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의 채널이 개설되기 직전, 내가 경쟁 지분 이야기를 꺼냈을 때 게티아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새로운 분배법에 흥미로워하면서도 무언가 꺼려하는 기색이랄까.


결국 바르바토스가 총대를 매고 나섰다. 


[하지만 그놈들은 아무것도 한 개 없지 않은가?]


요컨대 엄한 놈들이 꼽사리 끼는 게 불만이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이해한다. 나도 마음 같아선 최대한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때론 마음에 들지 않는 짓도 해야 하는 법이다.


[어쩔 땐 채찍보다 당근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마침 성좌의 개입을 저지한다는 좋은 명분이 생겼습니다. 마계를 진정으로 통일할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군요.]


[. . . 저들은 제 잇속을 채워도 너를 진심으로 따르지는 않을 거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 ]


[그래도 무력으로 마계를 통일하는 것보단, 그럴듯한 명분을 쥐어 주고 겉으로나마 따르게 만드는 편이 좋습니다. 그게 더 빠르고 효율적인 길이죠.]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바르바토스를 비롯한 마왕들을 살폈다. 방금 합류한 레메게톤 녀석들을 제외하면 수긍하는 눈치였다. 


새삼스럽지만 놀라운 경광이었다. 제 밥그릇을 줄이겠다는 소리에도 내색하지 않은 거니까. 여타 별들이 설화에 얼마나 목매는 지를 생각한다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결정인지 실감할 수 있다.


문득 생각해 보니 . . . 저들은 내가 에덴에 억류되었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 줬다. 그 이면엔 서로를 의지하며 싸운 성운이 있었고, 결말을 구도 한다는 일념 하에 모인 마왕들이 있었다. 


다양한 기억의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조립하자 . . .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됐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그 그림을 천천히 훑어 봤다.


- 이젠 정말로 같이 살거나, 같이 죽겠구나.


고마운 동료들을 안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흠 . . . 그래도 조금 장난은 쳐도 상관은 없겠죠.]


[뭐?]


나는 턱에 손가락을 얹었다. 재밌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이런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원작의 아스모데우스가 가진 습관일까? 아니면 전생의 내가 가진 습관인 걸까?


뭐, 이제 와서 고민해봤자 쓸데없지만. 


[경쟁 지분은 전체의 20퍼센트로 내놓을 생각입니다.]


아몬이 질문했다.


[현재 무방비 상태의 인장이 대충 20개 정도지. 노린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장 1개당 1퍼센트로 쳐줄 계획입니다. 물론 여기 모인 분들 예외고요.]


[예외?]


[우리는 이번 시나리오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참여한 시간에서부터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는데, 얻는 것이 똑같다면 그건 불공평하죠.]


경쟁지분이 20%, 생존한 마왕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지분이 40%가량.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30% 가량의 지분이 남는다. 그게 게티아의 몫이 될 것이다. 게티아 내에서 어떤 식으로 배분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결과적으로 설화 지분의 과반을 게티아가 차지하도록 약간의 장난을 쳐놨다. 바르바토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일원들을 보다가 레메게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양심 있다면 참여하지 말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패자에겐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데다가 약소하지만 거대설화의 편린을 허락받은 탓인지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바사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상하관계가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



하나의 마계 시나리오에서 게티아가 아주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건 맞지만, 시나리오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가장 큰 요인은 내가 제시한 경쟁 지분 때문이었다. 보다 많은 설화지분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마왕들이 주인 없는 마계를 두고 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싸움은 대개 명예로운 마왕 승급전으로 귀결됐고, 하루아침에 순위가 바뀌는 일도 이젠 일상이 되었다.


틈만 나면 싸워대는 마왕들 덕에 도깨비들은 일복이 터졌다. 임시로 개설된 채널은 더 이상 임시가 아니게 되었고, 어지간한 설화급 성좌들 이상의 강함을 자랑하는 마왕들의 격전을 찾아 관람객들이 모여 들었다. 


관람객이란 당연히 밤하늘의 성좌들을 가리켰다.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훈수를 둡니다.]

- [성좌, ‘고려제일 검’이 격렬한 투쟁에 관심을 보입니다.]


어째 익숙한 수식언이 보인다만 넘어가기로 하고 . . . 


성좌들의 눈이 닿는 곳은 격전의 무대, 마계의 변방과 일부 시나리오 지대에 그쳤다. 명계처럼 마계 자체가 마왕들의 사유지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예외는 있었다.


- [좋은 거래였습니다.]

- [이쪽이야말로.]


32번째 마계의 ‘홍등가’의 경우, 관리국과 정식적으로 제휴를 맺어 시나리오 지대로 선정됐다. 도깨비들은 구독좌를 유치하고 나는 수입을 높일 수 있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나는 신축 공사를 벌여 시설을 크게 확장한 뒤, 그 비용을 성좌들의 코인으로 충당했다


-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 카드에 사기를 쳐?!]

