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그것도 하이얀 함박눈이 흩날리는 모처럼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어른이든 아이든 괜히 마음이 들뜨고 두근거리는 그런 날이었지만, 김독자는 마냥 마음이 편치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이 물음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답이 있는 물음인지부터가 궁금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크리스마스인데, 독자 씨는 벌써 한 시간이나 그러고 앉아 계시네요?"
어느새 윗 층에서 내려온 유상아 씨가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요새 통 바빠 보이더니, 어제도 집에서 늦은 밤까지 업무를 보았는지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네. 생각할게 좀 있어서…."
"그거 수영 씨 때문이죠?"
유상아 씨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질문에 유상아 씨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부터 온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고 다니던데요? 이 집에서 수영 씨를 짜증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독자 씨 말고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보니 아까 길영이가 오늘 한수영이 좀 이상하다고, 원래도 괴팍했는데 오늘은 유중혁보다 더하다고 했었지….
왠지 모르게 착잡한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와드릴까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유상아 씨가 내게 물었다.
그 미소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유상아 씨라면 세상 모든 고민을 다 해결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이래서 미노소프트 직원들이 모든 고민이란 고민은 죄다 유상아 씨에게 털어 놓았던 건가.
나는 미소에 이끌려 천천히, 마치 책의 큰 줄거리를 설명하는 사람처럼 아침에 있었던 일을 유상아 씨에게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웬일로 일찍 일어난 한수영이 내 방으로 찾아왔던 것.
그리고 내게 '오늘 뭐하냐?'라고 물었던 것.
아마 집에서 푹 쉴 것 같다고 대답했던 것.
그러자 한수영이 '뭐, 꼭 오늘 쉬어야 돼? 어차피 너 백수잖아. 아니 평소에 하는 거라곤 쉬는 것 밖에 없는 새끼가…'라고 말했던 것.
다시 내가 그래도 별로 할 것도 없어서 집에서 쉴 것 같다고 대답했던 것.
그리고는 아마 이런 식의 대화가 두 세 번 더 이어지자,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진 한수영이 방문을 세게 걷어차고는 나갔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유상아 씨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상황이었군요?"
"상아 씨는 한수영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짐작가는게 있으십니까?"
유상아 씨가 대답했다.
"네, 저는 알 것 같아요."
그 말에 답답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려줄 수는 없어요."
녹은 눈이 다시금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네? 아니 왜…."
다음으로 이어진 유상아 씨의 말은 조금 생뚱맞았다.
"제가 알던 독자 씨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세상이 많이 변했죠. 더 이상 현성 씨가 방패를 들 일도 없고, 지혜와 희원 씨가 검을 쓸 일도 없으니까요. 얼마 전에는 희원 씨가 요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이셨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렇게나 검을 잘 쓰던 사람이…"
내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유상아 씨가 계속 말을 이었다.
"독자 씨도 변했겠죠. 화신체의 손상도 심하고, 설화도 많이 잃어버렸으니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욱 그럴거예요. 더 이상 스킬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저희 마음을 뚜렷이 읽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거에요."
실제로 유상아 씨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번번이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을 사용하려 했던 나는, 스킬 사용에 실패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때마다 내 눈 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의 메시지는 '숙련도가 낮아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였다.
읽은 지 오래된 책의 내용은, 다시 읽지 않는 이상 서서히 기억 속에서 흩어져 가는 것처럼 나와 일행들이 쌓아 올린 이야기들도, 너무나 바뀌어버린 세상 앞에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독자 씨는 여전히 유능한 독자에요. 그렇죠? 이제 남의 마음을 읽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서재에서 늦은 밤까지 책을 읽곤 하시잖아요."
창문 너머로 들어오던 빛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차가워진 계절 탓에 아침도 일찍 몸을 숨기고, 수많은 별을 잃어버린 밤하늘이 외로움을 달래러 찾아오고 있었다.
"유능한 독자는 책 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읽을 수 있어야 해요. 다른 사람의 생각, 상황, 분위기, 의도, 이런 것들을 말이에요. 물론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말이죠."
한수영은 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며, 나는 한수영을 읽었다. 작가와 독자,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 그러한 명분으로 한수영이라는 존재를 읽어 나갔다. 어쩌면 한수영은, 내가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독자라는 사실의 방증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할 수 없더라도 나는 한수영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표정을 보니 이제 방향은 잡으신 것 같네요."
"네, 상아 씨 덕분에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할 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긴 어렵네요…."
"제가 팁을 좀 드릴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씨는 자존심이 무지하게 강해요. 그래서 때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기도 하죠."
.
.
.
한수영이 나를 통해서 대신 하고 싶었던, 듣고 싶었던 말.
그것은 어떻게 보면 알아채기에 너무도 쉬운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수영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려고 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결국 이번 일의 문제는 일종의 역설이었다.
한수영을 너무도 잘 알아서, 한수영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나는 목청을 몇 번 가다듬고, 한수영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수영아."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답은 커녕,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방에 없나? 상아 씨는 분명 방에 있다고 하셨는데…
나는 무심코 문을 열었다.
슬며시 열린 문 너머로 왠지 모를 한기가 몰아쳤다.
불이 꺼진 방 안은 바깥보다도 캄캄했고, 번쩍이는 모니터 앞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들어올거면 노크는 대체 왜 하는거냐 싸가지 없는 새끼야?"
심장이 무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신화급 성좌의 진언을 처음 들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방에 불 꺼놓고 뭐해?"
"니 알바냐?"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좆까세요 그냥."
토하고 싶다.
차라리 어머니한테 가서 같이 저녁 식사 하자고 말하는게 훨씬 더 쉬울 지경이다.
내가 잠시 망설이는 동안 짧은 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동안 한수영은 잠깐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애써 내게서 눈을 돌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밥이나 먹으러 갈래?"
한수영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방금보다는 조금 유해진 눈빛이었다.
한수영의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과 나를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둘이?"
"응, 우리 둘이."
"비유도 빼고?"
"그래. 비유 지금 장하영이랑 놀고 있어."
번쩍이는 모니터 화면 앞, 어쩐지 한수영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 보였다.
한수영은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충분히 그것이 긍정의 의미임을 읽어냈다.
"기다릴게. 준비하고 나와."
.
.
.
한수영이 현관 앞으로 나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한수영이 대충 준비를 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가자."
한수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것이 그녀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끝없는 거세를 거듭한 목소리였다.
나는 대충 한수영의 복장을 훑어 보았다.
자기는 목 답답한 게 싫다며 목도리도 안 매던 녀석이 터틀넥 스웨터를 입었고, 단추 매는 게 그렇게 귀찮다고 투덜댔던 놈이 스웨터 위에 흰 옥스퍼드 셔츠를 입었다.
평소 편의점 갈 때 자주 입던 낡은 검은색 숏패딩이 아닌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장의 검은색 싱글 코트와, 와이드 슬랙스를 입었다.
보통은 그렇게 꾸몄다고는 말할 수 없는 복장.
그렇지만 한수영이라는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수영이가 오늘을 위해 정말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것을.
무언가 복잡한 것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렁였다.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오늘은 때가 아닌 듯 했다.
딱히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작가와 독자였고, 이 세계의 비밀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으며,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몇 번의 대화 없이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우리는 손을 잡았다.
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시내 길거리에는 거룩한 징글벨이 울리고 있었다.
하늘에 수놓인 수많은 별들은 이미 져버리고 없었지만, 거리의 밝은 조명들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히 서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