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보고와야 이해될거야


12. 전지적 독자 시점


[메인 시나리오 # 99 — ‘이야기의 적’ 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완료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인원 모두에게 ‘성유물 선택권’ 과 ‘설화 선택권’ 이 부여됩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크게 놀랍니다!]


[당신은 ‘이야기의 왕’ 을 만날 자격을 얻었습니다.]


많은 알림창이 떠올랐지만, 그걸 읽을 새도 없이 누군가가 내 멱살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지혜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녀의 화신체에서 흘러 나온 분노와 원망의 설화가 내 전신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뭔데. 응? 이것도 계획의 일부야?”


이지혜에게서 느껴지던 바다의 기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지하철에서 소녀와 마주쳤을 때 불어오던 은은한 소금향을, 이제는 맡을 수가 없었다.


“김독자!”


이지혜가 울면서 나를 흔들었다.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유상아도, 정희원도, 신유승도. 모두 고개를 숙인 채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이 원망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이지혜.”


한수영이었다.


“이거 놔!”


어깨를 잡는 한수영의 손길에 이지혜가 거칠게 반응했다.


하지만 한수영은 그녀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완강한 손길로 이지혜의 앞머리를 넘기고,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으면서,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흑염룡도, 우리엘도, 이순신도 안 죽었어.”


“그걸, 그걸 어떻게 아는데.”


“느낄 수 있어. 희미하지만, 녀석들이 살아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고. 그리고.”


차갑지만 다정하고, 정확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 오직 한수영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눈물 닦고 똑바로 봐.지금 네가 멱살 잡은 놈이 어떤 상태인지.”


혼미한 눈으로 고개를 떨어트린 이지혜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이지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저씨가 울어……?”


내 멱살을 잡았던 손이 풀렸다. 그 틈을 파고든 한수영이 내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정신 차려, 멍청아! 제대로 설명해주라고. 너도 아무 생각 없이 여기까지 온 거 아닐 거 아냐!”


그 말은 거꾸로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반드시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엄포였다. 한수영이 물었다.


“배후성들을 구할 방법이 있는 거지? 그치……?”


그런 방법 따윈 없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 많은 성좌들의 불빛이 꺼졌지만, 자세히 보면 여전히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아주 오래 보아야만 어렴풋이 빛을 느낄 수 있는 별이었다.


김독자는 성좌들을 증오했다. 단 한순간도 그 감정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내가.”


하지만 이 세계의 시나리오는, 그런 김독자조차 변하게 만들었다.


나는 [최후의 벽]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모든 ‘설화’ 가 기록된 벽.


모든 도깨비들의 소망인 ‘단 하나의 설화’ 를 기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벽.


“너무 늦었을 수도 있어.”


이 모든 불행은, 저 벽에 기록되기 위해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저 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가능할 수도 있어.”


이미 일어난 일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영혼까지 소멸한 이들을 되살리고, 받은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일 따위 가능할 턱이 없다.


이미 멸망해버린 세계선을 구원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 세계의 빌어먹을 개연성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런 것은 한수영이 말했던 ‘네모난 원’ 과 같은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하다면.


‘네모난 원’ 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벽’ 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알림창이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 # 100 - ‘최후의 전투’ 가 시작됩니다.]



<메인 시나리오 # 100 - 최후의 전투>


분류: 메인


난이도: ???


클리어 조건: 초거대 성운 <카카오>와 싸워 승리하시오. 당신을 포함한 최대 3명이 함께 싸울      수 있습니다.    


제한 시간: -


보상: ‘소원권’ 1개.


실패 시: 이 세계선의 멸망.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모두를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난 이번 시나리오에 대해서 몰라.”


그 말에 가장 놀란 것은 한수영이었다.


“너, 다 읽었다며! 근데 어떻게 몰라!”


“이 장면이, ‘멸살법’의 마지막 장면이니까.”


사실이었다. ‘멸살법’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홀로 100번 시나리오를 받는 장면에서 끝났었다.


그래서 퀘스트에 대한 정보도 하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나는 ‘멸살법’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줄 알고 슬펐던 적이 있었다.


“형, 그럼 어떡해요?”


옆에서 이길영이 내 소매를 살짝 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신유승이 끼어들었다.


“정공법으로 가야지. 독자 아저씨랑 나랑 중혁 아저씨랑 갈거야. 이길영 넌 벌레나 채집하면서 기다려.”


그러자 일행 모두가 일심동체로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그러더니 일행들 모두 각자 떠들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내가 제일 쌔. ‘지옥염화’ 한 방이면 쓰러질 놈이 무슨. 넌 괴수랑 놀고 있어 ㅋㅋ.”


“아니요, 독자씨한텐 제가 꼭 필요해요. 망한 <에덴>보다야 <올림포스>가 낫겠죠. 희원 씨는 현성씨랑 롯데월드나 다녀오세요.”


…롯데월드는 망한지 오래일 텐데.


“갑자기 제가 왜 나옵니까. 이번엔 절대 독자씨를 잃지 않을 겁니다. 여자 두 분은 온천이나 다녀오시고, 올 때 삶은계란…”


듣다 못한 유중혁이 소리쳤다.


“다 닥쳐라. 나랑 김독자랑 한수영이 갈거다.”


난 당연히 데려갈 줄 알았는데 한수영은 왜…?


“너흰 시끄러워서 전부 탈락이다.”


아… 한수영이 한 마디도 안해서 그런 거구나.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러나 한수영은 [예상 표절]을 사용해 미래를 보느라 거의 탈진 직전이었다.


“예상 표절을 극한까지 썼는데도 미래가 하나도 안 보여. 어떡하냐?”


