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채널

"아주 그냥,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셨네요."

"후후후, 귀한 손님이 찾아왔으니까 말이야."


절대로 다 못 먹을 양의 호화로운 식사가, 비싸 보이는 그릇 위에 담겨,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사실 난 이런 류의 식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드라마 등지에서 흔히 나오지.


전망 좋은 고층 빌딩의 식당. 고급스런 실내 인테리어, 비싸 보이는 접시들이 한가득. 

그러나, 접시의 수만 많지. 간에 기별이나 갈까 싶을 정도로 적게 차려진 음식.


플레이팅이니 뭐니 하며 그럴싸해 보이게 꾸미기만 했지. 

이거 가지고 그 가격을 받는다고?


마치 기능성은 쓰레기인데 유명 브랜드가 붙어있어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명품백을 보는 기분.


"그리고 소개하지, 내 손자일세."

"아, 안녕하세요! 밀리캐스 그레모리라고 합니다."


그레모리 경의 손자. 경의 슬하에 자녀라고는 마왕과 리아스 선배 뿐.

그러나 리아스 선배는 아직 결혼한 적 없다 했으니.


"네가 마왕님의 아들이구나. 만나서 반갑다."

"네, 넷! 저도 적룡제님의 위명은 많이 들었어요!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아니, 영광이라 할 것까지야......"


애한테 무슨 교육을 시킨 건지. 이게 귀족의 방식인 걸까. 감성이 엄청 다르다.


"우리 밀리캐스가 어떤 아이냐면──."


팔불출 부모처럼 밀리캐스 찬양을 시작하는 그레모리 일가.

그레모리 경 뿐만 아니라 공작 부인, 심지어 리아스 선배까지 칭찬 일색이다. 친모인 그레이피아는 당연하고.


밀리캐스는 쑥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기뻐하고, 거기에 긍지마저 느껴진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밀리캐스는 악마라는 종의 정수였다.


어떤 요인인지 모르나 태어날 때부터 압도적인 힘을 지닌 서젝스 루시퍼.

고위가문 출신에, 서젝스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마왕 자리에 앉았을 그레이피아 루키프구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혈통빨의 끝판왕. 악마라는 종의 한계치를 뚫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새싹.


"네. 그것 참 기쁘시겠네요."


그래봐야 악마는 악마. 인간이 아니다. 인간과 같은 세상에서 살면 안 될 반칙급 존재다.


세계를 갈라, 서로 따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더욱 강해진다.


내가 늙어 죽은 뒤에 어떻게든 위상을 부수거나 구멍을 뚫어 침공해 올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내가 책임져 줄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인간들만의 세상. 거기에는 그 어떠한 인외도 있어선 안 된다. 설령 신상(神上)에 오른 나일지라도.


꿈꾸던 그 날이 오면, 나 역시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을 포기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자, 그럼 이제 식사에 들지. 계속 서서 이야기 할 것도 아니니까."


저녁 식사 시간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일단 태양과 달이 없는 명계에도 '밤'은 있는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의사(擬似)적인 달이 떠 있다. 진짜가 아니라, 마력으로 재현한 것이라 한다. 

시간의 개념 또한 일단 인간계에 맞추고 있다고. 


명계에는 명계의 시간의 흐름이 있으나, 전생악마나 인간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악마들을 위해 마왕이 특수한 술법으로 조정했다고 한다. 


그것 참 친절하시군요.


"그런데 적룡제 군."


그레모리 경이 또 말참견을 해온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으나, 선배의 체면을 신경 써 성실하게 대응했다.


"부모님께서는 아무 일 없으신가?"

"네.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리아스의 계약자 되는 사람에게, 리아스의 아버지로서 선물 하나 주고 싶은데 말이야."

"선물인가요? 명계산 선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후후후, 아주 거창한 걸 준비하지."


뇌물이려나. 뭐어, 주는 걸 마다해선 그것도 상대의 체면을 손상케 하는 거겠지.

부모님께 효도 할 겸, 선물을 받으려고 했다.


