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학풍도(雪虐风饕) : (사자성어)눈이 지독하고 바람이 세차다; 온갖 고생을 하다



알파는 텅 빈 초토 위에 서서 사방의 아수라장을 바라보았다.


그 일 이후로 그녀는 075번 지하도시 주변을 뛰어다녔다.


은밀한 구석이든, 그녀들만이 알고 있는 폐허의 오솔길이든, 사방을 뒤지고 있는 구조체든, 그녀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여 찾아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루나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


정답은 하나, 그것은 루나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알파는 너무 뻔한 이 답 앞에 서서 다음 정거장은 어디까지 갈지 고민했다.



알파

...어디로 간거야.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그녀와 관련된 수많은 추억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그녀가 어둠을 헤치고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순간이었다.


그때, 소녀는 하얀 눈 위에 서 있었다.



롤랑?

그들은 이런 일련의 행동을 엄동계획이라고 불렀어. 이 타이틀은 작전의 집행자가 특별히 붙인걸로 보여.


롤랑?

하지만 그런 수단까지 동원할 수 있는 집행자들이 과연 그런 이름을 붙일 자격이 있다고 봐야 할까?


알파

롤랑?


잡음과 추억이 뒤섞여 의식의 바다를 스치는 허상으로 변했다.


알파

아니, 잡음일 뿐이야.


루나가 사라진 뒤부터 침울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는 눈앞의 끝없는 황사를 바라보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알파

네 말은, 대행자가 됐을 때 잡음이 많이 들려왔다는 거야?


루나

틀림없어.


알파

그게 정확히 뭐지?


루나

그것은 일종의 촉매와 같은 거야.


루나

처음 대행자가 됐을 때…. 나는 아직 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목소리들이 사실인 것처럼 잘못 여겼어. 


루나는 부유를 멈추고 조용히 폐허 사이에 내려앉았다.


알파

그러니까 그것도 승격 네트워크에서 비롯된 거야?


루나

아니,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 없어.


루나

그것들은 마치 의식의 바다 손상 후 증상과 같아.


루나

물론 이것은 단지 이해하기 위한 비유고 실제로는 내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


루나

최근에도 구조체가 많이 들어와서 빠른 시간 내에 전투력을 북돋우기 위해 이 같은 손상을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을 택했어.


루나

어쩌면 언니도 대행자가 될 때쯤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알파

그런 농담은 하지 마, 내가 대행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걸 뻔히 알잖아.


루나

그랬었나? 혹시나 해서 언니에게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어.


알파

그러면 너에게 직접 얘기할게. 난 이딴거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알파

넌 이미 승격 네트워크의 그 자질구레한 책임에 얽매여 있어. 만약 나까지 그 속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누가 널 도울 수 있겠어?


루나

고마워, 언니.


알파

그나저나, 대행자가 돼야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루나

승격 네트워크는 현재 전해 내려오지 않는 역사와 기록을 포함해 특유의 지식을 전수해줘.


알파

대행자가 되었을 때?


루나

맞아.



추억속의 장면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루나

하지만 승격 네트워크에게 전수받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지.




???

이 별의 인류는 퍼니싱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다.


알파

...


???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잡음이 새벽녘에 울리는 알람처럼 의식의 바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

네가 공중정원에서 떠나게 한 일 때문인가? 아니면 루나가 대행자가 된 일 때문에?


알파

아니, 그런 것들은 하나의 기점에 불과해.


???

...기점이라.


아쉬움을 표현하듯 잡음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나

더 이상은 불필요해, 가브리엘.


루나

설령 네가 이 사람들과 구조체를 모조리 죽여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선별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날리 없어.



가브리엘

하지만 그들은 잠재적인 위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루나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아무리 치워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아.


루나

우리는 그 속에서 '씨앗'을 찾아 이곳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해.


가브리엘

네.


가브리엘은 몸소 인사를 올리고, 돌아서서 하늘로 사라졌다.



루나

언니는 하고 싶은 말 있어?


알파

...


알파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루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 듯 미소를 지었다.


루나

옛날에 언니가 들려줬던 동화 기억나?


