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


롤랑

...내려와.


무언가를 힘겹게 질질 끌면서, 롤랑은 조금 높은 급경사를 넘었다.


등 뒤의 햇빛을 따라, 그는 끌던 손을 잠시 놓고, 가파른 비탈길을 경쾌하게 뛰어내려, 먼지 한 조각을 흩뿌렸다.


급경사를 넘어서자 롤랑은 두 손으로 다시 줄을 잡고 급경사 꼭대기 쪽을 향해 힘껏 잡아당겼다.


???

으엑ㅡㅡ! 왜 그래! 아프잖아ㅡㅡ!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밧줄에 이끌려 가파른 비탈을 뛰어넘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네 다리가 웅크리고 벌어지면서, 거대한 하체와 약간 여위어 보이는 상반신을 지탱하였다



라미아

그건 그렇고.. 날 놔줘, 이렇게 걷는 건 불편해...


롤랑

그럼 네가 먼저 설명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롤랑

어째서 나를 본 첫 반응이 도망치는 것이었는지 말이야.



얼마 전ㅡㅡ적어도 롤랑이 라미아를 폐허로 떨어뜨리기 전이었다.


롤랑

(...?)


롤랑의 기억에는 지하수도로를 겨우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하수도 밖의 폐허가 아니라...


암흑이었다.


끝없는 어둠이 롤랑을 감싸고, 부드러운 양수와 같았지만, 그러나 따뜻하지는 않았다.


롤랑은 자신의 머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머리는 원하는 만큼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곳을 움직이고 싶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ㅡㅡ그는 지금 부드러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롤랑

(목소리가 안 나네...)


롤랑

(아니, 소리가 나지 않는 것보다는 입의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거에 가까워)


롤랑

(난 도대체...어떻게 된 거지?)


막막한 가운데서도, 롤랑은 어둠 속에서 침착을 유지했다.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리며, 일찍이 있었던 결말을 롤랑의 의식 속에서 메아리치게 만들었다ㅡㅡ



롤랑

나에게 억지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


알파

마음대로 생각해.


롤랑

참 야속하구먼.


롤랑

지하수로는 샅샅히 뒤졌는데, 아직도 여기서 루나 양을 찾고 있는 거야?


알파

아직 남은 일이 좀 있거든.


롤랑

그럼, 행운을 빌어.


롤랑

Hasta luego(다음에 봐).



롤랑

(그 뒤엔...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롤랑

(...기억이 안 나.)


롤랑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손으로 만지며 자신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ㅡㅡ예전과 달리 손도 안 움직이고 감촉도 전해지지 않는다.


롤랑

(...빌어먹을.)


롤랑

(그 뒤엔...)


롤랑

(그 뒤엔...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이 상태에서...얼마나 지난 거야?)


롤랑은 자신의 이마 속에서 은은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곧 강렬한 통증이 그의 의식 속에서 되살아났다.



롤랑

Hasta luego


알파의 발걸음이 귀의 감각 범위 안에서 사라지는 것을 들으며, 롤랑의 파손된 척추가 마침내 상반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는 그 여세를 몰아 뒷벽에 몸을 기댔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의식의 바다로 전송되는 신호는 맴도는 소음만이 남았는데, 필시 이미 완전히 박살난 것 같다.


왼팔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연하다. 그것은 진작부터 그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적조에 잠긴 구덩이 바닥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체력을 너무 잃었는데, 루나가 실종된 사실을 눈치채고 지하수로를 샅샅이 뒤졌으니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때의 허튼 수색이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여기서 롤랑은 자신의 기체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는데, 대부분 파괴되었거나 강제적으로 가동이 중단됐고, 아직 가동 중인 것도 폐기 처분할 날이 멀지 않았다.


상상 이상의 낭패였다. 이런 몸은 아마 전 연령 대상 연극 무대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어수선한 기억과 덧없는 생각이 본래부터 오락가락하던 생각을 흐트러뜨렸고, 롤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스로 정신을 차리도록 강요했다.


롤랑

해결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서는...적어도 루나 양을 다시 만나기 전에 기체를 보강할 곳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부서진 몸을 이끌고, 롤랑은 한 발짝, 한 발짝씩 지하수도의 벽을 짚고, 겨우 밖으로 나갔다.


롤랑

그래, 아직 걸을 수 있어.


롤랑

그래, 롤랑, 여기는 커튼콜에 어울리는 곳이 아니야.


한 걸음을 걷고 열 번을 쉬어도 좋다. 폐허 밖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어가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곁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여음이 귓가에 쟁쟁했다.



롤랑?(1)

...후회하고 있어? 처음의 선택을....



롤랑?(2)

...싫어하고 있어? 이 슬픈 말로가...



