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순간 그녀를 뒤로 했던 수많은 나날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하늘색 눈이 있었다.



'엄마'

절...대...허락...못 해...


거대한 보모 기계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고, 전자음과 함께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의 원치 않은 동행은 마무리되었다.


사력을 다해 무찌르려고 했던 적은 침묵에 빠졌고, 밤비나타는 기체의 행동을 지탱할 신념을 잃었다. 바네사는 그제야 봉비나타의 기체가 심하게 손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능하다면 통제할 수 있을 때, 기체 손실을 가중시키는 전투 행위를 진작에 피했어야 했을 것이다.



베라

순환액관 몇 군데가 파손당해 즉각 교체가 필요하고 다리 부위 극판 역시 교체가 필요해.


베라

그런 표정 지을 필요는 없잖아. 이래 봬도 나는 보조형 기체라고.


베라

너는 여기에 남아서 인형과 딥링크를 유지하는 게 좋겠어. 먼저 그녀의 의식을 안정시켜. 나는 수송기로 돌아가서 응급 재료를 가져올 거야.


바네사

...그래.


베라의 하이힐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거대한 원형의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네사는 밤비나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대신해 전장의 퇴로를 끊었을 때 밤비나타가 자신을 돌봤을 때처럼.



밤비나타

주인님, 밤비나타는 아주 길고 긴 꿈을 꾸었어요.


밤비나타

꿈속에서 밤비나타와 주인님은 큰 집에 살고 있었고, 그 안에는 항상 실험실 가운을 입고 있는 엄마와 아빠가 있었어요...처음에 주인님은 밤비나타와 키가 비슷했었죠...


밤비나타

주인님이 밤비나타에게 낮잠 잘 때는 배를 덮고 자라고 가르쳐 주셨고, 커피를 마실 때는 어떻게 저어야 숟가락과 컵이 부딪히지 않는지, 머리를 어떻게 관리해야 더 어울려 보이는지 가르쳐 주셨죠...


밤비나타

주인님은 또 밤비나타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도 많이 해줬어요. 노력에 뒤따른 미망, 실망, 불만족... 밤비나타는 그들이 주인에게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들을 때마다 이런 감정을 당신 곁에서 쫓아내려고 했었죠.


밤비나타

주인님이 춤추는 모습, 잘 자라고 말하는 모습, 책을 읽는 모습...모르시겠지만, 밤비나타는 몰래 많은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언제나 주인님의 곁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려 했어요. 하지만…. 밤비나타는 어떻게 그렸어야 했을까요?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어떤 모습으로 소원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밤비나타

이런 꿈을 한 번 더 꾸게 된다면 밤비나타는 엄마 아빠에게 주인님의 곁에 서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고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밤비나타

밤비나타는 명령이 없어도… 아니, '말 잘 듣는' 것과 어긋나 버리는 것이 되더라도 그 뜻을 주인님에게 전하고 싶어요.


밤비나타

아직 못다 한 그림들...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그 위에 여백을 남기지 않았을 텐데...


바네사는 밤비나타가 자신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써 얼굴을 그늘에 숨겼다.


그녀는 순간 그녀를 뒤로 했던 수많은 나날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하늘색 눈이 있었다.


누군가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바라봐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외로움이 더 이상 자신을 홀로 좀먹지 않기를, 자신의 정서를 제대로 느껴주기를 바란다.


그런 기대를 안고 첫발을 내디뎠는데 왜 그 눈은 더 이상 나와 마주치지 않는 걸까.


기댈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더 나아가 '패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에 떠느니 차라리 주도권을 이용해 상대방의 모든 것을 무조건 자신의 지배 하에 놓는다ㅡㅡ그러면 그 시선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다.


지름길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뒤, 마침내 한참을 기다려왔던 답이 뒤늦게 찾아왔다.



아시모프

음, 어제 오후 생명의 별에서 온 이후로 우리는 계속 그녀를 관찰해 왔어.


