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신으로 <아스가르드>로 향했다. 제 3자가 봤을 땐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결정이었으나,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허리가 . . . 아작났다.

- 아직도 머리가 울리는군. 미안하지만, 이번엔 불참하겠다.


떨떠름한 표정들. 그 가면 속에 숨겨진 진심을 나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연속 두 번은 힘들다' 라 . . . ]


확실히, '별자리의 연회 습격 사건'이 벌어진 지 일주일도 채 안 됐다. 소진한 개연성도, 진체를 유지하기 위해 쏟아부은 격도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 


그런 놈들을 좋은 성유물 하나 얻겠다고 갈아 넣는 것은 정말 어리석인 짓이었다. '보물 쟁탈전' 시나리오가 팀전이긴 하지만, 팀이 없는 경우 관리국이 임의로 지정한다고 하니 굳이 다같이 갈 이유도 없었다.


-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요.


무엇보다 진짜 목적인 도박에는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나는 <게티아>들의 질린 눈빛과 그리고리의 걱정어린 눈빛을 받으며 느긋하게 <아스가르드>로 출발하게 된 것이었다. 


[포탈이 작동합니다.]


장거리 포탈은 <아스가르드>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다주었다. 눈을 뜨자 새로운 무대가 나를 맞이했다.


[이곳 풍경도 나름 괜찮군요.]


전에 방문했던 <에덴>이 목가적인 풍경화라면, <아스가르드>는 몽환적인 추상화에 가까웠다. 사방을 뒤덮은 물안개와 그 사이로 내비치는 오색찬란한 광휘. 


홀린 듯 걸음을 이어나가자, 멀리서 광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광원은 긴 다리를 이루고 있었으며, 도합 3개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색들이 서로 얽혀 자아낸 무지개다리 위로, 한 성좌가 우뚝 기립해 있었다.


큰 뿔 다리의 수호자.

진명은 해임달.

'비프로스트'의 수호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수식언을 말해주십시오.]


엄중한 진언에 나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 이번에 <아스가르드>에서 열리는 시나리오에 참석하러 왔어요.]


내 수식언을 들은 해임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직까진 내게 엿을 먹어 본 적 없는 성운의 성좌가 이렇게나 동요할 정도면, 내 악명이 '스타스트림' 전역에 널리 퍼진 듯 싶었다.


어째 원작보다 더 미친 마왕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아 입안이 씁쓸했다. 


[ . . . 확인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물론 악명이 강하다고 시나리오 참여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기에, 나는 빠르게 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비프로스트에 발을 올리자 작은 스파크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바닥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상당히 고전적인 방식이라 신기했다. 


[북유럽판 무빙워크인가요?]


색깔이 좀 독특하다는 점만 빼면 지하철역에 있어도 별 위화감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아스가르드>의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여분의 시간을 확보한 상황. 이는 다시 말해 성류방송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츠츠츳.


화면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 야, 누가 더 빨리 체력 100레벨 찍는 지 내기할래?

- 뭐 걸고?

- 2만 코인. 

- . . . 받고 3만 코인. 어때?

- 콜.


건전하게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다른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맘 편한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이질적인 '낙원'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낌새였다. 


특히 '낙원'의 진실을 알고 있는 김독자와 유중혁은 각자의 방식대로 낙원을 부수려 궁리 중이었고. 한수영은 랭킹작이 한창이었다.


나는 조만간 있을 키메라 드래곤 획득 이벤트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 게 좋을 지 고민하다가, 거대한 문이 눈앞에 나타났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문을 지키는 경비원은 없었는데, 아마 아스가르드에 진입하는 유일한 길목을 해임달이 수호하고 있어, 정문의 경계는 다소 소홀한 것 같았다. 


끼이이익.


완벽하게 반으로 갈라진 문을 통과해 성운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등장한 황금성에 탄성을 흘렸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성. 사면이 황금으로 칠해진 덕에 성은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도 별빛을 반사하여 도시 전역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저걸 다 팔면 얼마가 나올까. 양산형 제작자 마냥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익숙한 진언이 들려왔다.


[크큭. 성유물이라. 과연 이 몸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군.]


저런 중2병 발언을 입에 달고 사는 성좌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지. 진언이 들린 쪽으로 향하자, 성좌들이 집결한 공터 구석에 익숙한 면면들이 보였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여기서 보네요.]


[어?! 뭐야. 네가 왜 여깄어?]


