 팍팍 났달까."

"자, 잠깐! 잇세!"


선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그 대신, 회담장의 경직된 분위기는 조금 이완된다.


"다른 둘은 내가 소개하지. 이쪽은 그레이피아. 나의 여왕<퀸>이면서 아내야."

"그레이피아 루키프구스입니다."

"성이 다르지 않나요?"

"공사는 구분하는 편이기에. 지금의 저는 마왕 루시퍼님의 측근이자 그레모리 가문을 모시는 메이드입니다."


그런 거구만.


"이쪽은 세라포르 레비아탄. 자네도 알 거라 생각하지만, 시토리 소우나......아니, 소나 시트리의 언니 되는 입장이지."

"만나서 반가워! 우리 소나땅하고도 친하게 지내주길 바래!"


가벼운 분위기의 마왕님이시다. 학생회장의 언니......거의 유전자 몰빵 수준이구만.

얼굴도, 몸의 라인도 회장이 밀린다.


"어이, 발리. 몸이 근질근질 해도 참아라. 그런 목적으로 부른 게 아닌 건 알고 있잖아."

"걱정마라, 아자젤. 아쉽긴 하지만,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출석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상대도 있고."


슬금슬금 마력을 흘리는 발리에게 아자젤이 한 소리 한다. 벽에 기댄 채 서 있는 발리의 시선은 이쪽에 고정되어 있다.

기껏 어색한 분위기 좀 풀어지나 했더니 저게 또......


"전투광 녀석. 몸에 열이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 하겠냐."

"초월자로 유명한 마왕 서젝스 루시퍼와의 대결도 꽤나 끌리지만, 우선 백룡황으로서 적룡제인 너부터 쓰러뜨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지."

"현재의 루시퍼를 쓰러뜨린다고 해서, 너희 집에서 다시 널 받아주지는 않을걸?"


천계 측,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시선이 발리에게 향한다.

굳이 현재의 루시퍼라고 강조해, 발리의 혈통을 빙 돌려 까발렸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변화 참 볼만 했다.


"그딴 집......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다."

"나랑 대치했을 때는 대놓고 루시퍼 이름 댄 주제에, 진짜 마왕 앞에 서니 자신 없나 보지? 아직은 네가 더 약해서?"

"그쯤해둬라, 적룡제. 발리도 자기가 잘못한 거 알고 있으니까."


문제가 더 심해지기 전에 아자젤이 끼어든다. 그가 끼어들 줄 알았다. 보호자라는 양, 감싸고 도니까.

아니, 실제로도 보호자겠지만.


'재앙의 단이랑 연결되어 있다는 악마 측 끈은, 전대 마왕의 핏줄을 비롯한 오래된 악마들인가.'


발리는 어떠려나. 저쪽에도 접촉했으려나. 아니, 설마 적룡제인 나를 끌어들여 놓고 백룡황에게도 접촉할까 싶긴 한데.

재앙의 단은 여러 조직의 연합체라는 것 같으니, 영웅파가 아닌 다른 파벌이 접촉해도 이상하진 않겠지만.


제아무리 전대 루시퍼의 핏줄에 백룡황이라 해도, 타천사 진영으로 넘어간 배신자를 그쪽에서 받아들이려 할까?

뭐, 딱히 아무래도 좋아. 이쪽의 동료는 영웅파고. 영웅파도 어디까지나 재앙의 단을 이용해 먹으려는 모양새니까. 상대편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긴 하지만.


리아스 선배와 그 권속들은 그레이피아가 안내해 준, 벽 쪽에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

학생회장은 이미 앉아 있었다. 언제 온 거야?


"그럼 전원이 모였으니, 회담의 전제조건을 하나. 여기에 있는 자들은, 최중요 금칙사항이'었던' 『신의 부재』를 인지하고 있다."

"과거형이 되어버렸군. 파문 당한 배교자라 해도, 원래 밑에 있던 부하 관리는 똑바로 하지 그랬냐, 미카엘."

"그 배교자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게 어디의 어느 분이신지 잘 아는 아자젤,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바르퍼 갈릴레이의 뒷배는 타천사인 모양이다. 아자젤이 쓴웃음을 짓는 걸 보면 지인이려나.


"......그럼 그걸 인지하고 있다고 하고, 회담을 진행하지."


그 뒤는 지루한 내용들 뿐이었다. 서로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타협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이럴거면 뭐하러 부른 거야. 그냥 자기들끼리 하지. 어차피 이런 건 보통 물밑에서 이야기가 다 진행된, 짜고치는 고스톱 아닌가.