롤랑

...뭐 후회스럽고 싫은 점이 있긴 해. 참담해 보이지만 적어도 아까까지는 계획했던 대로였어.


롤랑?(1)

하긴 거짓으로 시작한 인생도 잠시나마 진실된 마음을 얻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네.


롤랑?(2)

다음 계획으로 나아갈 힘은 있어? 넌 아직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롤랑?(2)

봐봐, 넌 이제 일어설 수도 없어.


롤랑?(2)

왜 구조를 요청하지 않는 거지?


롤랑

시끄러워...


비록 그가 행동 능력을 잃었지만, 적어도 그는 다시 한번 바람을 느꼈다.


순환액이 빠져나가면서 감각이 하나 둘 차단되는 동안, 롤랑은 내면의 그늘에서 오는 비웃음을 힘없이 반박했다.


...구조체가 죽으면 전자천국이란 게 있을까?


하지만 자신의 귀환은 지옥이어야 마땅하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 이상 언제든지 떨어져도 상관없는 곳이 아니다.


롤랑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바로 그 때...


(어? 이건 뭐지?)



혼미하게나마 생각을 이어나가던 와중에, 롤랑의 눈앞에 희미한 백반(白斑)이 나타났다.


백반은 서서히 커졌다ㅡㅡ아니, 그것은 커진게 아니다. 백반은 롤랑에게 다가오고 있다.


롤랑

(...?)


롤랑의 곤혹스러움은 아주 잠깐 동안 지속되었고, 뒤이어 그는 웃었다. 적어도 그는 자기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롤랑

(이런 '의식의 바다 손상'에 대해서는 전부터 들어봤지만, 내가 죽어가는 바람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건 좀... 우스꽝스럽구만.)


롤랑

(이런 광경을 가브리엘이 보았다면 아마 기뻐했겠지.)


롤랑

(하지만 언젠가 천사가 나를 데리러 올 날이 있을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야.)


백반은 아직도 롤랑의 시야에 접근하고 있었다. 보기에는 느리지만 아무도 막을 수는 없다.


롤랑

(...정말 천국이라는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롤랑

(지옥이라면...이 색깔의 지옥은...아마도 괜찮을거야...)


백반이 부드럽게 롤랑의 시야를 덮자, 롤랑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람 소리, 모래와 자갈이 구르는 소리, 장작이 불길 속에서 터지는 탁탁거리는 소리가 마치 먼지투성이가 된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기 시작한 것처럼 그의 귀에 들려왔다.


롤랑

...?


그러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


텐트다.


롤랑의 시야에 나타난 것은, 몇 개의 나무 막대기가 교차하여 지탱한 낡은 천막이었는데, 겨우 텐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천막은 낡았지만 의외로 눈에 띄는 흠은 없고, 다만 바람이 자잘한 찢어진 구멍으로 들어와 웅웅 소리를 낼 뿐이다


그리고 롤랑은 천막 아래에 누워있었다.


롤랑

...이건?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면서 롤랑의 몸이 다시 통제권을 회복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오른손을 들려고 하자, 성공했다.


롤랑

이게...뭐지?


자신의 원래 손과는 다른 구조,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만 다른 모습이었다.


의혹을 품은 롤랑은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만지려고 했다.


그리고 왼손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롤랑

도대체 나는...


점점 깊어지는 의혹을 품은 채, 롤랑은 일어나 앉았다.


낯익은 낫총이 자기 곁에 놓여있는 것을 본 롤랑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집어들었다.


낫총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익숙한 무기를 쥐고 있자, 롤랑의 생각도 조금 안정되었다.


롤랑

누가 되었든...지금 나에게 적대적이진 않은 것 같군.


롤랑

적어도 두 마디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텐트 천을 걷어 젖혔는데....


???

응? 일어났어?


롤랑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창 타오르는 불더미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었다.


롤랑이 잠에서 깬 것을 보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는 롤랑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후드가 씌워져 있었고 후드 밑에서는 희미하고 묘한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

일어났어?


롤랑

...당신은, 자비로운 자?


자비로운 자

...요즘 자기소개 할 기회가 많아진 것 같네.


얼굴이 반쯤 가려진 여성은 다소 곤란하기라도 한 듯 가볍게 웃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비로운 자

응, 그들은 나를 '자비로운 자'라고 부르지.


자비로운 자는 롤랑의 물음에 시원스럽게 대답했는데, 그녀의 얼굴 표정은 여전히 물처럼 평온하였다.


롤랑

난 널 알고 있어.


롤랑

'아군과 적수,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적성에 맞는 자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한번 더 준다'고 하는 대행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


적어도 롤랑 아는 범위 내에서는 이 대행자만이 그렇다.


