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야기는 구원(救援)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설화에 담긴 울림을 음미했다.
구원.
본편을 정주행할 때 발작 버튼이던, 내가 애증하는 단어가 이야기의 첫 대목을 장식했다. 복잡한 심경을 삭히며 연상되는 단어의 의미를 하나씩 나열했다.
- 그것은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일이며.
- 영원하고 무궁한 것이고.
- 오래전부터 품어온 원한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셋 중 어디에 속할까.
첫 번째 의미는 내게 너무 과분했다.
나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을 도왔을 뿐이었으니까. 이해타산적이고 위선적이었다. 남을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하는 성인과는 궤가 달랐다.
두 번째 의미는 내게 너무 아득했다.
전생의 나이를 합쳐도 나는 겨우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존재했다. 고로, 수만 년 동안 풍화된 별들에 비하면 나는 갓 태어난 신생아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세 번째 의미가 나와 통했다.
당장 이 거대설화 자체에 시나리오에서 소외된 마계의 분노가, 오만하고 위선적인 별을 향한 마왕의 증오가 담겨있으니.
가장 선명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 . . 그게 전부일까?'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활성화됩니다.]
어두컴컴한 세상이 일순 반짝였다. 별처럼 반짝이던 활자들이 번져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설원에서, 나는 '벽을 넘은 자'와 마주쳤다. 초면이지만 직감했다. 이 새끼가 그동안 말썽 피우던 놈이라는 걸.
"못생겼네 . . . "
그것은 마치 이계의 신격처럼 불가해한 모습을 한 채 온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엉킨 실타래'가 그 뒤틀린 외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비유였다.
아무튼,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였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벽을 넘은 자'가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나 냉소는 아니었다. 실소에 가까운 감정. 한탄하는 어조가 주된 맥락이었다. "어째서"라고 묻자 그것이 말했다. 정확히는 입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문장이 튀어나왔다.
안타깝게도 내가 들은 것은 페이지가 사르륵 넘어가는 소리뿐이었다.
의아해하던 그때, 설화가 준동했다.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즐거운 미식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
수많은 설화들이, 이름도 모르는 이야기가 설원을 가득 채워나갔다. 밝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벽을 넘은자'의 대답임을 눈치챘다.
여기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부드러운 거절이였다. 그렇다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 . .
나는 빛에 떠밀려 다시 눈을 떴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1층을 바라봤다. 곳곳에 흩어졌던 게티아 일원들이 연회장 중앙에 모여 있었다.
문득 저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오합지졸이었던 소성운이 벌써 여기까지 왔다.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성운이 있었다.」
나는 1층으로 몸을 던졌다. 산뜻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바닥에 발을 딛자 마왕들이 양옆으로 쫘악 갈라졌다.
「버림받은 땅의 주인들을 만났고.」
기어코 하나의 마계를 일궈낸 마왕을 향한 경외인 걸까. 하나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저리 긴장한 걸까. 그저 자신이 쌓아온 이야기를 복기하는 시간일 뿐인데.
자존심 강한 마왕들 답지 않은 경직된 분위기가 우스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표정 풀어요. 기쁜 날인데 웃어야죠.]
내 발언에 모략스가 혀를 찼다.
[너도 참 . . . 대단한 놈이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 낸 길을 거쳐 게티아에 합류했다. 그리고 아직 2층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아가레스를 불렀다.
[안 오고 뭐 해요?]
날개를 펼친 아가레스가 내 곁에 내려앉았다. 궐련을 문 입매가 미묘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악이 함께했다.」
나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그려졌다. 게티아가 만든 작은 원. 게티아를 에워싼 마왕들의 커다란 원. 시꺼먼 마기 탓에 멀리서 보면 온점처럼 보일 경광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에, 결말을 구도하는 마왕이 있었다.」
쿠구구 . . .
성을 받친 대지가 진동했다.
마계가 거대 설화에 감응하고 있었다.
「흩어진 것들이 다시 하나로 뭉치고,」
「사라진 봄이 도래했다.」
갑작스럽게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마왕 놈들에게 손을 건네기 전, 먼저 내게 온기를 나눠준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그렇다면, 구원은 내가 받은 것이 된다.
- 그럼 핫라인이라도 . . .
- 혹시 미식협이라고 아나? 너 같은 별종들이 득실득실한 연회인데.
- 아스모는 따뜻해. 마음이 따뜻해.
- 너는 나처럼 되지 마라, 마계의 특이점.
-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음.