삼파의 톱이 한 자리에 모이는, 비밀스런 회담이라, 마냥 보여주기식은 아니겠지만서도.


"그럼, 슬슬 예의 건을 짚고 넘어갈까. 아자젤, 한 가지 묻고 싶은데. 어째서 최근 수십 년간 신기 소유자를 모으고 있지? 처음에는 인간들을 모아 전력증강을 꾸미는 거라 생각했다. 천계나 우리와 다시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닐까 하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봐이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그만두자고. 모으기만 한 게 아니야. 안 그러냐, 적룡제."


아, 이거 때문에 부른 건가. 그럼 뭐, 할 말 없지도 않지만.


"뭐, 불과 한두달 정도 전만 해도, 당신네 조직의 지령을 받은 타천사에게 살해당할 뻔하긴 했지요. 위험한 신기를 품고 있다고 해서."

"그래. 그때는 적룡제인지 몰랐지만, 잘도 그 나이 먹도록 각성하지 않고 살아왔다 싶었지. 그만큼, 한 번 각성했을 땐, 즉각 폭주할 거라 생각해 제거하려 했었는데......어이쿠야, 잭팟을 터뜨렸어. 당돌하게도, 홀로 천계에 쳐들어 갈 생각도 하고."


이제껏 모두가 조심스럽게, 언급하지 않던 화제를 들먹이는 아자젤.

미카엘은 웃고 있었지만, 마냥 기분 좋아서 웃는 게 아닌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굳이 해명하자면, 그래. 신기 연구를 위해서야. 뭣하면, 일부 연구 자료도 너희들한테 보내줄까? 연구했다고 해도, 그걸로 전쟁 따위 안 해. 이제 전쟁에 흥미 따위는 없으니까. 나는 지금 세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부하에게 『인간계의 정치에까지 손을 대지마.』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을 정도라구? 종교에도 개입할 생각 없고, 악마 업계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셈이야. ──진짜로, 내 신용은 3파 중 최저냐."


두 마왕과 두 대천사가 동의한다. 타천사 총독님은 꽤나 신용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칫. 신이나 전대 마왕들보다는 나을까 했더니, 너희도 너희대로 귀찮은 놈들이야. 슬금슬금 연구하는 것도 성격에 안 맞고. 아아, 알았다고. ──그럼, 화평을 맺자구. 애초에 그럴 셈이었잖아? 천사도 악마도?"


미카엘이 처음으로 미소를 거두었다.


"네, 저도 악마 측도 그리고리에게 화평을 꺼낼 예정이었습니다. 이대로 3파 간 냉전을 계속해도, 지금 세계의 해가 될 뿐. 천사의 장인 제가 말하기도 뭐하지만──전쟁의 근원인 주님과 전대 마왕들은 이제 없으니까요."


하여간 저 이단 쉑, 호랑이 없는 곳에선 여우가 왕이라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신을 까네.


"핫! 그 고지식한 미카엘님이 잘도 말하네. 그만큼 주님 주님하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말이야."

"......잃은 것은 큽니다. 하지만, 없는 것을 계속 원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젠가 천국에 올라올 인간들을 보필하는 게, 우리들 천사의 사명. 신의 아이들을 앞으로도 지켜보고, 때로는 수호천사로서 지켜주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저희들 세라프 멤버의 의견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어이어이, 지금 발언은 『떨어진다』구? ──아니, 『시스템』은 네가 이어받고 있었지. 좋은 세계가 되었구만. 우리가 『떨어진』 무렵과는 전혀 달라."


아자젤의 야유에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아뇨. '시스템'은 이제 저희 손에 없습니다. 사악한 용이 꿀꺽 해버렸거든요."


어쭈,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내 쪽에 쏠린다. 특히 발리의 눈빛이 전보다 더 강렬해졌다.


"적룡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어째서 천계를 침공한 건지, 어째서 '시스템'을 강탈한 건지. 혹시, 처음부터 '시스템'이 목적이었던 거라면──."

"그러고보니, 아자젤과 미카엘에게는 설명했는데, 악마 측에는 제대로 이쪽의 의사를 전한 적 없네요.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계에 쳐들어 가기 전에는, 시스템이니 뭐니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한 뒤.


"전 여러분들이 인간계에 간섭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 말인즉슨?"

"천사는 천계에서만 놀고, 악마랑 타천사는 명계에서만 놀고. 그게 서로 편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천사, 타천사, 악마 모두 미신으로 여기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처럼."


