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만든 작은 세계에 숨어, 자신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곧 시작될 멸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김독자.

 장대한 '멸살법'의 세계를 살아갈 김독자.

 자신이 동경하던 주인공을 만날 김독자.


 밤하늘의 '별'이 될 김독자.


 [당신의 정신력이 붕괴합니다!]

 [본체가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습니다.]

 [당신의 설화가 소멸합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팔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몸은 점점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말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가 태어난 것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앞으로 네가 겪을 일들은 결코 너의 죄가 아니라고.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자랐지만, 이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간신히 뻗은 그녀의 손끝이 김독자의 어깨에 닿았다.


 [당신의 자아가 '잠재의식'으로 화합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겠지.'


 앞으로 그녀는 3회차의 몸으로 김독자와 함께할 것이다.

 비록 그는 알지 못하겠지만 모든 힘을 다해 그를 도울 것이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량의 개연성이 지불되었습니다.]

 [당신의 설화가 재생됩니다.]


 생생한 육체의 감각.

 팔다리가 가벼워지고 이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개연성의 제약이 약해져 당신의 활동 시간이 낮까지 확대됩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한수영은 이해하지 못했다.


 "도깨비왕."

 "아무래도 개연성의 영향으로 유료화의 시작이 늦어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설화의 움직임으로 봐선... 한 달정도 같습니다."

 “한 달... 그거면 충분해.”


 주어진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한수영은 자신을 위해, 또 김독자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

 “김독자 씨, 지금 바쁜 거 없지?”

 “네. 금방 마무리됩니다.”

 “그럼 이따 잠깐 미팅 좀 다녀와. 소설작간데, 게임화 계약이야.”

 “그걸 왜 저한테... QA팀의 업무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도 알지. 근데 작가 쪽에서 소설에 대한 이해가 좋은 사람으로 보내달래. 여기 다 개발자들인데 소설같은 걸 읽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갔다 와. 혹시 잘 되면 정직원 되는 데에도 도움될 거니까.”

 “그래도 혼자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누가 혼자래? 인턴 혼자 보내는 정신나간 회사가 어딨어? 당연히 사수가 같이 갈 거야. 준비해.”


 괜히 머쓱해진 김독자는 하던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김독자 씨,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하죠.”

 사수의 말에 김독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수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회사 근처의 한 카페였다.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작가와 매니저인 듯 했다.


 우리는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미노 소프트의 유진철이라고 합니다.”

 “김독자입니다.”


 “이분이 작가 한수영 씨고 저는 담당 매니저 전민서입니다.”

 “반갑습니다.”


 미팅은 한 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럼 이대로 진행하고 세부 사항은 나중에 다시 정하시죠.”

 “좋아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복귀하지 말고 바로 퇴근하지.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김독자는 집으로 돌아와 ‘멸살법’을 켰다.

 오늘 에필로그가 업데이트된다고 했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된 김독자는 댓글을 남겼다.


 — 에필로그가 업데이트되지 않아 댓글 남깁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요?


 10분, 20분을 기다려도 답글이 달리지 않았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10년을 넘게 연재했는데 하루 쯤 쉴 수도 있는 거고.’

 라고 생각한 김독자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메시지가 울렸다.


 — 김독자 씨 번호 맞나요?

 —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 오늘 미팅한 한수영입니다.

 — 아, 작가님이셨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김독자는 늦은 시간에 업무에 대한 연락을 싫어했지만 이미 답장을 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 게임화 관련해서 더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내일 시간 되시나요?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주말에 업무라니 끔찍하게도 싫었다.


 — 그거라면 저보다는 같이 봤던 대리님한테 연락하시는 편이 수월하실 겁니다.

 — 아니요, 소설에 대한 이야기라면 김독자 씨가 낫습니다.


 딱히 변명을 생각하지 못한 김독자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네. 몇시에 보실까요?

 — 12시에 오늘 봤던 카페에서 만나죠.




 *

 김독자는 약속시간보다 5분쯤 늦게 도착했다.

 혹자 작가에게 답글이 달리지 않을까 잠을 설치다 늦잠을 잔 탓이었다.


 “헉 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별로 늦지도 않으셨어요.”


 가볍게 웃어보이는 한수영의 얼굴을 보며 김독자는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저기요?”

 “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소설에 관한 시덥잖은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김독자는 이 대화가 업무라는 생각을 잊고 어느새 친구와 대화하듯이 편한 모습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점심 드셨어요?”

 “하하, 늦잠자서 급하게 오느라...”

 “같이 먹을래요?”


 평소였으면 당연히 거절할 제안이었다.


 “그러죠.”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

 몇 번을 더 만나면서 둘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얼마 전까지 업무를 위해 만난 사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김독자,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보러갈래?"

 "그래. 다음주 토요일에 보자."


 어느새 둘은 반말을 하고 있었고 둘을 모르는 사람은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유료화까지 일주일 남짓 남은 때였다.


 "있잖아 수영아."

 "뭐야, 징그럽게. 어디 아프냐?"


 김독자는 멎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널 만나고 내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원래의 김독자에게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밝은 모습, 그 모습을 지금의 김독자에게선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고마운줄 알면 더 잘 해."


 김독자는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김독자, 잘 들어. 지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넌 별이 될 거야. 비유가 아니라 진짜 하늘에 떠 있는 별."

 "...... 죽는다는 의미는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아, 한 번 죽기는 하겠다."

 "뭐?"

 "암튼 난 너의 그림자가 돼 줄게. 별을 더 밝게 하는... 우주라고 할 수 있겠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고맙네."


 그때 누군가가 달려왔다.


 "신이ㅅ..."

 한수영의 눈빛이 담고 있는 말을 알아챈 것인지 달려온 사내는 말을 고쳤다.


 "아, 수영아. 일이 급해졌다."

 "무슨 말이야?"

 "잠깐 이리로..."


 도깨비 왕은 작은 창을 보여줬다.


 [설화의 붕괴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밀려올 개연성의 후폭풍을 대비하십시오.]

 [남은 시간 : 15분]


 "개연성 후폭풍...? 그때 다 지불된 거 아니었어?"

 "스타스트림의 탄생을 미룰 정도의 개연성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도 안되는... 그럼 김독자도?"

 "아마 그럴 겁니다."

 "쟤 지금 설화는 커녕 변변찮은 스킬 하나도 없는 몸이라고! 볼 것도 없이 죽을게 뻔한데... 방법이 없어?"

 "한 가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기억을 지우는 겁니다. 신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결정을."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이시여."

 "......"


 [남은 시간 : 5분]


 "지워야...겠지."

 "저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김독자를 위한다고 생각한 일이 되려 김독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한수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남은 시간 : 1분]


 "신이시여, 결정을..."

 "...... 지워."

 "알겠습니다."


 김독자는 나와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을 것이다.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도 잊고 예전의 소심한 김독자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고 너를 지켜볼 거야.

 너라는 별을 밝게 하는 우주가 되어,

 네가 바라는 밤하늘을 만드는 걸 도와줄게.


 그렇게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그동안 즐거웠어. 그리고, 고마웠어.

 안녕, 나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