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파...



루시아

알파?


롤랑

맞아. 그 사람들은 이제 널 이렇게 부를거야.


루시아

...


롤랑

어때, 마음에 들지 않아? 알파라는 이름이 너의 진정한 정체성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야.



가브리엘

복제품과 같은 이름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동료들의 토론 소리에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아직 낯설고 텅 빈 도시를 바라보았다.


루시아

...또다른 나...


이미 다른 길로 접어든 이상...


루시아

과거를 잘라내야겠지.


롤랑

그럼 이렇게 정한걸로 하지, 알파 양.



알파

...


알파

...이런 때에 옛일이 떠오르다니.


알파는 고개를 들어 텅 빈 지하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지하도시에 대한 소속감은 전혀 없지만 누구든 오랜 시간 왕복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녹슨 자국이 얼룩덜룩한 다리가 안개 끝까지 퍼져 나가 시야를 벗어나도, 알파는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그곳에서 원래의 이름을 버렸다.


...과거를 끊기 위해.


이에 대해 외출에서 돌아온 루나도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알파

루나.


그녀는 그녀의 이름을 묵상하면서 멀지 않은 곳에 난장판이 가득한 땅을 바라보았다.


알파

...어디로 간거야.



마지막 날이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심연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자 롤랑은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했다.


그리고ㅡㅡ


알파

가브리엘...


어두운 구석에서 나온 가브리엘은 여전히 깍듯한 몸가짐이지만 광기에 가까운 위험한 기운이 역력했다.


롤랑

그럼, 그 녀석은 너에게 맡길게.


롤랑은 무심한 웃음을 지으며 알파를 넘어가다 몸을 숙여 목소리를 낮췄다.


롤랑

가브리엘의 '준비물'을 처리하러 가야만 루나 아가씨가 중심부에서 빠져나올 수 있거든.


그는 손을 흔들고 재빨리 사복검을 이용해 중심부 내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브리엘이 롤랑을 가로막기 전, 알파는 이미 칼을 뽑아 응수했다.



알파

넌 루나를 배신했어.


가브리엘

내가? 아니, 루나 아가씨야말로 우리를 배신했고, 넌 그녀가 배반하게 만든 원인이다! 너 때문에 루나 아가씨는 승격 네트워크에게 버림받았고 대행자로서의 역량마저 상실해버렸다!


알파

루나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어!


알파의 칼날은 가브리엘의 가슴을 가르며 순식간에 불꽃이 튀었고, 가브리엘은 부서진 망토를 잡아뜯으며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가브리엘

역시...네놈이야말로 승격 네트워크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가브리엘

루나 아가씨는 이제 취서체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넌 그녀를 구하러 갈 생각이 없나 보군?


알파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 가브리엘. 너의 의도는 이미 얼굴에서 다 드러났다.


알파

하지만 여기서 널 놓아준다면 루나에게 위협이 될 뿐이겠지.


알파

난 그저 그레이 레이븐의 무리들이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가브리엘

쓸데없는 구조체놈들을 믿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쉽게도 그들은 이제 취서체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알파

아니.


알파

이번에는 '나 자신'을 믿기로 결심했거든. 그리고 가브리엘...


알파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바로 널 처리하는 것이다.


알파

루나를 다치게 한 자, 절대 용서하지 않아.


알파는 태도를 들어올렸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가브리엘의 빈틈을 향해 집요하게 공격했고, 가브리엘은 밀리면서 알파의 공격을 지팡이로 겨우 막아냈다.


그녀가 의식의 바다에서 큰 타격을 입었는지는 몰라도 가브리엘은 알파의 공세가 약화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처럼의 기회를 알아차린 그는 한 수 대담하게 나서길 결심하고 방어 동작을 공격으로 전환했다.


알파

...차라리 잘 됐어!


어느 한쪽이 수비를 포기하면 싸움은 곧 승패를 가른다.


가브리엘은 승격 네트워크가 부여한 숭고한 이상을 위해 이 승리에 모든 걸 걸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투에서 알파의 의식의 바다는 점차 안정됐다.



가브리엘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이 한 방으로 취서체의 자양분이 되어라!


상황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린 가브리엘은 곧바로 공중으로 치솟아 알파가 있는 지면을 향해 어떤 장갑도 뚫을 수 있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연기가 뒤덮힌 후, 찢어진 바닥 위에는 가브리엘만이 있었다.


그는 알파의 흔들림 없는 신체에 전혀 명중시킬 수 없었고, 자랑거리였던 힘은 적중하지 않는 한 소용이 없었다.


가브리앨

알파ㅡㅡ!


그러나 바로 이 일격 때문에 가브리엘은 공간을 가를 수 있는 알파의 칼날 빛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다음 순간,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가브리엘

...하... 역시 루나 아가씨가 가장 신뢰하던 사람답군...