- [사기는 무슨. 그쪽 실력이 모자란 거지. 왜 애꿎은 카드를 질책합니까?]


- [그, 요즘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 유행이라 들었소만.]

-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드시죠. 근데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나요?]

- [음?]


- [여기 칵테일 한 잔.]

- [먼저 500코인을 지급하셔야 합니다.]

- [ . . . 후불은 안 되나?]

- [안 됩니다.]


몇몇 앙심을 품은 빚쟁이들이 관리국에게 문의를 넣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여기만큼 안정적으로 참여좌를 뽑아낼 수 있는 무대도 없거니와 익명의 후원자가 홍등가를 관리 감독하는 도깨비에게 거금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자고로 주머니가 두둑하면 인심이 좋아지는 법. 예상치 못한 부수입에 입이 헤벌쭉 벌어진 중급 도깨비들은 넉살을 부리며 홍등가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불만 있는 놈들은 블랙리스트에 박제되어 영구히 추방됐다.


역시 정의는 살아 있다.


[그딴 게 정의입니까?]


[당연하죠.]


그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도박에서 져 거액의 빚을 진 음속의 마신이 빚을 탕감할 속셈으로 내게 승급전을 걸기도 했고, 게티아 일원들끼리 모여 “앞으로의 마계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를 주제로 토론도 진행했다.


토론에선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연방제, 중앙집권제 등 각자의 성향이 내포된 문장이 장내에 범람했다.


진언에 실린 격에 회장이 요동치길 두어 차례. 결국 정해진 것은 “각 마왕의 자치권을 인정하되, 마왕이 사망하여 주인 없는 마계는 게티아의 공동 소유로 한다.” 라는 법령이었다.


존재맹세로 스타스트림에 각인된 해당 법령은 마계 최초의 헌법으로 등재됐다. 뭐, 헌법이라고 해봤자 겨우 한두 줄이지만. 그것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성마대전이 아니어도 마계를 하나로 뭉치게 할 구심점이 생긴 거니까. 


놀라운 발전이다.


[현재 생존한 마왕이 얼마나 됩니까?]


[흠, 대충 45명가량이 남은 것 같군요.]


[. . . 그럼 마계의 3분의 1가량이 게티아에 속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래서 눈치 빠른 권속은 싫다니까.]


그래도 과반수는 아니니까 애교로 넘어갈 수 있는 수치다. 아마도? 법령을 선포한 후에 게티아 일동은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이번엔 “누가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할지”가 주요 안건이었다.


이에 게티아는 나를 지지하는 세력과 아가레스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전자는 이번 시나리오 자체가 내 설계에서 비롯됨을 근거로 들었고, 후자는 아가레스의 강함과 영향력을 어필했다.


진언의 폭풍 속에서 솔직히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인드였다. 나나 아가레스나 어차피 한 배를 탄 사이니까. 누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든 간에 그에 수반되는 이익은 함께 나눠가질 생각이었다.


아쉽긴 해도 양보하지 못할 건 없었다. 그렇게 내가 포기선언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아가레스가 선수를 쳤다.


- [악을 대표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나와 아가레스가 서로를 마주 봤다. ‘벽을 넘은 자‘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품은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장 오래된 악‘에 짓눌려온 마왕의 진심이었다.


- [네가 해라, 아스모데우스.]


그렇게 말한 아가레스는 어딘가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가레스의 속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해소됐음을 직감했다.


잘된 일이다. 정말로.


나는 기꺼이 아가레스의 유지를 이었다. 물론 아직도 악의 최고 담화자는 아가레스지만,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설화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졌으리라. 사소한 변화에 만족하며 지금까지 모은 인장을 수거했다.


도합 50개. 시나리오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개고생 했던가. 기억을 차례차례 되짚어 보다가 문득 아몬의 말이 떠올랐다.


- 순위에 맞지 않은 강함이라. 흥미롭군.


마침 게티아의 대표도 되었겠다, 현재 내 강함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때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나는 의자에서 기립하며 자리에 있는 마왕 중 한 명을 호출했다.


- [따라나와요, 아몬.]

- [. . . 나?]


그렇게 나는 무대포로 아몬과 승급전을 벌였고, 2시간 동안 싸운 끝에 7위 자리를 찬탈했다. 갑자기 15위로 떨어진 아몬이 나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봤으나 이내 단념했다. 그리고 분노의 화살을 바르바토스에게로 돌렸다.


- [따라나와라.]

- [아니, 내가 왜 . . . ]


레메게톤이 없는 자리에서 나와 아가레스를 제외하면 바르바토스가 가장 순위가 높았다. 결국 승급전이 시작됐고, 바르바토스는 아몬에게 8위 자리를 찬탈당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가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르바토스는 새우보단 고래에 가까운 족속이었다. 15위로 떨어진 바르바토스는 다시 부에르에게 승급전을 걸어 10위 자리를 빼앗았다. 부에르가 순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덕에 촌극은 겨우 막을 내렸다.