아시모프

중간에 몇 번 깨어났었고, 로사가 의식 교정을 해줬지. 지금까지의 결과로 미루어 보아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는 이번 부상으로 인한 의식의 바다 이화(异化) 현상이 크게 악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돼.


바네사

이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아시모프

너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지상에서 존재하는 기억 데이터를 역추적했고 적의 기계체에 의해 제어당했다고 했었지?


아시모프

보통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는 이로 인해 어긋나거나 서열이 흐트러지거나 의식 데이터가 잔존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밤비나타의 현재 상태는 평상시와 거의 같아.


아시모프

손상의 대부분은 역원장치의 손상에서 비롯되었고, 별다른 후유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시모프

너의 보고와 우리가 얻은 자료에 의하면, 개인적으로 기계체의 '제어'행위는 실제로 그 자체의 실험기능에서 변천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너희들이 회수한 전자뇌에 실제로 완전한 실험 조작 기록 및 조작 계통 코드가 존재했고, 너희들이 받은 공격 행위와 유사하다는 것이 바로 증거지.


아시모프

기억 역추적은 역원장치와 의식의 바다가 아주 짧은 시간에 고농도의 퍼니싱 바이러스의 충격을 받아 생긴 급성증상으로 보여.


아시모프

어쩌면 밤비나타가 과거에 그 실험에 참가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여기까지 이르자 아시모프도 자신의 목소리를 낮출 수 없었다.


아시모프

밤비나타의 역원 장치에 기계체가 간섭했을 때 모종의 실험 반응이 잘못 촉발된 거야.


아시모프

역원 장치를 복구한 후에 합병증 현상이 함께 사라진다면 참 다행이라 할 수 있지.


바네사

이번 임무의 메모리 데이터는 외장 메모리 모듈에 기록되어 있나요?


아시모프

유감스럽지만, 아니야. 구조체가 적에게 조종당했다는 것을 알고 밤비나타의 외장 메모리 모듈의 캐시값을 포맷해버렸어. 들은 바로는 임무에 참가한 또 다른 케르베로스 대원도 검열당했다는 설이 돌고 있다지.


바네사

포맷? 누가 시킨 거죠?


아시모프

...


바네사

...쳇, 아마 그 사람만이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겠죠.


아시모프

포맷하기 전에 나는 기계체의 전자뇌에 있는 데이터를 해석한 후, 구조체의 기억상실증에 유용한 것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데이터 스냅샷을 수집했어.


바네사

듣자 하니, 회수 물품이 당신 쪽으로 왔다고 하더군요?


아시모프

그래, 다른 문제가 없다면 돌아가서 다시 샘플 분석을 해야겠어.



세리카

아시모프 씨? 실례합니다. 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


세리카

하산 의장님이 회의실에서 한 번 와주셨으면 해서요.


아시모프

...알았어. 지금 갈게.


아시모프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들고 관찰실을 떠날 준비를 했고, 두 발짝 나아가다 뒤로 돌아서서 바네사에게 안쪽 방의 문을 가리키며 그 안에 누워 있는 밤비나타를 데리고 나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바네사

밤비나타, 가도 돼.


주인의 부름에 휴면 중인 구조체는 바로 눈을 떴다.



밤비나타

네, 주인님.


바네사

오늘 다른 일은 없으니까 이따가 직접 휴게실로 돌아가.


밤비나타

...


바네사

왜?


밤비나타

밤비나타가 임무 중에 뭔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외장 메모리 모듈에 있는 데이터는...주인님의 조작 기록이 아닙니다.


바네사

아무 일도 없어. 네가 깨어나기 전에 외장 메모리 모듈을 한 번 손봤을 뿐이야.


밤비나타

...그런데...


바네사

아무 일도 없어.


바네사

쓸데 없는 생각 하지 마.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다 아니까.


밤비나타

알겠습니다.



베라

...


구조체 병사

...


베라

...


구조체 병사

...


베라

즉, 나를 감시해야 한다는 거네. 딱히 이견은 없어. 그런데 내 눈에 띄지 않으면 안 될까?