비록 '수리'보다는 '리모델링'에 가깝지만.


그는 천천히 손목을 돌려 몸의 모든 곳이 처음처럼 멀쩡한 것을 확인하였다.


롤랑

왜 살려줬지?


자비로운 자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의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떠올려.


자비로운 자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금기의 연구가 진리에 닿지 않거나, 세계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든가...


자비로운 자

'마침 오늘 날씨가 좋아', '오늘 아무렇게나 따온 풀잎으로 달인 허브차가 의외로 달달했어', '끌고 온 쥐가 귀여운 것 같아'


자비로운 자

...'그럼, 한번만 더 그에게 기회를 주자'


자비로운 자

그래서, 허브티 마셔볼래? 오늘 이 잔도 의외로 달콤해.


자비로운 자는 방금 마시고 있던 도시락 속의 차를 한 잔 따라 롤랑에게 내밀었다.


강요도, 회유도 없이, 자연스레 그녀의 페이스에 따라가게 만들었다.


롤랑은 자신도 모르게 기이한 향기가 풍기는 잔을 받아들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비로운 자

하지만…내가 구한 아이들 중에서 넌 가장 특별한 반응을 보여줬어.


롤랑

네가 여기 있는 걸 아니까


롤랑

'자비로운 자'


자비로운 자

...음.


롤랑

'아군과 적수,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적성에 맞는 자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한번 더 준다'


그렇다, 그때의 헛된 수색이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는 어둠 속을 유유히 헤쳐가는 모습을 보았고, 우연히 알파를 향한 그녀의 자기소개를 듣게 되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단순 보강으로는 치유할 수 없고, 그때 알파를 불러봤자 소용이 없었다.


롤랑

나는 '구조 요청'을 했지만, 네가 과연 응답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었어.


롤랑

지금 보니, 내기를 잘한 것 같네.


여성은 의아한 듯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자비로운 자

총명한 아이구나.


자비로운 자

허장성세의 거짓말이라도 이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니.


롤랑

아무래도 난 황금시대 말기 최고의 명배우였으니까.


롤랑은 웃으며, 마치 그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과장된 커튼콜을 하였다.


롤랑

오해하지 마.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


롤랑

내 목숨이 이대로 끝나면 세상은 재미없어질 것 같았거든.


롤랑

그건 너무 딱한 상황이야. 특히...내가 해야 할 일과 관련해선 더더욱 그렇고.


자비로운 자

그 하얀 아이를 위한 거니?


자비로운 자

'루나'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


자비로운 자

그녀는 실종됐지만 그녀가 너에게 준 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


스치듯이 가볍게 읊은 그 말에서 마치 이것이 그녀에게 있어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롤랑은 루나의 이름을 듣고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손에 든 낫총이 예전보다 3분의 1 더 무거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롤랑

내 삶을 들여다 본 거야? '대행자'?


자비로운 자의 말에 롤랑은 문득 경각심을 느꼈고, 그의 손가락은 이미 살그머니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놓았다.


역시 본 건가? 뭐 아무렴 어떤가? 대행자로서, 이것은 그녀나 루나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다.


더구나 지금, 이 모든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롤랑에게 있어서, 이것은 분명 나쁜 일은 아니다.


자비로운 자

응, 봤어.


자비로운 자

보아하니…너는 여전히 그 아이들처럼 막막한가 보네.


롤랑

그리고?


자비로운 자

이것은 네가 나에게 물을 문제가 아니란다.


롤랑

?


자비로운 자

그리고? 어떻게 할 거야?


롤랑

묻는 사람은 나야.


자비로운 자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자비로운 자

만약 내가 방해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곳을 떠나도 좋아. 혹은 날이 밝으면 나는 이곳을 떠날게.


롤랑

...널 믿을 수 있을까?


자비로운 자

...피식.


자비로운 자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가볍게 웃었고, 곧이어ㅡㅡ


자비로운 자

안될 거 뭐 있어?


그러자 롤랑은 자비로운 자가 왜 웃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롤랑

...그래, 안될 건 없잖아?


아무래도 상대방은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사람... 아니, 세 번째 기회다.


당장 자신에게 도움을 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 바로 눈앞의 자비로운 자뿐이고, 설령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 수 있는 기회는 이때 밖에 없다.


롤랑은 갑자기 마음이 풀린 듯 입을 열었다.


루나 양에 관한 일, 알파에 관한 일, 몇 명의 승격자가 마지막에 뿔뿔이 흩어진 것에 대해서.


그러나 자비로운 자는 듣고만 있을 뿐, 이따금 머리를 숙여 푸른 허브티를 한 모금 홀짝였다.


...


롤랑의 말이 일단락되고 나서야 자비로운 자는 빈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자비로운 자

누가 허브티를 맛있게 만들었을까.