일련의 흐름을 지켜보던 아가레스가 솔직한 감상을 밝혔다.


- [지랄을 하는구나.]


음, 아무튼 그런 다사다난한 날을 보낸 나는 지금 사무실에 앉아 멀티테스킹을 진행 중이다. 눈과 손으로는 밀린 서류를 처리하면서 귀로는 비형 채널의 방송을 청취했다.


- “할머니!!”


[. . . 저 할머니라고 부르는 건 이제 그만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나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화면을 바라봤다. 폭풍 성장을 거듭한 한다름은 벌써 정확한 발음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호칭이 심히 거슬렸지만 내 시선을 느낄 때마다 배꼽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꽁한 마음도 사르르 녹곤 하니 . . . 결국 ‘할머니‘의 반복이었다.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그리고리가 한마디 했다.


[솔직히 그렇게 불려져도 할 말 없는 나이 아닙니까?]


[월급 깎이고 싶어요?]


[조용히 하겠습니다.]


그리고리를 함묵시키며 한명오에게 육아비를 후원했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도 많이 변했지. 인간 언저리였던 부장 시절과 달리 지금의 한명오는 어엿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직 겁도 많고 일행에서 특출나게 강하지도 않지만, 한 사람 몫은 한다.


- “우리 다름이, 아빠가 좋아? 아니면 할머니가 좋아?"

- "우웅 . . . 어려운데."

- "아빠라고 말하면 맛있는 거 줄게."

- "아빠!"

- "어이구 잘했어요, 우리 딸랑구."


그래, 행복하면 그만이지. 부녀의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봤다. 주변을 정찰하고 온 공필두가 투덜거렸다.


- "쯧. 주책맞긴."

- "필두 아저씨다! "


말은 그래도 달려오는 다름이를 내치지 않는 걸 보면 속으론 많이 아끼는 모앙이다. 나는 공필두가 느낄 감상을 지례짐작하다가 화면을 옮겼다. 


평화로운 충무로 역과 달리 바깥은 난리도 아니었다. 김독자가 푼 계시록이 제왕병자들을 히든 던전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그들을 살해하고 사인참사검을 강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지갑을 열었다.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한수영‘에게 2000코인을 후원했습니다.]

- “ . . . ”


고양이 상의 여인, 한수영이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저번 일을 마음에 담아둔 걸까. 어째 시선이 썩 곱지는 않았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자 한수영이 꽤 모진 고초를 겪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옷 이곳저곳이 헤진 상태. 


한마디로 거지 몰골이었다.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습니다.]


한수영이 이를 까득 갈며 속삭였다.


- “현상금 시나리오. . . 아직도 걸려 있다고 . . . !”


. . . 내가 기한을 설정 안 했나? 확인해 보니 시나리오 창에 ‘무기한‘이라 적혀 있었다.


음, 설정 안 해놨구나.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미안 하다고 말합니다.]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래도 그건 '한수영'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 “알겠으니까 빨리 풀어 주기나 해. 나 3일 동안 잠도 못 잤어 . . .”


한수영이 자기 눈 밑을 가리키며 애걸복걸 빌었다. 그녀 답지 않게 저자세로 나왔다. 잠시 의아해했다가 저 한수영이 아직 초반 시나리오를 진행중인 화신임을 깨닫자 위화감이 사라졌다.


아직은 마왕이 무서울 때구나. 그럼 그럴 수도 있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수영에게 걸린 현상금 시나리오를 취소했다.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히든 던전에 입장한 김독자가 그녀의 아바타의 목을 베었을 때 환희는 극에 달했다.


- “두고봐.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될거니까."


과연, 작가답게 내뱉는 클리셰도 예술적이었다. 나는 한수영의 기고만장한 발언을 녹화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사인참사검을 휘두르다가 김독자에게 뒤통수를 처맞고 기절한 모습까지 영상에 담았다.


나중에 한수영이 유명해지면 ‘천재 미소녀 작가의 흑역사 모음집’으로 팔 예정이다. 김독자 컴퍼니한테 팔면 수입이 짭짤하지 않을까?


나는 신유승에게 기절한 한수영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전하고 상황을 관전했다.



*



던전 내부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던전 중심에선 제 성좌와 거의 동화된 폭군왕이 기승을 부리고, 한수영의 모략으로 왕을 잃은 세력들은 눈먼 창칼을 피해 도망쳤다. 고성이 넘치고 붉은 혈은이 흩뿌려진다. 


아비규환 속에서 김독자 일행이 움직였다.


“상아 씨는 길영이와 함께 퇴로를 확보해주세요. 유승이는 배후성이 하라는 대로 하고. 희원 씨는 나를 따라와요.”


