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는 초가을 9월의 어느 날,
김독자 일행은 저마다 기분 좋은 표정을 하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뭐 먹어?"
"글쎄? 카이제닉스 구에 파스타집 하나 생겼나는데."
"파스타요..? 파스타는 좀..."
"그럼 넌 먹지마 벌레새끼야."
한달에 한번, 매월 첫째 주 주말이면 김독자 일행은 일부러 조금 먼 거리로 외식을 나가곤 했다.
그 날은 각자의 사정으로 항상 같이 있기 힘든 김독자 일행이 유일하게 모두 모여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날이었고,
그들이 지켜낸 세계의 일상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한달에 한번있는 외식은 그들이 세계의 평화를 체감하기 위해 마련한 한가지 방법이었다.
"근데 중혁씨는 이번에도 못와요?"
이현성과 나란히 걷던 정희원이 앞서가는 이설화에게 물었다.
"네.. 아직 근신처분이 안끝났어요."
이설화는 뒤를 돌아보며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냈다.
유중혁은 범죄자였다.
그 이유야 어찌됐건간에 세계정부가 관리하는 시나리오 박물관을 습격한 테러범이었고,
그 날 유중혁이 사용한 각종 설화와 성흔덕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시나리오때의 악몽을 기억해야했다.
유중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겠다면 근신 처분이 아니라 징역을 살 정도의 흉악한 범죄였지만,
그가 시나리오 유공자라는 점, 그가 균열 수복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 그리고 안나 크로프트의 입김이 어느 정도 들어간 결과로
다행히도 유중혁은 징역을 사는 대신 5개월 간의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런 새끼는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돼!"
김독자의 손을 꼭 잡으며 그와 나란히 걷던 한수영이 말했다.
유중혁은 없었지만, 그들은 여느 외식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주말 오후의 나른한 감각을 여기저기 헤집으며
서로의 고된 일상으로부터 치유받고 있었다.
쾅----
"꺄아아악!"
하지만 그들이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큰 잡음이 새겨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김독자 일행들은 모두 동시에 쾅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움,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끄악!!"
총을 들고 경고하던 경찰이 괴한에 공격을 맞고 하늘을 날았다.
괴한이 서 있는 곳 아래에는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그의 주변 광장 바닥은 무엇에 강하게 충돌한 듯, 움푹 파여져 있었다.
쾅! 쾅!! 쾅!!!
그는 제 분을 못 참는 것 마냥 광장의 조형물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괴한은 작고 왜소한 체격을 가졌지만, 괴한의 주먹에 철제 조형물들은 블록 장난감으로 만든 모형마냥 힘없이 무너졌다.
그것은 분명 능력치의 힘이었다.
"뭐야, 코인이 어디서 난거지?"
"아직까지 남아있는 시나리오 생존자들이 암시장을 통해 비싼 값을 주고 판다고 합니다."
"누가 가서 좀 말려야 될 것 같은데요?"
김독자는 한숨을 푹 내쉬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김독자의 옆을, 누군가가 빠르게 지나쳤다.
163cm의 작은 키, 앞머리가 없는 갈색 중단발에, 귀여운 도톰한 볼살을 가지고 있는 한 아이.
"유... 유승아..!"
김독자는 자신을 빠르게 지나치는 신유승을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괴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 어떡하지?"
당황한 채 발을 동동구르고 있는 김독자 사이로 일행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담소가 끊이질 않았다.
"여러분, 유승이가 위험한 괴한한테 다가가는데 걱정도 안됩니까?!"
이지혜는 자신들을 향해 윽박지르는 김독자한테 말을 건넸다.
"아저씨, 유승이 걱정 안해도 돼. 다 컸어 이제~"
"야, 아무리 그래도..!!"
"형, 걱정 하지 말고 저기 좀 보세요."
"넌 뭐야? 죽고싶어?!!"
미소를 지으며 이길영이 가르킨 곳에는 괴한과 마주한 신유승이 있었다.
"아저씨. 사람들도 많이 다쳤는데, 이정도만 하고 끝내죠?"
"꼬맹이가 뒤질라고.. 안 꺼져?!!"
괴한은 주먹을 내지르는 척 하며 신유승을 위협했다.
"형, 신유승이 공부보다 더 잘하는 게 뭔지 알아요?"
"길영아.. 지금 그것보다 빨리 유승이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에이, 아저씨. 진짜 걱정 안해도 돼."
"한번만 더.. 꼬맹이라고 하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린다?"
신유승은 자신을 한껏 위협하는 괴한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너 뭐라고 했냐 꼬맹아?"
"내가 한번만 더 꼬맹이라고 하면 모가지를 비틀어버린다고 했지."
"이 새끼가 미쳐가지고.. 여자라고 안때릴 것 같아?!!!"
괴한은 자신의 큰 주먹을 신유승을 향해 빠르게 내질렀다.
"유, 유승아!!!"
김독자는 신유승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신유승을 향해 달려나가지 못했다.
신유승은 날라오는 괴한의 주먹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 손을 비틀어 바로 괴한의 손목을 고쳐쥐고,
한쪽 다리를 괴한의 가랑이 사이로 비집어 넣었다.
마치 괴한의 품에 안긴 듯, 그의 팔을 휘감고 들어간 신유승이, 비집어 넣은 다리로 괴한의 디딤발을 걷어찼다.
마지막으로 작고 아담한 자신의 몸을 따라 중심을 잃고 넘어가는 괴한을 향해 몸을 최대한 비틀어 괴한을 광장의 딱딱한 돌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쾅!!!!!
그 기술은 유도의 '허벅다리 걸기'였다.
"형, 신유승이 형 병원에 있을 때 공부보다 열심히 했던게 유도에요. 형 돌아오면 다시는 어디 못가게 다리든 팔이든 어디 한쪽 분질러버린다고. 와, 근데 저거 진짜 아픈데 저 사람 죽었겠다."
김독자는 떠드는 이길영을 향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김독자를 향해 이지혜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사부가 왜 유승이한테 꿈쩍도 못하는 줄 알아? 단지 유승이가 어려서? 아니면 과거의 대한 죄책감 때문에?"
깔깔대며 웃던 이지혜가 웃음을 멈추고 미소를 띄며 말을 이었다.
"무서워서 그래, 무서워서. 그러니까 유승이한테 잘해, 안그러면 아저씨 죽어. 진짜로."
김독자는 도저히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신유승과 괴한을 바라보았다.
신유승은 자신의 두 손을 털털 털며 정신을 잃은 괴한을 내려다보았다.
괴한이 내리꽂힌 바닥은 그의 공격으로 움푹 파여진 바닥보다 몇십배는 더 크게 움푹 파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