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 터벅 터벅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통로를 따라 울리고있었다.

6층에 유중혁은 없었다.


"진짜 그놈이 범인이었어?"

"말하지마, 안본 사...성좌가 있을 수 도있잖아."


[성좌,'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일리있는 개소리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6층던전의 보상은 꽤나 유용한 스킬북이었다.


스킬북:수비본능


이 스킬이면 무의식중에서도 행동이 가능하니,

불침번 중 사고방지에 좋겠지.


"이제 영화는 지긋지긋해요."


정희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연료라도 많이 받은 걸로 만족해야겠지.

우리는 곧바로 7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놈의 뒷통수가 

아니었다.

오직 찢어진 포스트가 나열된 벽면들뿐.


"달리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놈을 따라잡아야한다. 

개복치가 또 뒤져버리기 전에,


"제발...모두 찢어져 있어라...."


행운은 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해당 층의 상영이 시작됩니다.]


청색 스포트라이트가 전신을 덮자마자 장면이 바뀌었다.

한바탕 화면이 어지럽게 변하며 

코끝에 짠 내가 불어왔다.

다만...바다 비린내 뿐만이 아니었다.


"화약 냄새...피?!"

"모두 엎드려라-!"


반사적으로 자리에 엎드리자 엄청난 반동과 폭음이 

밀려왔다.

연기와 화약이 시야를 가리는 틈 사이,

왜군 병사 몇몇이 바다로 떨어졌다.


"함선을 돌려라-!"


조선 수군의 복장을 한 병사들이 황급히

적선을 쳐내어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걸 남겨놓았단 말인가.

곁에 있던 유상아와 이길영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넋이 나간 정희원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걸...어떻게.."


망할,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사이다'를 향할 수 있단 말인가.


쿠드드드드.....


바다를 뒤덮은 삼백삼십 척의 적선,

나는 다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이번만큼은 누구도 내 행동에 의문을 가지지않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나머지 열한척의 판옥선도,

갑판 위에서 위풍당당한 포스를 뽑내며 

전장을 지휘해야하는 통제공께서도!

정희원이 황급히 주변의 수군을 붙잡았다.


"통제공! 통제공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예?"

"이순신 장군님이요!"


무슨 말이냐는 수군의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건..


"이건...말도 안 돼.

이순신 장군님 없이 어떻게 명량해전을..."


이길영이 공포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급히 유상아에게 다가갔다.


"상아 씨! 상아 씨! 정신 차려요!"

"네? 네네!"

"말도 안 된다는거 알아요,

안 된다는거 아는데..."


나는 한 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상아 씨가 지휘하셔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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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아를 데려온 것도 이길영과 비슷한 이유였다.

고학력자인데다 대중매체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이 던전에서 굉장히 유용한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저 멀리서 보는 것과 실제는

천지차이다.

나는 당황한 유상아에게서 눈을 떼고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았다.

지금도 적군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상황, 

멀리서 유상아가 다급히 전장을 지휘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뿐,

그녀는 오래버티지 못할 것이니,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급히 외쳤다.


"이지혜!"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누군가 1층 갑판 구석에서 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야, 괜찮냐?"

"으으,으으....으......"


눈가가 흠뻑 젖은 이지혜가 미친듯이 중얼거렸다.


"으윽...아...안 돼....난 못 해..."

"정신 차려! 야!"


울고 있는 소녀의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외치고 있지 않았지만

그 초점없는 동공에 비치는 게 누구일지는 짐작이 갔다.


"미안해...미안해 보리야...난 못해..."


제기랄, 스승과 제자는 닮는다 했던가,

딱 그 꼴이다.

연이어 헛 구역질을 하는 이지혜,


[성좌,'해상전신'이 안타까운 눈으로 

이지혜를 바라봅니다.]


충무공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의 친우의 후손에게 그 메시지는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 이었다.

그럼에도 충무공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의 보상란을 확인한 순간, 갑판 위에서 

이길영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이지혜를 흔들었다.