그레모리 경이 근처의 방울을 딸랑딸랑 울렸다. 그러자 집사 중 하나가 바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음. 적룡제 군의 부모님 앞으로 성을 하나 준비해라." 


......선물로, 성? 뭐지, 명계의 조크인가 뭔가인가. 


"예. 서양식으로 할까요? 아니면 일본풍으로 할까요?" 


집사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있다. 굉장히 익숙하다는 태도다. 귀족들은 성을 주고 받는 게 보통인 건가. 스케일 크게 노시네.


"그건 좀 고민되는군. 적룡제 군의 취향은 어느 쪽인가?"

"그레모리 경께서는 인간계의 상식에 밝지 않으신 모양인데, 현대 일본에서 성 안 생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주변과 비교해서 붕 뜬다는 게 문제인 건가? 그런 거라면 모두의 인식에 조금 손을 대──."

"아버님. 일본은 좁아서 성을 세울 곳이 없어요."


선배가 자연스럽게 그 화제를 차단하며 힐끗 나를 본다.

걱정마세요, 선배. 순간 열이 확 받긴 했는데, 참지 못하고 바로 깽판칠 만큼 제 인내심이 작진 않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내 마음 속에서 그레모리 경에 대한 호감도는 폭락했지만.

원래부터 그리 높지 않은 건 덤.


"그렇군. 그럼 성 외에 뭐가 좋을까."

"아버님. 너무 그렇게 신경을 쓰시면 거꾸로 저쪽에 폐를 끼치게 된답니다. 잇세의 부모님은 물욕이 강한 분들이 아니세요."


선배의 어시스트로 지오틱스 놈도, 공작 부인도 이제 쓸데없는 생각은 더 안 할 것 같지만.

귀찮게 더 엮이는 것도 피곤하니, 뭔가 그럴싸한 핑계는 없을까......아!


"선물은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걸로 대신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적룡제 군의 부탁인가? 물론, 얼마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썩어도 정쟁에 익숙한 귀족 나부랭이라고, 은근슬쩍 거부할 이유 만드는 것 봐.


"조만간 마왕님을 뵈러 갈 예정입니다. 다만, 보는 눈이 좀 많을 것 같아......명계의 법도에 익숙치 않은 제가 실례를 범해, 마왕님 뿐만 아니라 리아스 선배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평민인 제가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건 조금 주제 넘는다고 생각되지만, 귀족 사회의 예법이라는 걸 배울 수 있을까요?"


공작 부인이 바로 눈을 빛낸다.


"어쩜, 우리 리아스는 운도 좋아. 이렇게나 겸손하고, 또 자기를 이해해주는 계약자를 만날 줄이야. 그렇지 않나요, 여보?"

"그래. 덕분에 리아스의 안목도 좋아지겠어."


그건 은근슬쩍 리아스 선배의 괴악한 권속 취향을 돌려 까는 걸까.

부모에게 이런 소리 들을 정도라니......하여간 선배는 다 좋은데 그놈의 심미안(웃음)이 문제라니까.


"알겠어요. 식사 후, 바로 예절 수업을 듣게 해드릴 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리아스 선배가 당황했다.


"이, 잇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그럴 필요가 있어요, 리아스. 당신의 위치는 이제 여느 때보다 더 높아졌으니까."


공작 부인이 바로 참견해 왔다.


"당신은 그레모리의 차기 당주이자, 마왕의 여동생. 심지어 이번 대의 적룡제의 계약자이기도 해요. 3파 간의 협력 체제가 성립된 지금, 당신의 입장은 다른 세력의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져 있겠죠. 이전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후의 당신을 누구나가 주목 하겠죠. 리아스, 당신은 그런 입장에 있는 거라구요. 그리고 적룡제 군을 그걸 알고서, 당신을 위해 자발적으로 배움을 청해 왔어요. 조금은 그를 보고 배우세요."


이거, 잘 들어보면 선배를 훈계하는 것 같지만, 나도 들으라고도 하는 소리지?

난 그 정도로 깊이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닌데.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공작 부인의 걱정은 쓸데없는 거니까.

