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내가 항상 출퇴근에 이용했던 호선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노선표의 끝부분이 망가져 있다는 것이었다. 역의 이름들도 지워져 있었다.
열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로부터 몇 분이 더 지났지만 정차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열차는, 그대로 종착역까지 달릴 모양이었다.
한수영이 풀썩 소리를 내며 내 옆좌석에 앉았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노선표를 노려보는 한수영. 내가 물었다.

"뭐야 그 표정은."
"난 지하철 같은 거 안 타."
"왜?"
"볼 게 없잖아. 안도 밖도."

나는 녀석과 함께 망가진 노선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지하철은 늘 같은 노선을 달린다. 정해진 시간에 정차한다. 늘 같은 풍경 속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지하철을 싫어하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으니까.

"재밌으라고 지하철이 달리는 건 아니니까."
"성좌 '구원의 마왕'답지 않은 말이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곤 눌러왔던 말을 꺼냈다.

"있잖아."
"응?"
"아마 난 여기서 못 내릴 거야."
"......뭐?"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은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력으로 움직인다. 아마 지하철이 멈추는 곳에 '가장 오래된 꿈'이 있을 것이고, 그는 이 상황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꿈'이 없으면 이 세계는 사라져."
"그래서 만나러 가는 거잖아. 없애지 말라고."
"'가장 오래된 꿈'은 그렇게 강하지 못해."
"...'가장 오래된 꿈'의 정체가 뭔지 아는 것 처럼 말하네."

하여간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니까.

"알아. 근데 말해줄 수는 없어."
"기대도 안 했어. 언제는 다 말했다고."
"......"
"그래서, 또 뭐 때문인데. 뭐 때문에 우리만 남기고 혼자 감당하려는 건데. 왜!"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지. 읽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는 의미 없으니까."
"그럼 나는, 내 이야기는 누가 읽는데."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부터 스타 작가로 이름을 알렸던 한수영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내가 쓴 이야기는 누가 읽냐고. 쟤들은, 너 없으면 다 죽었을 쟤들 이야기는!"

한수영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이길영과 신유승이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이현성과 유상아, 정희원의 모습도 보였다.

"이길영, 신유승 쟤네가 시나리오 끝에 네가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아? 이현성 저 곰탱이는 너만 믿고 여기까지 왔고 또..."
"'테세우스의 배'라고 들어봤어?"

내가 사라지는 것을 <김독자 컴퍼니>의 멤버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 충격받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나를 구하겠다고 또 '시나리오'에 맞서겠지. 그런 위험에 다시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의 몇%가 있어야 그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너 설마..."
"정확히 말하면, 내 절반은 같이 내릴 거야."

<아바타>를 사용하면 모두 얻을 수 있다. 아바타에게 <김독자 컴퍼니> 멤버들과 관련된 기억을 대부분 넘겨주면 알아챌 걱정도 없다.

"...상관없어? 꼬맹이들이랑 바다에 못 가도, 시나리오가 끝나고 같이 하기로 했던 걸 못 해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어도 괜찮은 거냐고."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럼 대체 왜... 왜 그렇게 열심히 시나리오를 진행한 건데. 그냥 적당한 시나리오에 눌러 앉았어도..."
"결말을 알아도 읽어야 하는 책이 있어. 종착점을 알아도 늘 재미없는 노선을 달리는 지하철처럼."

한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하철의 소음과 멀리서 떠드는 일행들의 말소리만이 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던 한수영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아무리 '가장 오래된 꿈'이어도 전부를 이기진 못하겠지."
"응?"
"쟤들한테 말할 거야. 그리고 같이 막을 거야."

아뿔사.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됐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겠지만 또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안돼."

언젠가 얻어두었던 <기억 삭제>스킬.
웬만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스킬을 사용했으니 한수영은 20분 정도의 기억이 없을 것이다.

"아바타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있을 거야. 네가 많이 도와줘. 너라면 절반을 100%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스킬의 후유증으로 바닥에 쓰러진 한수영을 깨웠다. 왜 자신이 쓰러져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나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너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나한테 또 뭐 숨기고 있는 거 아냐?"
"그러고 싶어도 이제 숨길 게 없어."

한수영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와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앉아 있다가 일행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다시 일어나 발을 옮겼다.

「왜 다 안 지웠어?」
"숙려도가 낮아서 다 못 지웠어."
「왜 다 안 지웠어?」
"알잖아."
「너답지 않았어.」

나를 잊지 않았으면, 지하철 안에 김독자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한심하고, 철없는 '김독자'다운 감정.

"독자 씨 생각은 어때요?"
"네?"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깜짝 놀라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가장 오래된 꿈'의 정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독자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작가는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듭니다."

도깨비 왕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꿈'은 작가라기보다 차라리 독자에 가깝지. 그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쓰는 존재가 아니야. 게으르고 탐욕스러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