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https://arca.live/b/reader/44127683

총알이 빚바치는 전장, 그곳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무 뒤에서 숨죽이며 앉아있었다.

타앙! 타앙!

투박한 총성이 하늘을 뒤흔들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지혜 정신 차려라.”

유중혁이 팔에서 피를 흘리는 이지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으윽…사부 나도 싸워야…”

“더 이상 싸우면 우리는 더 이상 사제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유중혁의 머릿속에 백발의 여성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유중혁의 표정에 결의가 피어올랐다.

“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유중혁이 품 안에서 두 개의 권총을 꺼내고 하나를 더 꺼내 이지혜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그리고 도망쳐라. 내가 시간을 벌어주겠다.”

“하지만 사부…”

“난 죽지 않는다. 절대로”

유중혁의 손에서 권총이 장전되었다.
권총 두 자루에서 하나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이윽고 두 몸둥아리가 다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적은 아직 차고 넘쳤다.

“쏴라! 어짜피 한 명이다!”

총알 하나가 유중혁의 어깨를 스쳤다. 옅은 신음소리를 낸 그가 옷을 찢어 상처를 지혈하였다.

다시 한 번 상대를 겨냥한 유중혁이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군인의 어깨를 꽤뚫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총알은 막을 수 없었다.

투앙

총알이 바위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작은 불티가 유중혁의 눈가에 떨어졌다.

“크윽”

잠깐에 방심이었으나 그 결과는 컸다.

펑!

결코 총에서 날 수 없는 광음이 적의 중심에서 울려퍼졌다.

콰아앙!

끔찍한 폭발음과 함께 유중혁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수풀로 떨어진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천하의 패왕(覇王)이 무슨 꼴이더냐?”

적군의 수장처럼 보이는 사내가 비아냥거리며 유중혁에게 다가왔다.

“네놈의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유중혁이 총구를 그에게 겨누었다.

“뭐해? 죽여야지.”

그러나 유중혁의 손가락은 쉬히 당겨기지 않았다.

“사람을 못 죽이게 됬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보군.”

유중혁의 팔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러나 그의 눈빛 만큼은 그의 팔과 같지 않았다.

“뭐하나? 소박해라.”

무력하게도 유중혁은 저항하지 못했다.

*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만한 장비들이 널려있는 방 안에 유중혁의 몸이 포박되어있었다.

“자 이제 그년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말해야지?”

한 남성이 망치를 집어들며 유중혁을 겁박하였다.

“안그러면 네놈은 죽어서야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유중혁의 입이 열렸다.

“으미”

“응?”

“으미(바다).”

일본군 제2 4군단장 ‘히노부시 치류’의 작은 눈이 깜빡거렸다.

그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를 이송해서 제판을 받게 하기 위해, 조금 약하게 고문하려는 계획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고문은 해야지 말귀를 들어먹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쉽게 입을 연 것이다.

“바다로 갔다고 했다. 혹시 일본어를 못하는 건가.”

“뭐…알겠다. 고맙…다”

그러나 히노부시는 알지 못했다. 이지혜가 바다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

붉은 노을지 지는 바다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젠장할!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것이므니까?”

한 일본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서 포니테일의 여성이 총을 거두었다.

서해의 바다, 지금 일본의 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석

극단적인 수준의 썰물에 대부분의 배들이 갯벌 한가운데 멈춰있었다.

단 한 척을 빼고

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철갑선

다여섯명의 소수 인원

그러함에도 지금 이 순간에는 백만대군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풍채를 가진 그 배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전”

창공에 하나의 단어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단어가 귀에서 점점 멀어질 즈음에 심지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사.”

네 개의 대포구멍에서 불꽃이 튀었다.
배 뒤에 숨어있던 일본인들이 순식간에 송장이 되었다.

“장전”

다시 한 번

“발사”

이지혜

일본인을 상대로 해전에서는 절대로지지 않았던 충무공처럼. 일본인들에게 이지혜는 바다에서 만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도…도망가야…”

발악하는 일본인들이 쏘는 총알은 단단한 철갑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후…후퇴하라! 배도 없이 저 미친년을 잡지 못한다!”