"이지혜, 그만 일어나. 얼른."

"으흑...안 돼...내가.....내가 무슨 자격으로..."

"....웃기고 있네."

"...뭐?"


덜덜 떠는 이지혜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었다.


"자격? 니가 지금 어디서 자격을 운운해?"

"...뭐라는 거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네 친구는 죽었어!"


소녀의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네가 죽였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그만."

"지금까지 잘만 살아놓고, 여기서 죽을거냐?

겨우 네 친구가 좋아한 영화 하나 때문에!?"


퍼걱! 목판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갈고리가 

날아들어왔다.

나는 갈고리를 잡아채며 부들부들 떠는 이지혜에게

다시 한번 더 기만을 말했다.


"네 친구는 네가 자기를 죽이길 원했어!"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가 죽고 네가 살기를 바랬어!"


나는 그저 독자였고,

그 소녀의 진짜 심정 따위는 내 알빠가 아니었다.

나는 2층 갑판으로 나왔다.

일행들은 모두 포위되어 있었다.

일대일이라면 질 리 만무한 병사들은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신녕의 칼날'을 발동합니다.]


적군 병사들을 베어내며 달려도,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갈 수 가 없을 정도였다.

곧 이 배가 침몰하는 건 시간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이지혜!"


감히 성웅의 위대함을 알겠다.

이딴 저주 받은 곳에서 어떻게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걸까.


"이제 정신 차려!"


비호를 받는 나약한 소녀가 갑판으로 올라왔다.


"난,나는 역겨워...내가...내가 살아있어도 되는 거야...?"


그래, 너는 역겹다. 

그런 널 이용하려는 나는 더더욱.


"아니."

"독자 씨!"


어디선가 방패와 화살들이 날아왔다.

나는 방패로 쉴틈 없이 쏟아지는 포화를 막으며

그녀를 등지고 섰다.


"넌, 그날 죽었어."


죽어가던 소녀의 동공에 생명력이 깃들었다.


".....뭐?"


소녀의 눈문이 멈췄다.

'죽고싶다'라는 단어는 결코 하나의 뜻이 아니다.


"넌 그날 네 친구를 죽였어, 그리고 너도!"


울음을 그친 소녀가 이를 갈며 칼을 쥐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단어는 정반대의 뜻이다.


"지금 네 목숨이 정말로 네 것 같아?"


'살려줘.'

지금 내가 내뱉은 말은 발버둥이다.

어떻게든 살기위해 추한 괘변을 늘어놓았다.


[인물, '이지혜'가 자신의 역겹고 진실된 욕망과

마주합니다.]


일어서는 이지혜에게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전해졌다.

울분, 분노, 후회, 자기 멸시.

그 어두운 감정 속에서 진실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죽기 싫어."


[성좌,'해상전신'이 화신'이지혜'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붉은 아우라가 터져나왔다.


[인물,'이지혜'가 새로운 성흔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녀가 향하는 칼끝에서 누군가가 

살아견딘 역사가 흐르며 노래를 시작했다.

구슬프고, 또 그저 구슬프게.


[신에게는.]


칼자루를 쥔 소녀가 바다를 보았다.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으니.]


적은 많고 아군은 적은 삭막한 세상을 향해,


[이 원수를 갚을 수 만 있다면.]


소녀가 발을 디디며 검을 뽑았다.


[이곳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라.]


핒빛 투기가 검 끝에서 갈라져 나왔다.


[인물'이지혜'가 성흔 '유령함대 Lv.1'을 발동합니다!]


떨림과 함께 인근 해역 전체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터져나오는 물줄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열두 척의 유령 함선.

당황한듯한 북소리와 날아드는 포탄은

유령 함대에게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시끄러운 전장 속, 울고 있는 소녀가 중얼거렸다.


"발포."


콰콰콰콰콰!


모두가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덧 저물어가는 노을에 비치는 적선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