그 한마디에 일행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어쩔 수 없지. 하루만 쉬고 내일 바로 출발하자.”


우리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


집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아니, 이딴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지. 우리 일행은 인원도 많은데 당장 쉴 곳이 없다.


그러자 길영이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벌레들을 이용해서 집을 고쳐볼게요!”


마음은 기특하지만, 이런 곳에 쓰기엔 길영이의 능력이 아까웠다.


“괜찮아, 길영아. 우리 오늘은 캠핑 온 기분도 낼 겸, 텐트 치고 자자.”


“네놈 답지 않게 좋은 생각이군.”


“캠핑 하면 캠프파이어랑 바비큐죠!”


라고 소리치는 아이들 때문에 유중혁과 이설화는 요리를 시작했고, 이현성과 정희원은 장작을 구하러 갔으며, 나와 다른 일행들은 텐트를 쳤다.


이윽고 모든 일이 끝나자, 우리는 모닥불에 동그랗게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생각나네요. 독자씨가 땅강아쥐 구워줬을 때. 그때만큼 맛있는 것 같아요.”


유상아의 말에 기억을 떠올린 정희원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그때 저는 독자씨가 사실 신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었는데.”


“뭐, 저정도면 거의 신이죠.”


어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길영과 신유승은 또 티격태격했다.


“야, 신유승 넌 저때 없었지? 만난지도 얼마 안된게 자꾸 독자 형한테 붙지 마라.”


“흥, 난 독자 아저씨 화신이거든? 넌 일찍 만나서 뭐했나?”


“난 처음에 계약을 해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거든! 넌 배후성한테 관심도 못받은 게…!”


“덕분에 아저씨랑 계약을 했으니 좋은 거지 뭐.”


이러다 싸움이라도 날까, 김독자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말렸다.


“너희 아직 어린애잖아. 일찍 자야지. 내일 시나리오도 시작하는데.”


“저 41회차까지 따지면 아저씨보다 한참 어른이거든요!”


김독자는 웃으며 신유승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형! 저도요!”


유승이만 쓰다듬어줘서 화났는지, 이길영도 나한테 꼭 붙었다. 그러더니 둘은 금새 잠들었다.


잠든 아이들을 텐트에 눕혀주고 오자,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꺼내는 유상아가 보였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맥주도 팔았었나.


“이제 애들도 자러 갔으니까, 한잔 해야죠!”


“아직 안 자는 애가 하나 남았잖아.”


그러자 이지혜가 괜히 찔려서 소리쳤다.


“18살이면 충분히 컸거든? 나도 술 마실 거야!”


그러더니 맥주 캔을 확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캬아—”


금새 얼굴이 새빨개진 이지혜가 책상에 쿵 하고 쓰러졌다.


“어휴, 처음인데 맥주 원샷을 하냐.”


이번에도 또 내가 이지혜를 업어서 데려다 주었다. 애들보다 무거워서 낑낑대며 겨우 옮겼다.


이지혜를 놓고 오자, 일행들 모두 날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유중혁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함께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몇 잔을 마셨는지 기억도 안난다. 오랜만에 휴식이라서 마음이 풀어졌는지, 모두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이 상황을 즐겼다.


예상 외로 한수영이 제일 먼저 곯아떨어졌다.


일행들도 거의 다 맛이 간 상태였다.


유중혁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내가 다 옮겨야겠네…”


자신도 쓰러진 척을 할까 하고 고민하던 김독자는, 그냥 일행을 옮기고 편하게 자기로 했다.


정희원, 유상아, 이설화…


이현성은 옮기려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뭐, 유중혁 오면 알아서 해주겠지.’


그리고 난 마지막으로 한수영을 텐트에 옮겼다.


드디어 나도 쉴 수 있다는 기쁨에 휩싸여 자신의 침대로 가려던 그때.


“김독자.”


한수영이 김독자의 소매를 잡았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같이 자자”


“...수영아, 너 취했어.”


“그래서?”

 

한수영이 침대의 한 쪽으로 몸을 굴린 뒤 김독자를 바라 보았다.


“잠깐이라도 옆에 누워있어줘.”


뭔가 한수영이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잠깐만 들어주기로 했다.


“뭔데 그래.”


나는 한수영의 침대에 풀썩 누웠다. 바싹 붙은 어깨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거 기억나?”


[설화, ‘레몬 사탕의 추억’ 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뭐야, 너 이런 것도 설화로 갖고있었어?”


“내가 갖고 싶어서 갖고있던거 아니거든.”


술기운 때문인지, 한수영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내 소설 읽어주겠다고 했었는데. 잊은 거 아니지?”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어.”


“마지막 시나리오 끝나면 쓸거니까 기대해라.”


“그래. 표절은 안 된다? ㅋㅋ”


“표절 아니라니까!”


잠깐 투닥대던 둘 사이로 핑크빛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암흑성 때 우리 둘이만 히든 시나리오 하러 갔던 거 생각난다. 차 타고 있을 때 진짜 여행가는 기분이였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고 해도 알아챌 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


“……”


한수영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용기를 내서 말했다.


“김독자.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


드디어 하고싶은 얘기가 나오는구나, 하고 생각한 김독자가 집중했다.


“응.” 


“되게 맹한데 마음은 착하고, 머리는 잘 굴리지만 가끔 패주고 싶기도 하고, 또 가끔은 귀엽기도 한 사람이야.”


“아주 가끔은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이윽고 한수영이 조용히 입을 떼었다.


“김독자.  …좋아해.”




뒤에 어떻게쓸지 추천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