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미와 친구가 함께 가는 여행길, 어디로 갈지... 그때 다시 생각하자.




오늘은...치지직...


...261일 째.


인간이 사라진 뒤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수십 년이 지나면 자연히 모든 인류의 발자취가 지워지고, 짐승은 썩어가는 이웃동네를 누비며 인간들의 군집지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100년 이내에 온도변화와 식물의 침입으로 금속이 팽창하거나 수축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자연적으로 무너질 것이다.


만년 후에 이르기까지 일부 방사물질을 제외하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 문명의 흔적은 완전히 소멸될 것이다.


그러나 1만 년은 지구의 45억 년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인간이 없어도 지구는 자전을 멈추지 않는다. 인간 이전에 생명은 존재했고, 인간 이후에도 여전히 생명은 존속될 것이다.


ㅡㅡ하늘에는 날개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난 이미 날아가버렸어.





Sniper

왜?


Sniper-PK43의 전력이 재가동됐을 때 그가 쏟아낸 말은 바로 이 말이었다.


??

어? 왜는 무슨 왜야?



낯선 얼굴이 그것의 시선을 압도했고, 얼굴의 주인이 거리를 벌리자 은빛 조종복을 입은 낯선 소녀가 허리를 갸우뚱하며 그를 좌우로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원이 차단된 순간의 기억 데이터는 아직 남아있었고, 눈앞의 소녀에 의해 다시 가동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붙임성이 좋은 소녀는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남을 돕는 게 내 취미거든~ 널 뭐라고 불러줄까, 꼬마 저격수?


Sniper-PK43은 상대방이 혼잣말을 하는 동안 스스로 프로그램을 검색해 실행해 보았지만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아 꺼진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Sniper

제 모델명은 Sniper-PK43 전자동 저격대입니다. 당신은 감염 증상이 없는데, 무슨 목적이라도 있습니까?



??

흥흥, 날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나미 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거라!


나나미

나 나나미는 9961일만에 겨우 꼬마 저격수라는 대화할 수 있는 동료를 찾아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나나미는 상관 안할 거야.


Sniper

...제 이름은 '꼬마 저격수'가 아닙니다. 정 부르고 싶다면 저의 일련번호 'Sniper-PK43'이라고 칭해주십시오.


나나미

알았어, 꼬마 저격수.


Sniper

당신은 제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나미

나나미의 목적? 음... 나나미도 잘 몰라~


나나미

나나미는 너랑 친구하고 싶어. 나나미는 여기 오랫동안 걸어다녔는데 맨날 눈만 내리고 아무도 못 봤어. 나나미 심심해.


소녀의 말에 Sniper-PK43은 잠시 침묵했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두 사람이 있는 작은 옥상을 가득 채웠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하늘은 흩날리는 눈 부스러기로 뒤덮여 있었고, 육안으로 5m 밖은 잘 보이지도 않고 멀지 않은 곳에서 눈보라 속에 가려진 도시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Sniper

제가 꺼졌을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Sniper-PK43이 평을 내렸다. 그러자 나나미라는 소녀가 다시 캐물었다.


나나미

나나미한테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니?


…무슨 일이 있었을까?


Sniper-PK43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소녀는 Sniper-PK43의 뒷부분에 손을 얹고 쓰다듬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Sniper-PK43의 프로그램은 눈에 낯선 소녀에게 아무런 적대감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익숙한 동작은 Sniper-PK43 메모리 라이브러리의 일부를 갑자기 일깨웠다.



눈이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그도 모른다.


당시 Sniper-PK43이 있던 건물은 보육구역 안에 있었는데, 자신은 인류의 병사였다.


이 병사의 신분이 공중정원 정부군인 만큼 엄밀히 따지면 공중정원 소유 재산이기도 했다. 그의 첫 번째 가동은 바로 이 건물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

아아, 시동이 걸렸어... 정말 잘됐어. 다시는 못 고치는 줄 알았는데...