등 뒤에서 리아스 선배와 그레모리 권속이 놀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감수해야겠지.


"여기서 순수한 인간은 저 뿐이니까, 감히 말씀드리는데......너무 설치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당신들의 냉전에 휘말려, 『처음부터 그런 존재는 없었다』란 식으로 정리된 사람이 몇 명인지, 기억은 하고 계십니까? 저만 해도, 그런 식으로 『말소』될 뻔했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지들도 할 말 없겠지.


"그리고, 신기 건에 관해서도, 이거 별로 좋은 결말 맞이하는 사람 별로 없던 것 같더라구요? 악마의 업이라 박해받든가, 신의 기적이라 칭송받다가 손절당하거나, 아예 악마의 권속으로 들어가거나. 그게 정말 주께서 내려주신 은총인지, 아니면 저주인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처음부터 없던 편이 좋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시스템'을 이용해, 신기라는 걸 완전히 없애버릴 건가?"

"그것도 목적 중 하나지요. 아직은 그런 걸 가능케 할 만큼, 제대로 다루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가벼이 말했다.


"애당초, 당신네들이 평화협정을 맺든 말든, 거기에 왜 인간들이 말려 들어가야 합니까? 주의 부재를 알고 쳐들어 올 다른 신화체계나 걱정하시죠? 서로 똘똘 뭉쳐 군비증강을 명목으로 더더욱 인류에게 손을 댈 생각이라면──솔직히 나도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는데."


무력시위라도 할 생각에, '성스러운 오른쪽'을 꺼내려던 순간.


내 코앞에 그레이피아가 서 있었다. 아, 죽었다......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 그녀의 손 안에서 만들어진 얼음의 칼날이 내 목을 찌르기 전, 우뚝 멈추었다.


"하, 개판이구만."


발리가 리아스 선배를 노리는 걸 제지하기 위해, 서젝스가.

서젝스를 막기 위해 아자젤이. 그런 아자젤을 막으려고 세라포르가.

회담이 박살나는 걸 멈추고자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빛의 창을 띄운 채 모두를 노린다.


"서로 물고 물리고, 단합력도 참 좋아......그런데, 발리. 너, 지금 누구를 노리는 거냐."

"감사하지, 그래. 적룡제. 널 쓰러뜨릴 권리는 오직 나에게만 있다. 그걸 말리기 위해, 리아스 그레모리를 인질로 잡으려 한 거다만. 짐작대로 잘 멈추었지 않나?"

"이게 잘 멈춘 거냐? 뇌근 백룡황. 그리고 그딴 권리, 누가 너한테 줬는데. 난 기억 없다만."


의자를 뒤로 밀고, 그레이피아를 무시한 채 일어선다.


"여하튼, 그런 겁니다. 난 경고했어요. 수틀리면 내가 직접 다른 신화체계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들 모두 몰아낼 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 우리가 여기서 자네를 없애거나, 혹은 자네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할 수도 있다는 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나?"

"그러면 명계가 멸망하겠지. 서로 터치하지 말고 살자는데, 뭐가 문제야. 어차피 인간과의 계약 따위, 악마에게는 별로 점수 벌이도 안 된다며. 그 잘난 레이팅 게임이나 하며 지내시라고."


지나치면서 리아스 선배와 눈이 마주친다. 그 떨리는 눈동자를 그대로 응시하고 있기 힘들었다.


"그리고 발리. 너 이 새끼, 밖으로 나와."

"좋아. 이전의 굴욕, 여기서 씻어주지."


회담장 밖으로 나서기 직전, 아자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적룡제. 신이 없는 세계는 쇠퇴했다고 생각하나? 신이 없는 세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주제에, 거드름 피우며 말하긴.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

"그래. 신이 없다 해도, 세상은 돌아가지. 너도 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나는 네 계획에 찬성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서젝스와 미카엘이 아자젤을 노려본다. 그러더니 서로의 눈치를 본다. 누가 먼저 말할지.

언제 또 눈치게임 하는 걸로 바뀐 거야.


"앞서 말했듯이, 나는 좋아하는 신기 연구만 하면 돼. 악마와 천사는 어떻지? 악마에게 중요한 건 종의 보존, 천사에게 중요한 건 사후 천국으로 올라올 인간의 보필. 그 외에, 더 필요한가?"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아자젤도 참 사악하다. 그래서 타천사겠지만.

여기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다 같이 평화롭게 살자고 논하는 자리에서 옹졸하고 지 밖에 모르는 놈 낙인 찍히니까.