“장전”

“히이익!”

더 이상 사람이 이지혜의 눈 앞에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대포 소리는 계속해서 바다를 진동시켰다.

“발사”

*

“사부! 괜찮아!”

“그래, 난 괜찮다.”

이지혜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만나러 가야지.”

지금 당장은 갈 수 없었다. 방금 전 전투로 인해서 주변 치안이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잘 가고 있으려나…”

유중혁이 한수영과 김독자를 떠올렸다.

“죽지마라”

절대로

*

“야…우리 얼마나 온거냐?”

“아마 400리(약 150km)는 오지 않았을까?”

“거의 다왔네, 부전령까지는 한 500리 정도 됬으니까.”

산세를 걷다보니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만 가자. 산짐승은 위험해.”

말을 끝마친 한수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식경 정도 지났을까. 한수영이 김독자의 소매를 잡고 끌고 갔다.

“여기가 좋겠네.”

바위가 지붕처럼 덮여있고 그 주위를 넝쿨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 좋네.”

*

장작이 빛나며 두 남녀를 비추었다.

“야, 오랜만에 술이나 먹을 래?”

“죽을래? 쌀은커녕 보리도 없는데 술은 왠 술,”

김독자가 조용히 웃으며 가방 안에서 술병을 꺼내들었다. 한수영의 눈이 감자만큼 커졌다.

“…한 입만”

“…그럼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줘.”

“뭔데.”

“나중에.”

“싱겁기는.”

한수영이 김독자의 술병을 낚아채서 단번에 병나발을 물었다.

“크으~죽인다.”

그런 한수영을 바라보며 김독자도 술을 마셨다. 하루의 모든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 들며 정신이 모호해졌다.

“야 김도짜…”

그새 취했는지 한수영의 발음이 꼬였다.

“…왜?”

“너…여기 들어온게 네 약혼녀의 복수를 위해서 왔다고 했잖아.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수 있어?”

“…그래 뭐.”

김독자의 입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어릴 때 만났었어. 두 가문 모두 경성(서울)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기에 사실 혼처는 정해져 있었지.

착한 사람이었어 정말로. 너무도 착해서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도 상아씨는 나를 받아줬어.

그게 너무 고마웠어. 그때 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상아씨를 좋아하기 시작한게.

솔찍히 그 마음이 동경이 아니었을까 가끔 생각을 해. 하지만 그 마음이 사랑인 것은 의심치 않았어. 어느날 상아씨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때. 나는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거든

그렇게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혼인하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지. 조금 반대하시긴 했어. 어릴 때는 두 가문이 비슷했지만 점점 커 갈수록 차이가 심해졌거든.

하지만 겨우 그런 문제로 우릴 갈라놓을 순 없었어. 그러기엔 우리 사이가 정말 가까웠거든

상아씨를 바라볼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도 붉어지고, 결정적으로 나의 모든 신경이 그 사람에게 가 있었어. 그런 기분이 들때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런데…혼인 날짜까지 잡혀있었는데…그 왜놈들이…”

김독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 동안 바위 아래에선 모닥불이 타닥이는 소리밖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럼…나는 어때?”

“어?”

“나를 봐도 그렇게 심장이 뛰고 그래?”

한수영이 김독자에게 물었다.
김독자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약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며 두근 거리는 가슴과, 그녀의 행동이 조금 신경쓰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뿐이었다.

한수영이 김독자에게 다가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김독자의 심장도 조금씩, 조금씩 빠르게 뛰고 있었다.

“우웅 졸려…”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돌연 잠에 빠졌다. 김독자의 품 안에서 잠들어버린 그녀를 그는 눕혀놓았다.

‘난…한수영을 좋아하는건가? 아니 아니지. 나 한텐 오직 상아씨 뿐이야…’

오늘도 복수를 다짐하는 김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