어차피 각 신화 간의 동맹과 대립으로 신들의 전쟁은 예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그 화약고에 불을 던지는 건 아마 재앙의 단이 될 거다.

나로서는 크게 나쁠 것 없다. 지들끼리 치열하게 주먹다짐 하는 동안, 나 또한 도와달라는 손길 다 뿌리치고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움직일 테니까.


부모님이 휘말릴 수도 있으나, 그걸 위해 하데스 라인으로 갈아탔다.

그레모리의 보호나 재앙의 단보다 더 든든한 연줄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줄 모른다고. 설마 명부, 하데스 신의 그늘 아래서 보호받을 거라곤 생각치 못하겠지.


***


그리고 나는 식사 후 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도 교육을 받게 되었다.


마왕과의 독대는 조금 뒤로 밀렸는데, 젊은 신예 악마들간의 교류회 준비에 마왕들도 뛰어든 탓에 일정이 밀린 모양이다.


집안이나 그레이피아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부러 날 길게 체류시키기 위해 수작질을 부린 것 같지만.


결국 아침부터 교육 담당의 악마에게 전 72주와 그 현황. 상급악마, 상류계급, 귀족이란 무엇인가를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교계에 관한 것까지 주입당하고 있다.


응. 알고 있었어. 마왕도 아마 보란듯이 피로연을 열어 귀족들에게 날 소개하겠지.

그 정도는 각오하고 찾아온 거니까.


"그런데 왜 밀리캐스도 저와 함께 배우는지?"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배우는 편이 즐겁지 않나요?"

"하긴. 그건 그렇다."


은근슬쩍 머리를 기울여온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웃으며 기뻐한다.

어제부터, 밀리캐스는 내게 어리광을 부려오기 시작했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누나가 있는 친구 왈, 어렸을 땐 동생이나 잘 놀아주는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고.


밀리캐스도 그런 거겠지. 같은 가족이라도, 남자일 때 쿵짝이 잘 맞는 화제 같은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적룡제님께선 의외로 악마의 문자에 대해 빨리 배우시는군요. 인간계에 있을 때 독학하셨는지?"

"명계 신문을 대신 읽어주는 권속이 있어, 대충 보면 뭔 소리인지는 감이 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시스템'을 삼키고 바벨탑 관련 저주에서 벗어났는지 언어의 장벽도 넘어섰지만 계속 토죠가 읽고 들려주었으니까.


"그럼 바로 사교댄스 수업으로 넘어갈까요. 밀리캐스 도련님 함께."


교사진은 한둘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여러 명을 배치한 것 같은데. 특히 신체접촉이 많은 사교댄스 수업 같은 경우에는 온갖 드레스를 차려입은 악마들이 수두룩했다.


청초한 인상, 귀여운 인상, 고혹적인 인상 등. 『네 취향이 뭔지 몰라서 전부 준비해 봤어』라는 느낌.


'허니 트랩 같은 게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가.'


보통 악마 = 유혹이라는 인상이니까. 나를 여기에 묶어두기 위해 그런 수단도 사용하지 않을까─싶었지만 다행이 그런 일은 없었다.


리아스 선배의 체면을 생각해서인가. 만약 그렇지 않고, 밤중에 시중 든다며 누가 들어왔다면 더 이상 참지 않고 화냈을 거다.


사람을 얼마나 얕잡아 보면, 그딴 것에 홀라당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지.


차라리 현금 등을 뇌물로 찔러주는 편이 더 마음이 흔들렸을 거다.


춤을 추며 힐끗 밀리캐스를 살펴본다. 밀리캐스는 이 수업이 크게 재미없는 모양이었다.

신장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게 불편한 건가.


아직 자기 몸을 자유자재로 변신시킬 수 있는 수준은 아닌 듯 하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듣자하니, 마왕은 격무로 바빠 자주 보지 못한다 하고.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이다. 아니면, 가까운 형제라든가.

젊게 꾸몄다 해도, 같이 산다 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거리감은 비교할 수 없다.


"밀리캐스. 이리 와."

"......네!"


남의 집 귀한 손자한테 조금 실례스런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부르자 눈을 빛내며 달려오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다.


