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잠시 꿈을 꾸었다.

의식은 뚜렷했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내 몸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나는 행복해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이내, 웃으며 우릴 지켜보는 수영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자신이 원했던 광경이듯, 자신이 원했던 결말인듯 행복한 표정을 짓는 너를 보니, 괜히 심술이 나 딸들의 볼을 꼬집어 보려 해도,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꿈속의 나는 몸을 일으켜 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너를 품에 꼬옥 안았다. 네가 내 귀에대고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최대한 집중하고 너의 얘기를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김독자.]

머리를 울리는듯한 너의 목소리에, 나는 꿈에서 깨었다. 혹여나 자고 있는 아이들이 깰까 봐 누운 채로 숨만 몰아쉬었다. 내가 조금 꿈틀거리자 기척을 느낀 비유가 비몽사몽 눈을 떴다.

"아빠아아..."

비유가 응석을 부리며 품에 안겼다. 그런 비유의 행동에 약간 놀라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문득 꿈 속에서 보았던 비유의 행복한 표정이 생각났다. 꿈 속 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비유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비유를 지긋이 바라보다 비유를 품에 꼭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우리 딸."

나는 지금까지 비유에게 전하지 못했던, 어쩌면 비유가 원했을지도 모를 마음을 전하였다. 어쩐지 비유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진 것 같았다. 가슴에 고갤 묻고 있던 비유는 이내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 잠에 들었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서아야, 이리로 와서 자."

"우웅..."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자 서아와 비유를 나란히 팔에 눕힌 뒤, 새근새근 잠든 딸들이 눈을 뜰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없더라도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더이상 나를 포기하고 주변을 포기하진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언제라도 네가 돌아와 날 안아주리라고, 고생했노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려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딸들을 바라보다 졸음이 오는 걸 느껴 다시 눈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깨었다. 품에서 잠들어있던 비유와 서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이들이 내는 소리 같았다.

'그나저나, 며칠 만에 푹 자보는 거지?'

요 근래 깊이 잠들어 본 적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렇게도 개운한 날은 처음인 것 같다. 가끔은 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자매가 아웅다웅 다투고 있었다. 정확히는 비유가 서아를 혼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아앗!! 서아야! 언니가 건들지 말랬잖아!"

"그치만! 나도 돕고 싶단 말야!"

사이 좋은 자매인걸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라보다 웃으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소란스럽더라니...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이 기특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딘지 부끄러워보이는 비유와 내 손길을 즐기는 서아가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몰랐는데...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말했다.

"같이 만들까?"

"내가 해주고 싶었는데..."

"나도나도! 서아도!"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셋어서 뭘 같이 해본 적이 많이 없는 것 같아서. 아빠가 미안하기도 하고... 추억도 쌓는다 생각하고 같이하면 좋지 않을까?"

나의 설득에 비유가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좋아!"

어쩐지 꿈 속에서 보았던 비유의 표정과 많이 닮아있어 괜스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아침을 먹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문득, 네가 함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나를 좀먹었지만 비유와 서아를 보며 잡생각들을 몰아냈다. 추태는 한 번으로 족했다. 더이상 못난 아빠가 되고 싶진 않았다.

설거지를 마친 뒤 서아에게 그동안 말해주지 못 했던 얘기들을 해주려고 하였으나,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비유가 격려해주었다. 서아는 착하니까. 아빠가 힘든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이니까. 아빠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아이니까. 다 이해해줄 것이라. 그렇게 나를 응원해주었다. 용기를 내어 서아를 조심스레 불러 입을 떼어내었다.

"저기 서아야..."

"응!"

서아의 해맑은 대답에 잠깐 죄책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비유 언니랑 엄마가 있는 곳에 갈 거야."

"... 그럼 멀리 가? 아빠도 안 돌아오는 거야?"

서아가 울먹이기에 다급하게 서아를 안아들고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야. 사실 엄마는 집 근처에 있어. 많이 아파서 그런지 오래도록 눈을 못 뜨고 있어. 어린 서아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동안 말하지 못했는데, 서아도 엄마가 많이 보고 싶을 거고... 응..."

서아는 커다란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아가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 나도 가는 거야? 서아도 엄마 볼 수 있어?"

서아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이 어린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보고 싶었을지 나에 대한 원망, 나를 미워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엄마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궁금함만이 눈동자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볼 수 있지. 우리 서아. 엄마가 서아 왔다고 못 반겨주고 누워있기만 할지도 몰라. 그래도 울거나 그럼 안 돼. 알겠지?"

서아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모르게, 저 어린 서아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서아를 씻기고, 채비를 한 뒤 비유와 서아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양손에 비유와 서아의 손을 쥐고 천천히 거리를 음미해나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너와 걷던 거리를 걷다보니 뜬금없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건 하나의 그림이 아닐까. 지우려 해도 자국들이 흐릿하게 남아 못내 다 잊지 못하는 그런 그림.

너를 잊어보겠다는 그런 얘기는 아니다. 이 길들은, 너와 내가 손을 잡고 웃으며 걷던 길들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도 잊을 수 없을테니까. 다만, 너라는 그림 한 켠에 비유와 서아를 그려 넣고, 이곳저곳에 자그마한 행복과 추억들을 조금씩 더해가면, 네가 없는 삶에서도 어느새 추억이라는 그림은 다채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그린 내 추억들은 내가 살아갈 힘이자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

네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내가, 이제는 네가 없이 살아가야할 미래들을 생각하는 것이 조금은 고역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버티다보면 언젠가 네가 돌아올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은 채, 너를 기다리면서 살아가겠지.

"서아. 비유."

"응!"
"응?"

"조만간 아빠랑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여행 좋아! 신난다!"
"응! 좋아!"

나의 행복을 차치하더라도,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게 이리도 쉽다는 것을, 이제서야 안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비유가 "놀이공원도 잊으면 안 돼...!"하고 귓속에 속삭였다. 비유는 어딘지 부끄러워 보였는데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럼." 하고 비유의 귀에 속삭여주자 서아가 왜 둘이서만 얘기하느냐고 다그쳐왔다.

이런 소란스러운 외출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너를 보러 가는 마음은 무겁지만, 잠시 이 행복을 즐기고 싶어졌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네 목소리가 들린듯 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착각이였나? 문득, 이 행복에 네가 함께 할 날이 올 것만 같은 그런 꿈 같은 기대감을 느끼며, 너와의 추억 위에 서아와 비유를 덧대어 그렸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은 짧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