시스템이 천천히 작동하면서 그는 청각을 갖게 됐고 그 다음은 시각이었다.


그는 병사의 손이 자신의 꼭대기를 덮고 마치 작은 동물을 대하듯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Sniper

M-T-0-8, 시작 완료, 명령을 하달해 주십시오.


그 다음은 발성장치였다.


병사

셰리프 시리즈에서 코어칩이 출하되었으니까 이걸 모델명으로 할까... 그런데 구동이 가능해서 모두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게 참 다행인 것 같아.


병사는 재잘재잘 중얼거리며 손을 움츠리고 찬바람에 냉기를 불며 무거운 장갑을 다시 끼었다.


병사

네 이름은 Sniper라고 하자ㅡㅡ 휴, 오늘부터 나랑 함께 이쪽을 감시해야 돼. 너의 일은 바로 이 경계선에 침입하려는 어떤 감염체 적들을 저격해서 사살하는 거야, 알겠지?


그가 가동을 시작한 그날부터 세상은 이미 끝없는 설원이었다.



그 뒤 옥상에서 병사 대신 근무를 마치고 밤낮으로 교대하며 연중무휴로 근무했다.


가끔 병사들이 올라가 정기점검을 하였고, 병사들은 일과 무관한 말을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늘에 공중정원이라는 이름의 거점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는 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있어; 한때 지구상에는 사계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겨울밖에 남지 않았어; 요즘 감염체가 점점 줄어드는데, 아마도 그 이후 혹한의 확산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겠지...


병사

Sniper, 고갈 구역을 볼 수 있니?


어둠 속에서 병사는 그의 곁에 앉아 손가락을 들어 어둠 속의 먼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거운 방호복 차림에도 인간의 목소리는 추위에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Sniper

저는 '고갈 구역'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통해 그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도시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병사

하하, 역시... 그 재난은 역시 엄청났나봐. 그것이 볼 수 있는 곳은 모두 그의 일부로 바뀌었을 거야.


고갈, 극한, 전쟁, 사계절, 이런 것들은 모두 스나이퍼-PK43의 로컬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병사들의 한 마디 한 마디로 이미 사라진 이 이야기를 짜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간간이 보육구역 밖을 돌아다닌 감염체를 제외하면 그는 오랫동안 적을 만나지 못했다. 그와 병사들의 일과는 점점 한가해져서 마치 세상에 둘만 남은 것마냥, 세상은 이 건물 옥상이 전부인 듯 했다.




그 병사는 잠시 동안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다른 지령을 받지 않았기에,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병사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또 하나의 어둠이 찾아왔고, 인간은 헐레벌떡 옥상으로 올라가 그에게 다가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붙어 앉았다.


Sniper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병사

...뭐? 왜 그걸 물어보는거야?


Sniper

당신이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병사들은 해맑게 웃었고 그는 Sniper-PK43을 향해 힘겹게 헬멧과 장갑을 벗으며 눈보라 속에 뺨을 드러냈다.


극도로 낮은 온도로 인해 인간의 피부가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고, Sniper-PK43이 그의 얼굴을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병사

미안해, 너를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둬서.


Sniper-PK43은 그의 얼굴에 물 성분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 물안개가 그의 얼굴에 얇은 얼음 덩어리를 만들었다.


병사

이 세상의 최악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해서…미안해.


Sniper-PK43을 향해 내뱉은 말임에도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떨어져 Sniper-PK43은 그가 자신을 넘어 다른 누군가를 향해 쏟아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병사는 일어나 처음 시동을 건 것처럼 벌거벗은 손으로 그를 쓰다듬어 주었고, 그는 인간의 불규칙한 심장과 떨림을 예리하게 느낄 수 있었다.


Sniper

무슨 일이 있었나요? 털어놓을 말씀이 있으면 제가 추가로 자정에도 경청 서비스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의외로 그의 '재치있는 말'에도 병사는 이번에 웃지 않았다. 인간은 그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병사

그 선배도 가셨고…. 다들 오래 못 버텼겠지. 아마 곧 여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병사

정말 슬퍼...