"자, 두 손 잡고. 두 발은 내 발등 위에 얹어."

"아프지 않으시겠어요?"

"깃털처럼 가벼운 널 상대로? '형'이 힘 좀 보여줄까!"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넣고 훌쩍 들어올려준다.


"자, 높~다, 높~아."


사실 밀리캐스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닐 수 있다든가,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친밀함이 오가는 마음의 교류가 중요한 거다. 혹은 스킨십이라든가.


실제로 밀리캐스는 엄청 즐거워 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건 아버지가 대신해 줘야 하는 것일 텐데.

너무 잘나가, 그 탓에 바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의 슬픈 점이란 거겠지.


***


마왕령 루시퍼드. 전대 마왕 루시퍼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명계의 옛 수도.

그 중에서도 제일 높은 빌딩 내부의 연회장.


'......결국 사교계 데뷔가 먼저인가.'


설마 마왕과의 독대보다 이게 더 먼저 올 줄이야.

애시당초 젊은 신예 악마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다만, 리아스 선배의 계약자 겸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입장으로 찾아오기도 한 이상,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었다.

대충 자리만 지키며 이야기는 흘려들으면 충분하겠지.


오만한 상급 악마인 귀족 나으리들도 노골적으로 다가오진 않을 테고.

다가온다면 리아스 선배나 그 가문과 친분이 있는 상급악마들이나 젊은 신예 악마들이라는 거려나.


"네가 예의 적룡제인가."

"당신은?"

"라이저 피닉스. 리아스 그레모리의 약혼자다. 내 얘기를 들려준 적은 없나 보지?"


20대 초반의 외모, 악동 같은 인상에 나쁜 남자 풍 미남이 다가왔다.

'피닉스의 눈물'이라는, 이 세계에 몇 없는 포션을 독점 판매로 부를 쌓아올리고, 차남이 언론사 간부라는 피닉스 집안의 3남.


돈과 언론을 틀어쥐고, 마왕의 여동생과 약혼. 현재의 악마 사회에서 제일 잘 나가는 집안이리라.


그가 하는 얘기에 별 관심 없었지만, 그가 내 곁을 지키자 귀찮게 다가오는 악마는 적어 편했다.

리아스 선배는 그가 불편한 듯 자리를 떴으나, 서로 사랑해서 약혼한 것도 아니고, 당연한 거겠지.


"그러고보니, 조금 전에 신예 악마 4명이 마왕님들과 상급귀족 분들 앞에서 대담을 가졌지. 거기서 마왕님이 젊은 악마들에게 포부를 물었는데, 거기서 얼마나 웃긴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아?"


바알 대왕 가문의 무능이 마왕 자리를 노린다든가, 학생회장이 하급/전생악마를 위한 레이팅 게임 전문학교를 만들고 싶어한다든가, 리아스 선배와 회장이 레이팅 게임을 하게 되었다든가.


"마지막의 건 뭔가 이상한데요."

"소나 시트리의 발언이 비웃음을 사자, 휘하의 하급악마가 주제 넘게 소란을 피우다가, 마왕님의 좌중을 진정시키고 화제를 돌릴 겸 제안한 거라더군. 넌 리아스의 용병으로서 참가할 건가?"

"설마요. 그래서야 리아스 그레모리님의 활약이 제게 가릴 뿐인걸요."

"뭐, 그건 그렇겠지. 이번 대의 적룡제의 강함은 유명하니까 말이야."


천계에서 깽판치고 온 걸 좋게 보는지, 말투는 그렇지만 대화 자체는 호의를 띄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급/전생악마를 위한 레이팅 게임 전문학교인가......설마 그런 꿈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허울 좋은 망상일 뿐이지. 아직 어려서 그래."


라이저는 간단히 잘라 말했다. 허나, 거기에는 냉소와 멸시보다는 연민이 있었다.


"난 레이팅 게임의 프로다. 공식 레이팅 게임에서의 전적은 10전 8승 2패지만, 그 중에서도 2패는 친밀한 가문에 대한 '배려'로 일부러 져준 것에 불과해. 실질적으로는 무패란 말이지."