알파

너에게 들려진 동화 이야기는 많은데, 어떤걸 말하는 거야?


루나

《마왕과 불로장생의 약》


알파

...


루나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생각을 계속했어,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언니.


루나

마왕의 약을 마시면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선별과 진화로 생명을 완전히 파멸시키지 않는 방법이야.


루나

살아 남은 사람은 마왕과 같이 괴물이 되지만, 그럼 뭐 어때?


루나

'괴물'은 인간이 자신의 판단 기준에 서서 설정한 단어에 불과해. 만약 그 호칭이 선별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나는 자랑스럽게 여길 거야.


알파

넌 다른 생명들이 살아남기를 원해?


루나

그야 당연하잖아.


루나

내가 인간의 눈에는 죄인처럼 보여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어야 범죄인 거잖아?


루나

이것은 내 소망일 뿐만 아니라 승격 네트워크의 '선별'이 본래의 뜻인 만큼, 승격 네트워크의 사명을 반드시 완수할거야.


루나

하지만 여전히 피투성이의 인간은 넘쳐흐르는 편견에 퍼니싱 바이러스의 초보적 선별조차 넘지 못하고 있어.


루나는 몸을 돌려 멀리 불처럼 타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루나

어쩌면...


루나

내가 대행자로 선택받은 것도 승격 네트워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대행자'의 시각에서 바라봐도 루나는 인간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선별을 추진하는 본래 취지는 '조건에 맞는 생명들이 이어지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소망이 그녀 자신의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증오와 혼돈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엔 그랬을 뿐이었지만...




라미아

우아…너 괜찮아?


롤랑

...안심해, 운명은 나를 그렇게 일찍 죽게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아.


가브리엘

네 놈마저 운명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니, 도대체 무엇을 만난거지?


롤랑

나참, 그냥 수업만 받은거야.


루나

...


롤랑

이번에 온 것은 '선물'을 가지고 온 구조체였어.


롤랑

그 인류들도 끊임없이 전술을 개선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군.


라미아

동료에게 자폭을 시켰다고?


롤랑

그렇지, 그리고 그는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 그렇지 않다면 나는 적어도 표정에서라도 단서를 읽었을 거야.


라미아

…그래도 그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겠지?


롤랑

죽었어, 살 수 있었던 건 내가 멀리 있었기 때문이야.



알파

...


라미아

그놈은 롤랑이 간신히 받은 새 동료였잖아.


가브리엘

지난번 그토록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인류는 승격 네트워크의 비밀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브리엘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롤랑

자기 밑에 있는 구조체도 퍼니싱에 대한 면역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 아닐까? 승격자처럼 퍼니싱에 의해 기체를 강화시키려고? 아니면 아예 한 명의 승격자, 나아가 대행자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롤랑

그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은 차고 넘쳐. 수하의 꼭두각시들을 자기들끼리 죽이게 만들고 자기들끼리 어부지리를 취하게 하는 것은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술책이잖아.


롤랑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혹은 얼마나 더 있어야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루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선별을 추진해야 해.


라미아

하지만 계속 이렇게 그 녀석들에게 방해받고 있고, 목숨도 어떻게 잃었는지조차 모르는데,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선별을...


가브리엘

루나 아가씨의 말씀은 동료를 계속 늘려야 손실에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브리엘

하루빨리 적절한 씨앗을 찾아내고, 아직 그들이 선별을 통과할 각오가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니더라도 하루 빨리 만들어내야 한다.


가브리엘

이런 비열한 계략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 있다면 더 이상 승격 네트워크를 가로막는 인간의 사명은 없다.


라미아

네...네... 그런 힘을 갖게되면 그때 절 불러주시던가요...


가브리엘

...


이런 경험은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인류의 습격은 오랫동안 이루어졌고, 마치 심연을 헤치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에 비하면 버림받고 배신당한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점에 불과했다.


그녀들의 증오심을 잠재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추격, 포획, 출몰하는 함정, 음모 속에서 작은 물방울이 강물을 이루며 심연의 밑바닥으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리 계획된 매복, 기습이었다.