- 네가 한 노력이 헛된 건 아니다.
.
.
.
다사다난한 사건사고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별들과의 추억들을 떠올리자 . . . 이상하게도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나도 나이를 먹은 걸까. 자꾸만 감성적이게 된다.
최소 수천살은 먹었을 마왕들 앞에서 다소 실례가 되는 생각을 하며, 창밖에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응시했다. 차가운 증오로 감정을 식힐 의도였으나, 내가 품은 열기가 많이 뜨거웠는지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전용 스킬, '벽을 넘은 자'가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냐며 미소 짓습니다.]
고요한 장내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야 너 . . . ]
게티아 일원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 원을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모략스가 투덜거렸다.
[하아, 웃다가 울다가.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나중에 술안주로 삼기 딱 좋겠군.]
멋쩍은 분위기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속이 후련하다고 해야 하나.
가만히 있던 아몬이 나를 힐끔 곁눈질하며 속삭였다.
[다 울었나.]
[음, 그런 것 같네요.]
조금 낮부끄러워 귓불이 뜨거워졌다. 그런 나를 보며 아몬이 놀리듯 덧붙였다.
[웃어야지. 네 말대로 기쁜 날이니까.]
[ . . . 보아하니 한동안 우려 먹겠군요.]
[너도 한번 당해 봐야지.]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덕분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비키라는 의미로 손을 한차례 휘졌곤 연회장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거대설화의 마지막 문장을 맞이했다.
「마침내 마계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찬란한 금빛 스파크가 장내를 휩쓸었다. 스타스트림의 움직임을 감지한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폭발했다.
[성운, <올림포스>가 - ]
[성운, <베다>가 - ]
[성운, <파피루스>가 - ]
이곳은 내 사유지. 채널이 열리지 않는 곳이다. 거대설화의 탄생을 느낀 성좌들은 지금쯤 궁금해 미칠 지경이겠지.
별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내가 쌓아 올린 이야기가 결실을 맺었다.
[당신의 첫 번째 '거대설화'가 완전하게 개화합니다.]
[거대설화, '하나의 마계'를 얻었습니다.]
마왕들이 숨을 죽였다. 거대설화를 얻었지만, 모두 메시지가 더 이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스타스트림>은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전설급 설화들이 서막을 구성합니다.]
[당신의 첫 번째 거대설화가 '기'를 완성하였습니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비록 비중은 적으나 마지막 시나리오로 한 발자국을 딛는 데 성공했다. 이미 거대설화를 보유하고 있던 마왕들도 끝의 자격을 얻었음에 기뻐했다.
[당신에게 ■■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의 필터링이 해제됩니다.]
나는 허공에 명시된 나의 ■■을 응시하다가 아공간 코트에서 꺼낸 축하주를 땄다. 내가 잔을 들자 마왕들도 가까운 테이블에 비치된 잔을 들었다.
. . . 뭐지?
그냥 가볍게 한잔 마실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 모두 내 건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처한 눈빛으로 아가레스에게 구조신호를 보냈으나 돌아오는 것은 능글맞은 거절이었다.
[연회의 주인공, 할말 없나?]
망할 아가레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나는 고민 끝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건배합시다. 시나리오의 종말을 위하여.]
.
.
.
[특성, '■■■ ■■ ■■'이 . . . ]
[특성, '전지적 ■■ ■■'이 . . . ]
[특성, '전지적 ■■ 시점'이 활성화됩니다.]
*
연회를 끝낸 이후, 나는 김독자 컴퍼니를 육성하는 데 집중했다. 이미 원작보다 강해졌으나 위기 상황은 여전히 있었다.
특히 유승이 어깨에 앉은 소재앙을 보고 기겁한 리카온이 '바람의 길'을 알려주지 않겠다 선언했을 땐, 나조차 당황했다. 재앙과 붙어먹는 화신을 믿을 수 없다나 뭐라나.
- "내가 그대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 "죄송해요. 저 때문에 . . . 훌쩍."
[저 개새끼가?]
[주,주인님? 그 . . . 진정하시고 - ]
아니, 개새끼 맞잖아. 귀도 달려 있고, 꼬리도 있고, 털도 복슬복슬 하고.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당황하는 걸까.
[강세가 붙어 있잖습니까. 강세가. 그럼 욕이라고요.]
아무튼 개새끼는 계속 튕기다가 보다 못한 유상아한테 팩트로 두들겨 맞고 개심했다.
