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승의 죽음에 얼마 가지 못한 시점이었다.
시나리오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자, 유중혁은 돌연 제 목에 칼을 꽂고 자결을 택했다.
이지혜는 아직도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권태에 잠겨버린 검은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불운을 마주한 듯 보였으나, 그는 담담했다.
그리고 되려,
"다음을 기약해야겠어."
이런 소리를 지껄이더니, 극단적인 선택을 했으니까.
유중혁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제 목숨을 내다버리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시나리오에 임하는 그는...
아니, 알 수 없었다.
* * *
김남운은 항상 유중혁에게서 괴상함을 느끼곤 했다. 그는 항상 위태로워 보였고, 모든 것을 저버린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종종 시나리오에서의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오직 클리어만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마 그랬기에 그를 따랐을 것이다.
그 누구도 유중혁처럼 인류를 이끌어나갈 수 없었고, 그보다 앞서 가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를 잃은 인간들은 그 자리에서 정체됐다.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다만 김남운은 그것에 그리 큰 감상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도 인류의 존망이라는 주제는 딱히 크게 와닿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만 맘에 드는 것은, 그 유중혁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애를 쓰는 이지혜의 모습이었다.
항상 귀엽지만, 되도 않는 능력으로 애써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게 어쩐지 잡아먹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향을 풍겨서.
그리고 지쳐버린 듯 쳐진 눈동자도 파내서 가지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눈 밑에 피로로 가라앉은 다크서클은 그 부분만 떼서 박제를 하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입술은 얼굴에 붙여둔 채 방부제를 써서 매일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윤기나게 유지해야지. 그리고 가슴은...
"집중 해, 김남운."
"아, 응. 그 정도야, 하려면 하지."
가지에 가지를 쳐가는 재미있는 상상을 끊어낸 건 그 장본인이었다.
김남운은 잠시 화가 난 듯 올라간 눈꼬리를 응시하다, 이내 됐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다리를 책상에 올렸다.
"저, 지혜야. 오늘 환자들이 꽤 있어서 나는 먼저 가 볼게."
"아, 아 네... 설화 언니...!"
"나도 군에 좀 들러야 할 일이 생겨서..."
"... 네."
이지혜의 눈동자가 망연해졌다.
유중혁의 말에는 항상 필사적이었던 이들이, 저의 말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이해한다. 우린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겪었고, 유중혁이 없는 상태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머무르는 건... 유중혁을 무슨 의미로 만드는 거지? 그건...
툭.
"아, 뭐야!"
"머리 한 번 때렸다고 예민하게 반응이야."
"... 넌 안 가냐? 다 갔잖아! 너도 꺼져!"
"둘 만 남았는데 뭐 없어? 말을 잘 들어줬으니까, 포상이라던가. 응?"
능글맞은 목소리와 동시에 그의 손이 노골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너...!"
"자꾸 그 새끼 따라하려는 이유가 뭔데? 그냥 편하게 살아, 편하게..."
"넌 미안하지도 않아? 사부가 우리 구하려다 그렇게...!"
"너도 봤잖아, 아닌 거. 그 새끼는 그냥 게임하듯이 우리랑 논 거야. 안 그러면 그렇게 뒤지는 게 말이 돼?"
"그, 그건... 앗, 손 빼!"
벗어나려고 손을 휘젓자, 김남운은 작게 웃더니 저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손은 허리를 매만지는 데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한 손은 그보다 내려가 몸을 유린하듯 휘저었고, 다른 한 손은 제 욕정을 채우려는 듯 봉긋하게 오른 가슴을 거칠게 매만졌다.
"이 쯤이면 보통 저항하잖아, 왜 안 해?"
"... 왜, 하길 바래?"
"그건 아니고."
이내 머리채가 잡히는 감각과 함께, 홱 돌아간 시야에 그가 가득 찼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자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이상해서,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뺨을 매만지던 순간이었다.
서늘한 한기가 입술에 닿았다.
이내 혀가 얽혔고, 몸이 얽히는 것은 곧이었다.
"아..."
"싫으면 말 해. 싫어해도 계속 할 거긴 한데."
거기에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또 다시 그의 입술이 닿았다.
사랑을 견디지 못 해 터져버린 여느 어린 사춘기 소년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