베라

요 며칠동안 통 움직이지 않아서 지금 사람들을 볼 때마다 몸이 근질근질해 죽겠거든.


베라

...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

...



니콜라

너희들은 복귀해라.


두 구조체 병사는 명령에 따라 방을 나갔다. 견고한 문이 다시 닫히자 베라는 마침내 편안한 자세로 앉아 맞은편에서 통신하는 자가 현 정세에 대해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니콜라

검열은 이미 끝났다. 너의 의식은 이 전투로 인한 후유증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다.


베라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겠지.


니콜라

그런 셈이지. 하지만 필요한 절차는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베라

...하하, 그래?


베라

내가 쿠로노와 사적으로 접촉할 리도, 그럴 기회도 없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니콜라

이제부터는 할 수 있다.


베라

무슨 뜻이야?


니콜라

이제부터 너의 모든 사적 접촉은 특별히 허락된 것으로 간주되며, 만약 두 개의 작업 로그가 필요할 경우 그 중 하나를 암호화된 채널을 통해 나에게 직접 전송할 수 있다.


니콜라

그동안 '필요한 절차'가 있을 수 있지만, 특별히 케르베로스 소대원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마.


베라

당신이 추가로 약속한 그 물건은?


니콜라

두 가지가 있다. 암호화 통신에서 말했듯이, 네가 회수물품을 제출하기 전에 처리해 준다면, 나는 자연히 다음 단계의 준비에 착수할 것이다.


니콜라

과학 이사회가 보고서를 완성하면 결과는 곧 판가름이 나겠지.


베라

...알겠어.


베라

쿠로노 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늘 혼자서 처리해 줄 수는 없다고.


니콜라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다. 누가 미끼를 던질 때 너는 '낚일' 책임만 있으니까.


니콜라

분명히 말해두지, 이제 공식적으로 너에 대한 검열은 끝났다.



구조체로서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베라는 여전히 손바닥에 휘둘리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휴게실에서 소란을 피우며 복귀를 기다리던 두 사람을 생각하면, 이번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것도 마냥 헛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바네사

어? 이게 누구야? 잘난 체하는 베라 대장이잖아. 검열심사는 꽤나 힘들었겠지?


베라

대원을 따라 지상임무를 하겠다고 고집부린 청정백로 지휘관 아니신가? 그 인형에 대해서 넌 언제나 변함없는 관심을 보여주고 있구나. 심지어 디버깅까지 친히 봐줄 줄이야.


바네사

다루기 좋은 장난감일 뿐이지. 다음에 새 사랑스런 장난감을 얻기 전에 이틀 정도 가지고 놀 수는 있잖아?


베라

그래?


베라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인형을 잃어버렸을 때 초조했던 나머지 그만 입이 비뚤어진 모양이네. 그 예쁜 얼굴에 그런 멋진 표정을 볼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베라가 조롱하자 바네사의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그녀가 다음 반격에 나서기 이전에 베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사래를 치며 '너희들의 멋진 주인과 하인 연기를 보여줘서 고마워. 행운을 빌어, 귀한집 아가씨'라고 하면서 인사를 마무리했다.


바네사는 노여움을 달래듯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 눈을 뜨고 가볍게 웃었다.


바네사

...하, 피차일반이야. 너 같은 구조체와 비교하느니 차라리 말을 아끼겠어.


양 쪽 모두 가차없었지만, 밤비나타는 공기 중에 날이 서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다소 어색한 암묵적 이해가 느껴졌다.


바네사

밤비나타, 가자.


밤비나타

네, 주인님.



앙증맞은 인형이 주인과 같이 걸음을 맞추며 세 개의 현관을 지나 청정백로의 휴게실로 돌아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두 사람의 모습이 앞뒤로 반사된 벽에 비친다.


앙증맞은 인형이 주인과 같이 걸음을 맞추며 시종일관 앞에 있는 주인을 쫓는다.


그 몸이 여전히 그녀에게 필요하다면, 그 이름이 여전히 그녀에게 불려지는 한.


밤비나타는 어떤 내일이 반복되더라도 공백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