[그야 당연히 시나리오 때문이죠.]


얼탄 흑염룡을 제낀 샐리맨더가 내 품에 달려들었다. 주변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걱정 많이 했어 . . . ]


푸근한 열기를 느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언제나 화목한 흑운. 


느껴져서는 안 될 격이 느껴지는 것은 그때였다. 


츠츠츳!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신성.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헤일로 와 순백의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쟤가 왜 여기 있지? 

. . . 그보다 왜 나한테 점점 다가오고 있는 걸까?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대천사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늘 꿈을 꾸는 듯한 천사, 라파엘. 에덴 성좌들 중에선 거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한 그가 탄 구름이 절대악 성운에 접근하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나는 나를 보호하듯 둘러싼 흑운을 넘어 라파엘을 맞이했다. 


[배짱도 좋군요. 원래 이런 남자였나요?]


라파엘이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님.]


하긴. 이 히키코모리가 스스로 이런 귀찮은 일을 자초하진 않겠지.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한 개밖에 없다. 


[서기관이 시켰군요.]


[ . . . 다른 사정이 있음.]


메타트론이 시켰네.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 나는 메타트론이 라파엘에게 했을 법한 문장을 단어 형태로 나열해봤다.


감시. 감시. 감시 . . . 아무리 생각해도 답정너였다. 


대천사의 집요함에 한숨을 내쉴 찰나, 라파엘이 문득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님 나랑 같은 팀하실?]


[ . . . 네?]


잘못 들었나? 내 되물음에 라파엘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이유를 설명했다. 


[님을 벼르고 있는 성좌들이 많음]


[아마 그렇겠죠. 연회장을 뒤집어놓고 왔으니.]


[예전 같았으면 그들 중에 나도 있었을 듯.]


[후후, 그대와 내가 유난히 원수지간이긴 했죠.]


[근데 솔직히 님도 나랑 싸우는 거 이제 질리잖슴. 나도 같은 마음이라 제안하는 거임.]


라파엘이 구름에서 내려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예전보다 성숙해진 태도. 일순 눈빛이 더 강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메타트론이 시켜서 하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는 자기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겨 있달까. 


[선이 악의 손을 잡아도 괜찮은 겁니까? 각자의 진영에 반기를 드는 건데.]


[님은 애초에 님 ■대로 하잖슴.]


그건 맞지. 

빠르게 수긍하며 추궁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어쩌게요. 난 그렇다 쳐도, 그쪽은 상부가 발칵 뒤집힐텐데.]


[뒤집히라고 하삼. 내 알 바 아님.]


메타트론 혈압 올라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솔직히 개심했다지만, 워낙에 지은 업보가 많아 고생시키고 싶은 서기관이다. 


그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상상을 하며 웃음을 흘렸을 때, 사태를 관망하던 흑염룡이 갑자기 대화에 간섭했다. 


[야, 네가 뭔데 아스모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으르렁거리는 흑염룡.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라파엘의 눈썹 끝이 살짝 치솟았다. 


[묵시룡 후보자랑 할 말은 없음.]


그리고 내게 물었다.


['흑운'이랑 무슨 관계임?]


[소중한 친구들이예요.]


샐리맨더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었지? 그러니까 우리한테서 아스모 뺏을 생각은 하지도 마.]


[ . . . 님들만 친구임?]


[뭐?]


동시에 샐리맨더와 라파엘의 눈동자가 한쪽으로 쏠렸다. 피부를 뚫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에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괜스레 뻘쭘해졌다. 


그나저나 이걸 내 입으로 말하게 될 줄이야. 천 년 전 전장에서 날 선 반응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라파엘도 내 친구예요, 샐리맨더.]


[거짓말! 천사가 어떻게 마왕이랑 - ]


[내가 그깟 기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샐리맨더가 잔뜩 심술이 난 채, 팔짱을 꼈다. 라파엘은 표정 변화가 없다시피했지만,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이에 얼굴을 와락 구긴 흑염룡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는 누굴 선택할 거냐?]


[네?]


갑자기 '나야 아니면 쟤야'를 시전한 흑염룡. 어이없게도, 히키코모리 대천사 역시 내색은 안 하지만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재밌는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냥 다 같은 팀 하면 안 될까요?]


[뭐?]


[ . . . ]


나는 웃음을 참은 채 말했다. 


[양쪽 다 내 소중한 인연들이예요. 우열을 가릴 수 없죠. 나는 어느 한쪽을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안한 겁니다.]