그러나 곧 접촉할 수 있는 씨앗 근처에도 '선물'이 숨겨질 확률이 있었다.


이런 게임에서 인간의 추적을 풀어나가는 방법은, 그들에게 변칙적으로 개선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수법도 한 번은 숨겨져있었고, 한 번은 열악했다.


그러나 승격자 개인이나 그들의 공통된 기로에 대해 각자의 의식 속에 감춰진 기억은 이런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겹겹이 쌓인 상처와 같다.


그 중 하나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치명적이지도 않았고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흉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누적된 채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이제 곧 '마지막 볏짚'이 낙타를 눌러 죽일 때가 왔다.



알파

여기에 있었나.


선별에 통과한지 얼마 안 된 신참들을 구하기 위해 얼음으로 뒤덮인 영역에 발을 들였다.


피는 새하얀 설원에서 새빨간 꽃을 피웠고, 사방에는 연구원 몇 명이 누워 있었는데, 수송차 한 대가 공격 중에 사분오열했다.


롤랑

이런, 우리가 늦었나 본데.


롤랑은 갈라진 객차에 발을 디뎠고, 동반자는 커다란 구속 장치 속에 누워 있었다.


현장에 남은 흔적으로 보아 그는 억지로 빠져나가는 순간 구속장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라미아

인류는 이미 이렇게 무서운 것을 개발할 수 있었던 걸까?


알파

이것은 그의 능력과도 관련이 있어.


루나

원래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 녀석의 성장 속도였는데,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성장할 시간도 주지 못했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거구의 한 기체가 하늘에서 여러 사람 곁에 떨어졌다.



가브리엘

루나 아가씨.


루나

돌아왔구나. 조사는 잘 마무리했어?


가브리엘

이 장치는 북극항로연합으로부터 운반된 것입니다.


가브리엘

동쪽에는 새로 지어진 병영이 있어 은밀한 위치에 있고, 그 안에 비슷한 장치들이 있으며, 소수의 연구자들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알파

동쪽? 병영?


롤랑

지난번에 알파가 뿔고래 때문에 이곳에 왔을 때도 조사했지만 그때는 어떤 병영도 본 적이 없었는데.


롤랑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도 모두 일반 주민인데 왜 갑자기 이런 장치를 갖게 됐을까?


알파

그들이 그 이전부터 숨긴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 장치와 기술을 나눠줬을 거야.


알파

하지만 둘 다 겸비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알파

이 주민들이 알든 말든 이 설원 아래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어.


알파

그들은 고유한 강점을 가지고 있어 어떤 인재들이 방문해서 기술과 장치를 서로 공유하기도 해.


롤랑

북극항로연합이 이전 사람들과 협력했다는 건가?


알파

틀림없어.


라미아

이 사람들은 어업으로 먹고사는 거 아냐? 그들과 협력하면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


알파

바다 밑에서 수많은 감염체가 몰려와 숲을 지키는 자의 전력으로는 대응하지 못한 채 피해를 입은 적이 있어.


알파

물자를 교환하기 위해 협력한 것으로 추정돼.


알파

현재 지구상에 일정 규모의 인류 거점이 많지 않은 만큼 승격자에 기꺼이 협력할 사람의 수도 더욱 적을거야.


알파

우리가 모르는 것을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보수가 많다 하더라도 이렇게 위험을 무릅써서는 안 돼.


롤랑

그 병영은 그들 협력의 상징일 뿐이고, 또 하나 그들에게 숨겨져 있는 장소가 있는 모양인데.


롤랑

함께 여기를 조사하는게 최선인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설령 여기 병영을 죄다 부서버리더라도 다시 지어질 테고, 그 때는 더욱 찾기 힘들어질 수 있어.


루나

정말 그럴까?


롤랑

루나 아가씨의 뜻은?



루나

이것은 내 추측일 뿐이지만, 그레이 레이븐... 아니 레벤치의 그것에 대해서 언니가 조사한 것과 그 다음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 병영이 완성되기 전부터 협력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루나

이번 사건과 그 병영은 이미 다듬어놓은 토대 위에서 새로운 기술 실험을 한 것에 불과할 거야.