“작전은요?”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상대가 흥분하면 그때 희원 씨가 폭군의 목을 쳐주세요.”


“확실해서 좋네요.”


원작과 다르게 아직 유중혁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스모데우스가 일으킨 나비효과 때문이었다.


저번 히든 시나리오에서 김독자의 동료들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전력의 여유는 김독자가 ‘왕의 자격’ 시나리오를 시작하기 전에 표적역을 전부 점거하는 쾌거로 이어졌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정희원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했고 이지혜는 유중혁이 도로 데려가 유미아를 납치할 사람이 없었다.


“이거 맛있네염.”


“그래? 더 줄까?”


그 결과 유중혁에게 구출된 유미아는 이지혜의 귀여움을 잔뜩 받으며 한가로이 사탕을 빨고 있었다. 검은 깃발의 공훈치를 쌓기 위해 유중혁 역시 히든 던전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속도는 동생이 납치되었을 때보단 느긋할 수밖에.


결론적으로 김독자는 오롯이 자기 힘으로 폭군왕을 상대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독자가 원하는 결을 보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에 비하면 말이다. 좋고 나쁨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니까.


나름대로 의지를 다진 김독자가 폭군왕을 도발했다.


“이제 와서 현왕이 되겠다니. 너무 시대착오적인 생각 아니야?”


“무슨 뜻이냐?”


“아무리 발악해봤자 네가 폭군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 . . 감히 미천한 백성이 나를 우롱해?!”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분노한 폭군왕이 삼륜환을 잡았다. 붉은 보석을 중심으로 공전하던 마력이 둥근 고리 형태로 길게 늘어졌다.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가 폭군왕이 손을 놓은 순간, 고리는 움직이는 검이 되어 김독자를 향해 쇄도했다.


- 카앙!


김독자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으로 삼륜환을 튕겨 냈다. 히든 아이템에 불과한 삼륜환으로 성유물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이마를 찌푸린 폭군왕은 삼륜환을 회수하는 대신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 우우웅!


이내 떠오르는 희미한 가면의 형상. 처용탈을 알아본 김독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반 시나리오에서 자기 성유물을 사용하려고 하다니. 개연성을 갔다버린 행위였다.


아니나 다를까, 던전 내부를 중계하던 도깨비들이 진언을 발했다.


[성좌 님. 여기서 성유물을 소환하는 건 개연성에 위배 - !]


허나 도깨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군왕은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사각에서 뛰쳐나온 정희원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노리는 것은 왕의 목. 좋은 시도였으나 아쉽게도 회수된 삼륜환에 막혀 실패했다.


하지만 이에 단념할 정희원이 아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린 검이 곧바로 제 2격, 3격을 날렸다. 매서운 기세에 폭군왕이 주춤했다. 아랫사람의 시종만 받고 살던 왕이 사선을 걸어온 여인의 검을 받아 낼 리 만무했다.


능력치는 폭군왕이 더 높았으나, 움직임은 정희원이 더 날카로웠다. 거금을 들인 패키지가 무색하게 폭군왕의 사지에 잔상처가 늘어갔다. 자신이 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건지, 혹은 폐위의 기억이 되살아나 두려움에 치를 떤 건지. 폭군왕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감히!”


평정심을 잃었다. 김독자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배후를 노린 ‘부러지지 않은 신념’이 폭군왕의 등에 큰 상흔을 남겼다. 


화끈한 열감이 번갯불처럼 닥치고, 이어지는 것은 끔찍한 격통. 왕이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정희원의 그림자가 폭군왕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폭군왕은, 아니 연산군은 분노를 상실했다. 끝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최후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또 이렇게 되는구나.”


폐위된 군주에게 정희원의 검은 더 이상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폭거에 희생된 민초들의 원혼이었으며, 억울하게 죽임당한 충신들의 한이었으니.


재위 내내 역사를 두려워하던 왕은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에 바스러졌다.


인과응보이며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었다.


서걱.


[한반도의 성좌들이 침음을 흘립니다.]


폭군왕이 사망한 순간, 지상의 왕들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유중혁이 도착한 것이다. 참 빨리도 온다고 생각하며 김독자는 기절한 한수영을 응시했다.


멸살법을 아는 아스모데우스라면 그녀가 표절작가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지키라고 한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5]


아수라장 속에서 왕의 자격을 갖춘 후보가 걸러졌다. 해당 시나리오를 관할하는 중급 도깨비 바울이 후보들을 한곳에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김독자는 유중혁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만나네.”


“. . .”


독자와 주인공이 서로를 마주 봤다.


“이번 한 번만 양보해주면 안 되냐?”


“거절한다.”


“사실 기대도 안 했어.”


그리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로를 신뢰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걸릴 듯 싶다.



* 요새 창작들이 많아져서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