방금한 말은 진심이었다. 양쪽 다 내가 이 세계에 녹아들 수 있도록, 끈끈한 관계를 맺어 준 은인들이었으니까. 나는 꾸밈없는 미소를 자아내며 답했다.


[친구끼리 싸우지 말자고요.]


그러자 선악의 이중주라도 열린 것처럼 으르렁 거리던 선악이 잠잠해졌다. 


절대악과 절대선이 무력 충돌없이 대화하는 진기한 광경에 주변 참가좌들의 이목이 쏠렸다. 내가 슬쩍 바라보니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지만. 


약간의 말미를 두고, 흑염룡이 투덜거리며 답했다.


[쳇. 알았어.]


나는 라파엘을 지그시 바라봤다. 대천사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마지못해 승낙의 문장을 뱉었다.


[동의함 . . . ]


그렇게 천사 하나와 절대악 둘. 선도 악도 아닌 마왕 하나가 모인 팀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열리는 장소로 향하는 게이트를 통과했다. 


나만 빼고. 


당황한 중급 도깨비가 내게 물었다.


[안 가십니까?]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서요. 탈락 수순을 밟을 수 있을까요?]


[ . .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런 일은 처음인지 말문이 막힌 도깨비가 입고 있던 거죽 속에서 메뉴얼을 꺼내 뒤적거렸다.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음, 알겠습니다. 대신 이미 진행 중인 시나리오에 간섭하는 것은 저희 권한 밖에 일이라 . . . 팀에서 탈퇴하는 것은 시나리오가 종료된 이후에 가능합니다. 물론 보상은 얻지 못하고요.]


[그렇게 하죠.]


내 승낙을 받은 도깨비가 허공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보물 쟁탈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고마워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며 지금쯤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친구들을 향해 웃음을 흘렸다. 


[후훗, 진정한 관계 진전을 위해선 친구의 친구와도 친해져야 하는 법이죠.]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나는 대로에서 벗어났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으나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그냥 구경하는 겁니다.]


길은 점차 좁아졌다. 어쩔 땐 미로처럼 복잡해지고,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처럼 중구난방하게 변했다. 


마치 그 끝에 있는 것을 숨기려는 듯이. 그러나 마기를 감지할 수 있는 내겐 무용지물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어이가 없군요. 어찌 됐건 그대들의 설화 아닙니까.]


그리고 어느 기점을 넘어선 순간, 안개가 싹 걷혔다. 동시에 드러난 공터. 외딴 섬처럼 외부와 괴리된 그곳을 기리듯, 잡초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파삭.


나는 시든 풀을 밟으며 공터 중앙에 있는 낡은 게이트로 향했다. 삭막한 풍경이 마치 <명계>를 연상케 하는 이곳은 또 다른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스스스.


그대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풍경이 위로 솟구쳤다.


그 밑바닥에, 죽은 자들의 세상이 있었다. 


[헬헤임.]


차갑고 시린 공기를 들이마시며 엄숙한 세계를 관망하고 있을 무렵, 마차가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마부가 정중하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 게임에 참여하기에 앞서 이걸 착용해주시길."


마부가 건넨 것은 가면이었다. 

정확히는 인식저해 효과가 있는 아이템. 


[익명으로 진행하나요?]


"그렇습니다. 호스트님께서 원하시는 지라, 무례를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아, 그리고 동승자가 있는데 혹시 괜찮으실지."


나는 가면을 쓰며 답했다.


[상관없어요.]



이에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한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아 탑승한 실내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빛바랜 금발은 볼 수 있었다. 


" . . . "


내가 자리에 앉자 마차가 출발했다. 나는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궨 채, 멍하니 밖을 응시했다. 


동승자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만나서 영광이예요, 마왕님."


[변신]스킬로 뿔과 날개를 숨겼음에도, 마기를 거두었음에도, 그녀는 나를 마왕으로 칭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렇게 도발을 걸어오는 대담함에, 나는 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화신이 참여한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자격만 있다면 못할 건 없죠."


[하긴. 아스가르드의 '예언자'라면 성운이 뒤를 봐줄 테니 가능하겠군요.]


". . . 이미 다 알고 계시는군요."


살짝 당황하다가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은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한쪽 눈에 이식된 대악마의 눈동자가 창문에 반사됐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안나 크로프트 입니다."


전직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웹툰도 그 장면이 얼마 남지 않았어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