알파 

확실히 이곳은 어류와 소량의 특산품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물자부족에 시달려 왔어.


롤랑

만약 그들이 정말로 그 무리들과 연구에 협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거야?


가브리엘

물론 이곳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다. 잠재적인 위협은 단 하나도 남길 수 없다.



알파

그럴 필요도 없어. 대부분 일반 어민들이었고 쿠로노와 협력한 것도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기 위해서였을거야.


알파

연구에 사용된 건물만 부숴버리면 돼.


가브리엘

부디 외람됨을 용서하기를, 허나 그들의 제휴로 인해 이미 우리측은 여러 명의 손실을 입었다.


가브리엘

선별을 거칠 자들도 많지 않고, 이들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위험은 여전하다.


알파

...


알파는 눈을 감고 이 끝없는 설원을 떠올렸다. 여기서 만났던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인형 구조체들, 인간의 두려움과 편견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그리고….



알파

나는 숲을 지키는 자들을 아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충분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그녀들 중 반드시 선별을 통과할 수 있는 자들이 있을거야.


가브리엘

...


루나

언니가 말한 것은 분명 일리가 있어. 너희들은 먼저 이전의 임무를 계속해.


군중들이 루나에게 인사를 하고 뿔뿔이 흩어지자 고요한 설원에는 알파와 루나 두 사람만이 남았다.


루나

언니.


그녀는 어떤 의미 있는 미소를 띠고 알파를 돌아보았다.



알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


루나는 알파 옆에 떠서 멀지 않은 곳에 눈보라와 아수라장을 바라보며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루나

언니, 그 '루시아' 만나봤어?


알파

응.


루나

소감은 어때?


알파

별거 없어.


알파

그녀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았어.


알파

그 지휘관도 좀 특이해 보였고.


알파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녀가 잠깐이나마 좀 더 오래 단 꿈을 꾸도록 해주자.


루나

언니 말대로 할게.


휘몰아치는 찬바람이 긴 머리를 휘날렸고, 그녀의 작은 몸집도 바람에 흔들렸다.


알파는 가까이 다가가 루나의 팔을 잡았다.


알파

그 다음에는 영외의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는 일도 있는데 이 일은 내가 맡아도 괜찮겠지?




병영 근처의 단서를 조사했을 때 눈보라 속에 깜짝 놀랄 만한 우연이 숨어 있었다.



무레나르

루시아! 살아있었구나!


아냐! 이런 퍼니싱 농도... 감염체가 된건가??


알파

무레나르! 슌!


무레나르

감염체가 말을 했어?!



알파

...사정은 길어, 너희들도 너무 가까이 오지 마. 감염될 수 있어.


그녀는 경고를 보내면서도 퍼니싱을 알게 모르게 통제하여 두 사람을 감염시키지 않도록 했다.


알파

너네 왜 여기있는거야?


무레나르

이곳 감염체 수가 좀 이상하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보러 왔어. 우리더러 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단서를 찾으면 다시 돌아가야 해.


루시아, 우리랑 같이 공중정원을 돌아갈래?


알파

아니, 난 이미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알파

너희가 나한테 의식을 차리라고 말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난 너희들이 이미...


무레나르

하하, 기술적인 장애에 부딪쳤다고 들었어.


무레나르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무레나르

최근 사상자가 많아 재설계하기도 어려웠고 모델 자체도 문제가 있었거든.


무레나르

그러나 고위층은 그 해에 일어났던 사고를 조사하려면 어떻게든 우리를 다시 가동시켜야 한다고 말했어.


무레나르

그런데 모델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일손도 부족하지만 지상의 인간들과 어떤 계약을 맺어서 그들을 도와줘야 한대.


알파

계약? 여기에 연구를 보조할 사람이 있다는거야?


단서가 될 수 있는 말에 무기를 움켜쥔 알파의 말투는 진지해졌다.


무레나르

기술을 연구하는 일 따위는 잘 모르지만, 나는 확실히 옆의 병영에서 깨어났어.


무레나르

계약을 하고, 다시 일어나자, 내부의 연구원들이 그런 말을 했어.