가브리엘은 손상된 몸을 이끌고 폐허 사이에 포복해 하체도 날개도 순식간에 깨진 고철로 전락했다.


알파는 그의 부러진 지체를 밟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에 든 태도를 들어 올린 순간ㅡㅡ


탕! 휘둘러진 칼날이 보이지 않는 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

알파.


뒤쪽에서 느릿느릿 부르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벽이 층층이 늘어나자 알파는 발걸음을 돌려 태도의 검기로 모조리 베어내려했지만 완전히 절단할 수 없었다.



???

힘이 다소 쇠약해졌군, 아마 대행자 루나의 영향을 받아서겠지만.


가브리엘

...너는...


본 네거트

대행자, 본 네거트라고 불러도 좋다.


알파

네놈이 바로... 본 네거트였군.


알파는 검집에 칼을 넣고 어두컴컴한 정면을 향해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본 네거트

이미 날 알고 있는 모양이군.


알파

물론이다. 네놈 수하에 있는 승격자만 아니었다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본 네거트

나는 그에게 본디 인류가 바라고 있던 일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 지휘관 이름이... 레벤치였던가? 그는 그렇게 생각한 첫 번째 인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죽은 마지막도 아니었다.


본 네거트

이 점에 대하여 네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알파

그런 쓰레기 때문에 안타까워할 생각은 없지만, 그 일로 죽은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였다.


본 네거트

이 모든 것은 승격 네트워크와 대선별, 알파를 위한 것이었다.


본 네거트

나의 본래 의도는 사람을 죽이거나 구조체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보다 효율적인 선별을 위한 실험일 뿐이었다.


본 네거트

비록 공중정원 시절의 동료의 희생에 분개했지만, 이미 승격자가 된 이상, 설마 선별을 부정할 생각은 아니겠지?


알파

...


본 네거트

이제 말이 통할 것 같군.


알파

뭐하러 온거지?


본 네거트

물론, '복음'을 위해서다.


본 네거트

퍼니싱이 보여준 생물학적 특징과 새로운 생명에 나는 대단히 감탄했다.


본 네거트

이 별이 다시 갱생하고 있으니, 난 대행자로서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될 것이니라.


가브리엘

...!


본 네거트

너는 적조와 취서체의 부화자였다.


본 네거트

퍼니싱 바이러스의 갱생에 힘입어 승격 네트워크는 새로운 가능성을 낳았다. 아주 잘했다.


가브리엘

당신은...그것에 동의하는 것입니까?


본 네거트

당연하다.


본 네거트

이를 통해 승격 네트워크는 한 걸음 더 진화하였다.


본 네거트는 감상에 젖은 듯 아래쪽에서 밀려오는 적조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본 네거트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와버렸군. 취서체는 이미 루나에 의해 파괴되어버렸고 공중정원의 사람들도 이 땅에 내려와서 곧 여기를 정리할 것이다.


본 네거트

나도 이 재앙을 막고 싶지만 '벌집'인 공중정원이 아직 우리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한, '꿀벌'만 치워봤자 끝낼 수 없다.


그는 적조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며 몸을 돌려 거석 밑에서 포복하며 손을 내밀고 있는 가브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본 네거트

아무래도 상관없다. 부화자와 배운 점이 있는 한 만회할 여지는 존재한다.


그가 손뼉을 치자 가브리엘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큰 바위가 사분오열되었다.


알파

본 네거트...!


본 네거트

알파, 나는 지금 당장 너희들 사이의 방어역장을 풀 수 있지만, 그 전에 너에게 알려줄 소식이 하나 더 있다.


본 네거트

루나는 이미 취서체에서 구출되어, 이제 공중정원 사람들에게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


본 네거트

이런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겠지?


본 네거트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재연시키고 싶은가?


그가 웃으며 손가락질을 하자 알파 앞을 가로막던 겹겹의 방어역장이 사라졌고, 그녀는 무기를 움켜쥔 채 가브리엘 잔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몸을 돌려 취서체가 있는 심연으로 달려갔다.



본 네거트

일어나라, 부화자.


본 네거트

승격 네트워크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몸을 풍요롭게 할 더 강한 힘을 갈망하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본 네거트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새 생명을, 그리고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힘을 주겠다.


본 네거트

그 대가로...



뒤에서 주고받는 두 사람의 말소리를 무시하고 알파는 전속력으로 취서체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그곳에 남은 것은 구조하러 온 공중정원의 부대뿐이었고, 이들과 교전을 벌이거나 계속 찾아 헤매도 루나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과연 그녀는 인간에게 끌려간 것일까?


불안이 점점 마음속에서 싹을 텄지만, 그렇기에 알파는 계속 그녀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것은 그녀의 가족,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