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란 보다가 끌리는 소재 있어서 써봄 ㅎㅎ
퀄 낮음 주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구원의 마왕. 계획이 있어요."
"안 돼. 성마대전의 희생자를 가장 많이 줄이려면, 내가 중립을 지키는 수밖에 없어. 겁쟁이라고 비난해도 좋고,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아."
전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어보이는 김독자의 모습에, 안나 크로프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 남자는 모르는 걸까.
'미래시'로 본 미래가 훨씬 정확하고, 신용있는 것을.
"구원의 마왕. 당신이 중립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있다고요."
"..."
"좋아요, 듣지 않는 것 같으니 빠르게 말할게요. 우린 악의 편을 들어야 해요. 당신이 계속 중립을 지켰다간,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 거에요."
안나의 '대악마의 눈동자'는 붉게 소용돌이치며 미래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묵시룡이 깨어나고, 그로 인한 최초의 꼬리짓에 의해 자신들은 모두 죽게 된다는 미래가.
그것을 알아준 건지, 김독자는 무심하게 계획을 물었다.
"계획이 뭔데."
"국지전에서, 악의 진형을 우세하게 만들어야 해요. '하늘의 서기관'은 지금 미쳤어요! 거악인 묵시룡을 깨워 모든 성좌가 그들에 맞서는, 잊혀지지 않는 규모의 선악의 설화를 만들려고 한다고요! 묵시룡이 깨어나면, 아마 이 곳에 있는 모든 이는 죽어버릴 거에요."
묵시룡.
묵시룡이 무엇인가.
이제는 까맣게 잊혀져 제대로 회자되는 일이 좀처럼 없는, 구시대의 재앙.
에덴의 천사들과 마계의 마왕들이 합작해 봉인했다는, '이계의 신격'과도 같은 힘을 지닌 사악한 거룡.
김독자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안나 크로프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좋아. 일단 네 말에 따르지."
"일단 악의 진영 편을 들어야 해요. 더 이상 성마대전이 중립을 지켜, 회담을 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요."
김독자는 대답 대신 날개를 폈다.
그의 손에서 빛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듯, 김독자는 앞에 있던 한 천사의 등을 베었다.
안나 크로프트도 이내 단검을 꺼내 천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거 맞는 거지? 우리엘한테 미움받아 버리면 알아서 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악마같은 불의 심판자는 어디까지나 성좌. 당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성좌란 말이에요."
안나의 말에, 김독자는 짓씹듯 알아,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전투에 집중했다.
푸른 벼락이 내리치듯, '전인화'를 사용한 김독자의 무력은 거의 그 유중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압도적이었다.
수많은 능천사, 역품천사들이 전격의 쓰나미에 의해 쓸려나가듯 시나리오에서 죽어나갔다.
"안나 크로프트! 전투에 집중해!"
잠시 멍하니 그를 지켜보고 있던 안나의 뒤를 노린 한 천사의 목을 날리며, 김독자가 그렇게 외쳤다.
정신을 차린 안나는 단검에서 강기 다발을 뽑아내며 천사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초월적인 두 사람의 무위는 결국 성마대전을 악의 승리로 이끌었고, 상당수의 천사들을 잃은 에덴의 수장 메타트론은 퇴각하며 이렇게 외쳤다.
"구원의 마왕! 에덴은 오늘의 배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신의 엄중한 복수가 내리길!"
우리엘은 어째서, 하는 눈빛으로 김독자를 몇 번이고 되돌아봤지만,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렇게 선 진영이 완벽히 퇴장하고 나서, 김독자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을 소진한 듯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김독자를 안나가 부축했다.
"구원의 마왕, 괜찮나요? 다행히 희생자는.. 얼마 없지 않습니까. 저랑 계약을 맺으시죠, 구원의 마왕. 저는 당신의 무력이 필요하고 당신은 제 정보가 필요할 겁니다."
".. 계약이라. 조건은?"
"첫 번째, 저와 당신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관계. 더 이상 나갈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 주시길. 두 번째, 이 계약은 그 누구에게나 비밀로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어느 한 쪽이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경우, 이 계약은 없는 것으로 한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안나 크로프트는 예언자인 자신에게 밀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해, 시나리오를 클리어해가는 김독자에게 존경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사사로운 연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를 위한 방법에 동의하며 최선을 다하는 김독자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호감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김독자는, 그저 시나리오를 클리어해나갈 도구로만 그녀를 이용할 것이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네. 계약 성립이다.. 다음 시나리오는 뭐지?"
그렇게,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
그러나 시간은 무상했고, 절대 순탄치 않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의 협업은 의외로 큰 장애물 없이 잘 이어나가고 있었다.
덤으로 생사를 함께하는 전투에서 그들의 관계 또한 비즈니스 관계에서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무 문제 없는 시나리오였고, 그렇기에 그녀를 믿어 혼자 보낸 것이었는데.
- 안나 크로프트! 대답해! 안나!
- 후후, 구원의 마왕. 나 다쳤어요. 와서 호 해줘요.
능청스러운 안나 크로프트의 말.
꼭 어린아이가 다치고 허세 부리는 것만 같은 그 말투에, 김독자는 더욱 더 불안해졌다.
시나리오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홀로그램 창에 떠 있는 안나 크로프트의 처참한 모습.
[.. 널 죽이면, 구원의 마왕이 나오려나?]
그리고 보이는 검은 드레스, 활활 타오르는 '업화의 불꽃'.
우리엘이 그곳에 서 있었다.
더 이상 김독자에게 약한 대천사가 아니라, 불로써 정의를 행하는 악마와 가장 가까운 심판자.
악마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안나!"