무레나르

이들은 또 "시연을 위해 우리 모두 그 병영에 잠시 머물면서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협조하자"고 말했어.


알파

(무레나르와 슌도 잘 모르나 본데...)


무레나르의 온화한 웃음을 지켜보던 알파는 칼자루에 잡혔던 손을 늘어뜨렸다.


다시 깨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윗사람이 조사하고 싶은 일이 뭔지 영 갈피를 잡을 수가 없더라고.


무레나르

그래, 우리가 의식을 복원할 때 공격을 받았는데, 기억 데이터가 완전하지 않고, 그때의 사고의 전모도 생각나지 않아.


너는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하니? 공중정원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진실만큼은 말해줘.


알파

...그래.


그녀는 기쁨을 억누르고 추억 속에 묻어둔 조각을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무레나르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알파

그들은 내가 떠나기 전에 '루시아'를 복제했어. 만약 너희들이 공중 정원으로 돌아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무레나르

또 다른 루시아...?


그건 둘째치고 루시아, 넌 정말 옛날을 그리워하는구나.


그가 웃으면서 머리 뒤로 손을 얹고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이 익숙한 움직임을 보며 알파도 어딘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고위층의 시찰 때 서 있는 자세가 기준 미달이라는 이유로 호되게 혼났던 일도 기억했다.


목덜미에 있는 거... 우리 명판인가?


알파

어?


그리고 이 도색도... 등뒤에 있는 소대 마크가 다 닳아 버리기 직전인데!


알파

옛정을 생각해서? 아니...



알파

영원히 그 일을 잊지 말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일 뿐이야.


그녀의 한이 배어 나오는 말에도 슌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볼땐 아직도 그리워 하는 것 같은데!


참, 내 옛날 명판 좀 볼 수 있을까? 약간 그리운 느낌이랄까~


그는 웃으며 현재의 자신의 새 명판을 떼고 소식을 주고받으려는 듯 알파에게 다가왔다.


알파

나한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다가 감염될까봐 두렵지 않아?


그런 섭섭한 소리 하지말고 내버려 둬.


무레나르, 너도 좀 볼래?


무레나르

좋아.


두 사람은 알파에게 무방비 상태로 다가가 그녀가 건네준 명판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알파는 비열한 덫에 걸렸다.


재회의 기쁨은 거울과 달의 환상에 불과했다.


희망의 이름으로 병사들에게 용감하게 전진하도록 격려한 의식은 여전히 깊은 웅덩이에 빠진 돌덩이처럼 아무런 울림도 없었다.


그녀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대원은 말과 행동을 녹음해 만들어낸 AI일 뿐이었다. 그것은 일찍이 죽은 자를 애도하는 황금시대부터 존재했던 프로그램이다.


기쁨의 환상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뒤 알파의 앞에는 겹겹이 쌓인 구속역장만이 남았다.



청년 연구원의 목소리

...어이, 정말 이렇게 하면 괜찮겠지?


청년 연구원의 목소리

이 녀석들은 감염체와 같다고 다들 말하는데 그래도 일정 수준의 지능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정할 필요는 없을거야.


여성 연구원의 목소리

사실 주무관님이 이 방안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나도 좀 헷갈렸어. 왜냐하면… 감염체가 어떻게 옛정서를 읽을 수 있겠어? 그런데 지금 보니… 어쩐지….


여성 연구원의 목소리

아휴…죽은 내 친구를 이용해서 나를 속이려고 한다면, 난...


근엄한 청년의 목소리

둘 곳 없는 너의 동정심따위 집어 치워!


여성 연구원의 목소리

앗! 언제 오셨습니까?


근엄한 청년의 목소리

이 괴물들은 감정이 있든 없든 감염체다. 퍼니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적이다.


근엄한 청년의 목소리

우리가 살아 남고 싶다면 이런 방법에 의지해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근엄한 청년의 목소리

내일이 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희생될 것이니 적을 동정할 시간에 다음 달의 물자 비축분이나 확인해라.


여성 연구원의 목소리

죄송합니다, 카플란 주무관님...


카플란

너희들의 일을 계속해, 우리는 이미 물러날 길이 없다.







홍지 불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