롤랑

...


롤랑

...그래, 누가 허브티를 맛있게 만들었을까?


롤랑의 손은 어느새 움켜쥐던 것에서 느슨해졌고, 그의 눈빛은 약간 부드러워졌다.


자비로운 자

사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롤랑

?


자비로운 자

어쩌면 넌 '자신'이라는 개념을 무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롤랑

...이해하지 못했어.


자비로운 자

나도 이해해줄 수 없어.


그런 뒤 자비로운 자는 모닥불 속에 몇 조각의 얇은 나무 조각을 집어넣으려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가져올 만한 것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비로운 자

...장작을 주우러 간 아이는 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까.


롤랑

동료를 두고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비로운 자

...두고 있는게 아니야. 마침 그 아이와 같은 곳에 있을 뿐이었어.


자비로운 자

그리고 그녀의 발은 나보다 훨씬 더 빠른 것 같아서 그녀에게 사소한 일을 부탁했지.


자비로운 자

아, 돌아온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불을 다시 켜야 할지도 몰라.


바스락거리는 발자국 소리 후, 헝겊으로 땔감을 한 묶음씩 끌어당긴 라미아가 롤랑과 자비로운 자의 앞에 나타났다.


자비로운 자

그래, 구했구나. 돌아왔니.


라미아

이것밖에 못 찾겠어요...이익ㅡㅡ


롤랑

...어째서?


롤랑과 라미아가 서로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라미아는 거의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몸을 돌려서 도망치려고 했다.


자비로운 자

앉아, 라미아


자비로운 자

남 앞에서 돌아서서 뛰어가는 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란다.


자비로운 자의 말에, 라미아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얌전히 몸을 돌려 다리를 꼬았다.


자비로운 자

응, 그래야 착한 아이지.


이어 자비로운 자는 롤랑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비로운 자

이 아이가 네가 다리 빼는 거 보고 도망가는 거 보면...너희들 아는 사이니?


롤랑

...그렇겠지?


자비로운 자

적이니?


롤랑

...동료야.


자비로운 자

정말 재미있게 됐네. 하지만 동료니까 일이 있으면 서로 잘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자비로운 자는 라미아가 내려놓은 땔감 더미에서 한 개비를 뽑아내어, 조금 부러뜨린 후,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자비로운 자

하지만 나도 말했지만 난 너와 우연히 같은 곳에 있을 뿐이야. 날이 밝으면 난 떠날 거야.


라미아

...


자비로운 자

...내가 이미 너에게 여러 번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면 넌 아직도 은신한 채 나를 따라올 생각이었니?


라미아

...!


자비로운 자

아마 너의 스텔스 능력은 공중정원이나 다른 승격자들을 속여 넘길 수 있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야.


라미아

...


라미아가 침묵하는 동안, 하늘가의 아침 햇살이 안개와 봉우리를 은은하게 찔러 천막에 가려진 그림자를 조금 더 어둡게 만들었다.


자비로운 자

동이 텄구나...그럼 나도 이만 가볼게.


자비로운 자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까 너희들 문제는 너희들끼리 해결하렴.


롤랑

...그럼 떠나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해도 될까?


자비로운 자

?


롤랑

어째서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자'라고 불리는 거지?


자비로운 자

...


자비로운 자

타인에게 부여받은 이름인데 왜 나에게 이 부여받은 이름이 그렇냐고 묻는 거니?


자비로운 자

모르겠어,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높아진 햇살이 숲길을 넘어 아직도 잔온이 남아 있는 모닥불 잔해를 비추고 있다


자비로운 자는 이미 떠났지만, 그녀는 천막을 걷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가져가지도 않았다.


롤랑과 라미아가 있는 이 텐트와 모닥불은 그녀가 가는 길에 '만난' 물건일 뿐이다.


롤랑

...


라미아

...


서로 침묵하는 모습을 지켜본 롤랑과 라미아는 오랜만에 재회했지만 두 승격자 사이의 분위기는 녹록지 않았다.


롤랑으로서는 라미아가 승격자의 작전에 잠시 빠져 있었던 것 같아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의심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라미아는 롤랑이 자신의 실종으로 자신을 의심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일만큼은 도저히 롤랑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라미아

...(어떡하지, 어떡해야 돼?)...


롤랑의 수법을 아는 라미아에게 눈앞의 롤랑은 예전과 다르게 보여도ㅡㅡ


ㅡㅡ그것은 '바로 그 롤랑'이었고, 라미아는 '바로 그 롤랑'의 수단을 알고 있다.


어쨌든 롤랑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롤랑

라미아.


라미아

에엑?!


롤랑

말해, 왜 나만 보면 도망치는 거지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