- "유승이는 잘못 없어요. 만약 유승이가 재앙을 길들이지 않았다면 이곳도 리카온 님의 고향처럼 멸망의 길을 걸었겠죠."
- ". . ."
- "길잡이라면서요. 재앙에 맞서 저희 세상을 돕기 위해 왔다면서요.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예요."
올림포스가 한 짓에 대해 내게 사과한 것도 그렇고, 진짜 사람이 착하다. 유상아에게 설득된 리카온은 유중혁에게 바람의 길을 전수했다. 김독자는 책갈피로 스킬을 훔쳤고.
결과적으로 '질문의 재앙' 명일상은 원작보다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명일상의 배후성, 양산형 제작자한테 애도의 말을 전했다. 은근히 화신을 아끼는 할아범이라 답신에서 씁쓸한 기색이 묻어났다.
- 그 아이를 생각해 줘서 고맙네.
나중에 미식협에서 만나 술 한잔 하기로 약속하고, 나는 간만에 <명계>로 외출했다.
[성운 <명계>가 당신을 소환하는 포탈을 개방합니다.]
소용돌이치는 게이트를 통과하자 외성이 보였다. 나는 공손해진 심판관들의 안내를 받아 성안으로 입장했다. 페르세포네가 나를 반겼다.
[어서 와요.]
[. . . 네.]
반박자 느린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페르세포네는 내 대답이 시원찮은 이유를 금세 알아챘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기품있는 예복이 차이나 드레스로 변했다.
[이러면 됐나요?]
[네.]
흡족하게 웃으며 자리에 착석하자 페르세포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끝의 자격을 얻게 된 걸 축하해요.]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설립된 지 1년도 안 된 신생 성운이 이런 반항을 일으킨 건 기나긴 스타스트림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빌드업을 쌓는 것일까. 의문은 머지 않아 해소됐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 . . 당신의 ■■을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차를 마셨다. 솔직히 알려 줘도 상관은 없었다. 페르세포네가 나를 해코지할 위인도 아니거니와 내 ■■은 김독자처럼 성좌들의 경계를 살 정도로 완전한 끝을 암시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나는 살짝 공격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순수한 호기심인가요?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나요?]
뜻밖에도 페르세포네는 동요했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내 눈엔 보였다.
[. . . 둘 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솔직히 당신이 거대설화를 발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계시'가 생각났거든요.]
'마계의 이단아가 시나리오의 멸망 이후를 보리라'는 계시.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문장이 페르세포네를 비롯한 성좌들의 주의를 끈 모양이다.
더욱이 페르세포네는 끝에 대한 예언을 한 개 더 가지고 있었다.
- 오래된 신화를 끝낼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가 나타날 것이다.
그녀 처지에선 위험을 최소화하고 싶을 것이다. 후계자를 지키고 명계를 물려주고. 예언이 실현된 미래를 보고 싶겠지.
더군다나 김독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설화를 지닌 그녀가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후계자이기에, 여왕의 민감한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다만 . . .
[조금 서운하네요.]
[음?]
[나를 못 믿으니까 물어보겠다는 거잖아요.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요?]
눈썹 끝을 떨어뜨린 채 시무룩한 어조로 말하자 페르세포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황했는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게 아니란다. 오히려 우리는 너도 - !]
[페르세포네.]
불쑥 튀어나온 진언이 페르세포네의 진언을 끊었다.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검은 토가를 두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상은 안 돼.]
[. . .미안해요, 낭군님. 내가 너무 흥분했네요.]
[미안해하진 마.]
페르세포네를 다독인 하데스는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눈빛이 자애롭게 느껴진 건 내 착각이겠지.
아무튼 이로써 명계 부부에게 어떤 사정이 있음을 확인했다. 옥좌에 착석한 페르세포네가 이마를 짚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미안해요. 추태를 보였네요.]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먼저 감정적으로 굴었으니까.]
[ . . . 혹시 삐졌나요?]
예상외로 동정심 유발 작전이 효과가 좋은 모양이다. 계속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한번 시원스레 웃어줬다.
[삐지긴요. 내가 여왕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제야 페르세포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그대를 존중하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딱히 숨길 것도 아니었다. 살짝 호기심이 돌아 장난을 쳐봤을 뿐이지.
[말해 줄게요.]
[정말로?]
[네.]
말하기 전,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어떤 것부터 말해 줄까요?]
페르세포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질문의 취지를 깨달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 . . ■■이 하나가 아닌가요?]
나는 소리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일 축하해, 독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