병사는 손을 그의 전원 키 위에 놓았다.


병사

...더 이상 너에게 절망적인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Sniper

저는 이-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원의 유실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병사

안녕, Sniper, 함께해줘서 고마워...


에너지 도선이 몇 번 깜박거리면서 몸에 있는 수백 개의 제동 부위의 청색등이 점차 꺼졌다. 이번에 그는 완전히 쓸모없는 기계 부품이 되는 것이다.


시스템이 꺼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인류가 등을 돌린 채 가느다란 붉은 달 아래 선 다음 바람이 휘파람을 부는 사이 병사가 마치 눈보라 속의 새처럼 몸을 날려 뛰어내리는 모습이었다.




ㅡㅡ왜?


그래서 그가 다시 살아났을 때 그가 단절되었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이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나나미

너도 이유를 몰랐구나?


나나미라는 소녀가 중얼거렸고, Sniper-PK43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까 순간에 기억 라이브러리를 읽은 내용을 반영했다.


Sniper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나나미

그냥 나나미인데?


눈 앞에 보이는 소녀가 인간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상대방의 정체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Sniper-PK43은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와중에 이 대화를 계속이어나갔다.


나나미

하지만 나나미가 온 곳은 원래 이런게 아니잖아... 나나미는 아직 이렇게 큰눈을 본적이 없어! 극지방의 눈도 이렇게 크지 않다구! 나나미는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미 질려버렸어. 나나미랑 눈싸움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Sniper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나나미

나나미도 잘 모르겠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기계 할머니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거든.

 

나나미

아무튼 너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나나미는 다음 목적지로 출발할 생각인데 꼬마 저격수도 같이 갈래?


Sniper

다음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나나미

나나미도 몰라!


Sniper

전혀 설득력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데도 가지 않습니다. 저의 임무는 여기에 주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창조자가 하달한 명령입니다.


나나미

나나미도 네가 널 만든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나미와 우리 파트너의 잠정적인 목표는 너의 창조자를 찾는 걸로 하자. 우리 둘만 있다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소녀의 목소리는 경쾌한 새와 같았고, 그 속에 담긴 희망은 Sniper-PK43의 변함없는 프로그램 회로를 건드렸다.


Sniper

...인간을 찾으실 겁니까?


나나미

나나미는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 돼!


Sniper

저는 당신에게 포기할 것을 권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고, 단 한 사람의 인간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나미

오래됐다고?


Sniper

어쨌든 오랫만입니다...


Sniper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제가 이곳에 머물며 도시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오래 못 버텼겠지. 아마 곧 여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


그 인간이 했던 말은 Sniper-PK43에게 일말의 동요를 일으켰다.


Sniper

...왜 저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나나미

왜냐하면 사실 나나미에게 신비한 정체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길 잃은 어린 양을 위해 소원을 들어주는 강의 신이었어.


Sniper

그게 무엇입니까...


Sniper-PK43은 난생 처음 인간처럼 한숨을 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받침대 아래 가열원을 가동하자 기계구조 틈새를 막았던 눈이 삽시간에 녹았고, 받침대 아래 접힌 포대 지지대가 천천히 일어서면서 그의 몸에 내린 눈은 파르르 떨어졌다.



나나미

와…! 나나미의 신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꼬마 저격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던 것일까!


Sniper

원래 있던 기능이었습니다...


Sniper

...됐습니다. 저에겐 창조자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과 함께 떠나겠습니다.


이 말에 소녀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어 Sniper-PK43의 총관에 다정하게 얼굴을 갖다댔다.


나나미

좋아! 나나미와 꼬마 저격수의 탐험 여행 시작!


겨울을 맴도는 은빛물새는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은가루를 한 겹 떨어뜨려 일종의 '계몽'을 설원을 따라 씨앗을 뿌리듯 촘촘히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