"요컨대, 접대 플레이. 승부조작이 대놓고 존재한다?"

"융통성이 있다는 표현으로 대체하지 그래. 듣는 귀가 많다."


상대에 대한 '배려'. 요컨대 귀족끼리의 체면치레를 위해 일부러 져주는 경기가 대놓고 횡행한단 말인가.

스포츠 업계는 썩은 면이 많은 건 인간 사회나 악마 사회나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소나 시트리의 이상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틀려먹었다. 인간사회에서 나쁜 물이 든 거겠지. 여긴 신분제 사회다."

"하긴 신분제 사회에서 불평등이니, 공평을 논하는 게 바보 같은 거겠죠."

"녀석은 시트리 가문의 차기 당주, 귀족이라는 입장으로 태어나지 못했으면 인간계에 유학을 가는 것도 불가능했어. 리아스도 그 정도 구분은 하는데. 하여간 머리가 가벼운 건 자매가 똑같아. 마왕소녀는 뭔......"


아마 이게 일반적인 귀족 악마의 인식이란 거겠지. 다만, 부정의 여지가 없는 팩트 투성이었다.


"라이저님. 듣는 귀가 많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 보군. 지금 건 못 들은 걸로 쳐다오."

"네. 어차피 귀족 사회와 저는 큰 관계 없으니까요."

"훗, 너무 그리 선 긋지 말라고. 혹시 모르잖나. 네가 마왕님의 권속이 된다거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마왕이 아니라 신이 찾아와 권속이 되라 해도 인간임을 포기할 생각은 일절 없으니까.


"마왕님이 서둘러 레이팅 게임으로 화제를 전환한 건 역시......"

"그래. 소나 시트리에 대한 자비다. 오래된 악마들, 특히 전대 마왕의 혈족들이 문제 삼으면 귀찮아지니까."


학생회장의 꿈이 이뤄지려면 신분제 타파를 위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반역.

그리고 지금의 마왕들은 전쟁이 끝난 후, 전대 마왕들의 핏줄을 쫓아내고 힘으로 마왕 자리를 찬탈한, 성공한 반역자들이나 마찬가지.


전대 마왕의 혈족들......아마 재앙의 단과 연결되어 있을, 구시대의 잔재들을 완전히 척결하지 못했을 정도로, 악마 사회는 여전히 불안한 면이 많아 보인다. 그 와중에 현재 마왕의 핏줄이, 그것도 젊은 신예 악마로 이름 높은 악마가 또다시 혁명 = 반역의 이야기를 꺼내든다니.


현재 마왕들의 통치가 잘못 되었다며, 얼마든지 트집 잡힐 수 있는 건수다.


"만약, 소나 시트리님이 세라포르 레비아탄님의 동생이 아니었다면."

"바로 연금생활이지. 가문에서는 즉각 약혼자와의 결혼을 추진해 빨리 아이나 낳으라고 성토할 거고."


꿈을 깨는데 충분한 극약이었을지도 모르지, 하고 라이저는 중얼거렸다.


신분이 낮은 악마가 말했으면 무시당하긴 커녕,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이야기.

자신이 귀족이기에 그 정도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테니.


"리아스의 교우관계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생각 없지만, 한 3~4년 뒤면 나는 리아스와 결혼할 거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여 인간계에 있는 동안 리아스 주위에 이상한 날파리가 맴돌거나, 소나 시트리처럼 헛바람이 들게 하려는 녀석이 있다면......네 선에서 쳐내 줄 수 있겠냐?"


굳이 들어줄 의리도, 이유도 없다. 그 3~4년 사이, 세상을 바꿔 보일 테니까.


리아스 선배가 이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에,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건 아니지만......억지로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리아스 선배가 자발적으로 따라오겠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존재를 원치 않는 세상이니.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신보다 높은 자리에 오를 나도, 악마인 리아스 선배도 평범한 인간으로 살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그 어떠한 예외라도, 결코.


"예, 그러죠."


호감은 어디까지나 호감. 내가 이상을 버리고, 리아스 선배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달라질 건 없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걸 선택한 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