양 팔은 부러졌고, 다리엔 수많은 자상.
일어난다 해도 도망칠 수가 없어.
끝난 건가.
저 남자는 나를 싫어하니까, 계약도 곧 끊어지겠군. 그래도 사랑했어, '구원의 마왕'.. 아니 김독자.
[나와, 구원의 마왕!]
우리엘의 손에 번뜩이던 업화의 불꽃이 안나의 상반신을 향해 쇄도했고, 안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의 상반신을 꿰뚫고 헤집는 검날이 느껴져야 할 텐데, 하다못해 통증이라도 느껴져야 할 텐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나 크로프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제 계약자에게, 손 대지 마십시오.]
자신이 본 그 어떤 미래에서도 없었던 일이, 그녀의 눈 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 묵빛의 가드에서 뻗어나온 하얀 검신.
그리고 그것을 잡은 한 남자의 신형.
개연성의 스파크를 받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남자는 우리엘을 마주보고 섰다.
그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힘겹게 덜그럭대며 우리엘의 '업화의 불꽃'을 막고 있었다.
[구원의 마왕! 그 곳에 있었느냐! 오늘, 그 전장에서 수없이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복수를 하러 왔다!]
온 몸의 뼈를 덜그럭거리게 하는 우리엘의 진언이 울려퍼졌고, 김독자는 아무 말 없이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합을 주고 받았을까, 우리엘과 김독자는 잠시 검무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대천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김독자에게 물었다.
[독자야.. 왜 그랬어? 선의 편을 들 수도 있었잖아.. 우린 닮았잖아.. 악의 편 안 들어도 됐잖아!]
[우리엘. 이제 와 무슨 대답을 바라십니까. 이제 와 무슨 말이 듣고 싶습니까. 우리는, 언젠가 이렇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우리엘의 검에, 새하연 화염이 일었다.
독사처럼 혀를 낼름대며 온 세상의 악을 전부 불태우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지옥염화가, 그녀의 검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에 대답하듯, 김독자의 온 몸에서도 푸른 전기줄기가 흘렀다.
뇌신, 인드라의 뇌전보다 더욱 강하고 줄기차게 뻗어나온 그 번개는 이내 김독자의 온 몸을 감쌌다.
지직- 지직-
"우리엘, 오십시오. 이 곳이 우리의 마지막 전장입니다."
[구원의 마왕!!!]
격노한 우리엘과, 침착한 김독자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뻗어나갔다.
두 성좌가 서로에게 검을 휘두른 순간, 굉음이 울려퍼지고, 쇄도하는 섬광과 마력이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랐고, 그 구름을 헤치고 걸어나온 김독자는 쓰러진 우리엘의 몸을 끌어안았다.
"우리엘.. 미안해요.. 정말.. 흐윽.. 미안해요.."
에덴의 천사들이 쓰러진 우리엘의 진체를 운구했고, 김독자는 벽에 기대어 겨우 앉아 있는 안나 크로프트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살포시 껴안고, 김독자는 그녀의 정수리에 슬며시 입을 맞추었다.
우리엘의 업화의 불꽃이 자신에게 쇄도하는 바로 그 순간 정신을 잃은 안나의 몸을 안아든 김독자는, 날개를 펼쳐 유유히 전장을 이탈했다.
"참 말랐구나. 이 여자."
날아가는 도중, 말라도 너무 마른 안나의 팔을 매만지며 김독자가 혼잣말했다.
하긴, 그동안 인류 살린답시고 개고생을 해 왔을 테니.
돌아가면 일단 밥부터 많이 먹여줘야겠어.
*
73번째 마계, 김독자의 성-
"안나, 정신차려 봐. 내 목소리 들려?"
김독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안나 크로프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 앞엔 눈물을 글썽인 채 그럼에도 미소짓는 구원의 마왕이 있었다.
"구원의 마왕.. 여긴.."
"73번째 마계의 성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내 성."
자신의 주위에 널부러져 있는 여러 가지 영약들, 그리고 지금 김독자가 들고온 세숫대야와 물수건.
여러 정황들을 볼 때 이 남자가 자신을 간호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옷까지 환자복으로 갈아입혀져 있는 자신을 의식한 순간 안나의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건 그냥 마법으로 바꿨어. 혹시 불쾌해 할지도 모르니까."
"아.. 네."
그러나 역시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던지, 안나와 김독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먼저 말을 꺼낸 건 안나였다.
한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했다가, 이내 힘겹게 입을 연 안나는 김독자에게 곧장 물어왔다.
"왜.. 개연성을 낭비하면서까지 날 구했던 거죠? 우리 관계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아, 그러니까 싫다는 뜻은 아닌데.. 그러니까 어째서요?"
김독자는 그런 안나의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왜 낭비라고 생각해?"
노골적인 김독자의 애정 표현에, 안나의 얼굴은 다시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귀엽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 김독자는, 곧 말을 이었다.
"낭비가 아니야. 처음에는 나도 헷갈렸거든. 너를 경계하면서도 뭔가 널 골탕먹이면 즐겁고, 재밌고 그랬는데. 우리엘과 싸웠을 때.. 그 때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
"좋아해, 안나 크로프트."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안나는 되물었다.
".. 정말이에요?"
"왜 거짓말을 하겠어. 사랑해 안나. 이 세상 누구보다 더."
그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미래시'로 보이지 않는 미래 중 하나가, 그러나 줄곧 바래왔던 그 미래가 실현됐을 때.
예언자의 표정은 얼떨떨했다.
몇 번이나 재확인 하고 나서야, 안나는 눈물을 보이며 김독자의 품에 안겼다.
"나도.. 나도 정말 사랑해요.. 구원의.. 아니, 독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