저, 저, 지가 불질러 놓고 남몰래 잘 했지? 하고 피식 웃는 거 봐. 지원 해준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햐~. 진짜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아저씨일세.


"악마의 존속은 이제 외적만 신경쓰면 되고, 주님께서 내려주신 자유의지 시점으로 봐도 천사가 인간사에 개입하는 건 이단이 아닐까 싶은데, 응?"


내가 했던 말 그대로 이용해서 비꼬는 거 봐.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표정이랑 말투로 저리 말 하다니.

나도 저렇게 보였나. 그건 좀 미안하구만 그래.


서젝스와 미카엘이 머뭇거리는 사이, 나는 다시금 용기를 내고 리아스 선배를 돌아보았다.

눈은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때와 장소 탓에 말하지 못하는 듯 했다.


......으음, 난 역시 철과 피로만 대화할 수 있는 그릇은 못 되는 모양이다.


"저도 뭐, 극단적인 고립주의......같은 건 원치 않습니다. 그냥, 서로 '선'을 지키자는 거에요.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능력을 봉인하고, 마치 인간처럼 이 사회에서 살아가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고. 다만......한 번이라도 걸리면, 연대책임 물리러 간다, 이거죠."


영웅파도 그 정도는 납득해 주겠지. 납득하지 못하면......적이 된 아군 보정 상대로, 나는 얼만큼 싸울 수 있으려나.


질 생각은 없지만서도.


"답변은 다음에 따로 듣겠습니다, 그럼. 발리, 너 이 새끼, 오늘은 기절로 안 끝난다."

"걱정 마라. 이번에는 이쪽도 전력으로 간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금수랍시고 광익을 넘어 갑옷까지 꺼내 입은 발리는 엄청난 강자였다.


이쪽에서 전력을 다한 일격. 광익의 반감으로 커버할 수 없는 출력으로 밀어붙여 자멸케 했다.

그래. 자멸이다. 제대로 쓰러뜨린 게 아니라, 발리와 광익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에너지를 흡수시켜 펑! 하고 지 스스로 터져버린 거다.


"이번에, 도......네 승리다. 하지만, 각오해라. 다음에 싸울 땐, 내가 이긴다."

"......아니, 그냥 네가 이긴 걸로 하지 않을래? 다음에 네가 더 강해져서 돌아와 정면에서 싸운다면,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거든?"


정면에서, 정정당당히 싸운다면 이길 자신 없다. 정정당당히 싸우지 않는다면 이길 자신 있다는 거다.

'시스템'의 힘으로, 가까이 다가온 발리의 광익에 간섭해 잠깐 기능을 정지시키거나 교란하면 거뜬히 이길 수 있다.


다만, 그쯤 가면 발리도 순수하게 싸움을 즐긴다기 보다, 진심으로 죽이러 오겠지.

놈의 자존심을 생각해 말하지 않았지만, 그쯤 가면 나도 녀석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일방적으로 싸우자고 밀어붙여 오는 놈, 싸우기 위해서라면 남의 가족 가지고 협박도 할 놈.

그딴 놈 죽이는 건, 나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지만......발리를 죽이면, 나중에 아자젤 얼굴 보기가 좀 껄끄러울 것 같다.


너털웃음 지으며 발리를 등에 업고 다음에 보자며 날아가는 아자젤과 투덜대는 발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버지와 아들.


아자젤은 발리 자신의 선택이었고, 이천룡의 운명이라며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찜찜해서 견딜 수 없어진다.


그런 이쪽의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묘하게 섬세함이 부족해 보이는 녀석들이 찾아왔다.


"그럼, 효도. 전에 말했듯이, 정식으로 초대하러 왔다. 스폰서가 네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데, 따라와주겠어? 다른 동료들도 소개할까 싶은데."

"......알았어, 간다."


조조의 손을 잡고, 게오르크의  절무<디멘젼 로스트>라는 신멸구로 감싸인 뒤,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를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드래이그? 아니......뭔가, 더 있는데. 이건, 천국......?"


뾰족귀 달린 검은색 긴 생머리의 미소녀였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드러나는 검은색 고스로리 원피스 차림.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건 X자 모양의 밴드. 광채가 없고, 자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눈.


"그래, 이 스폰서라는 미소녀는 어디 사는 신불이시지?"

"2대 용신 중 하나, 무한의 용신<우로보로스 드래곤>, 오피스야."

"......"


재앙의 단은 진짜 엄청난 거물 조직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