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독시를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하나 꼽자면, ■■을 어떻게 발음하냐는 질문을 들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동으로 묵음처리 된다. 입술 틈새로 무저갱이 생긴 기분이랄까. 낭떠러지에 삼켜진 메아리가 본래 형체를 잃어 버리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발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거대 설화를 발아해냈고, '기'를 쌓는 데 성공했다. 스타스트림은 내가 끝에 다다를 자격이 있다고 시인했다. 


고로, 나는 페르세포네의 눈을 바라보며 나의 '끝'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다.


[첫 번째 ■■은 '독자'입니다.]


[. . . 다른 하나는?]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작가'.]


페르세포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한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딱 저런 느낌이었으니까.


턱에 손가락을 붙인 채 침음을 흘리던 페르세포네가 스테이크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포도주를 시음하며 성류 방송을 시청했다. 


화면 속에서 김독자가 메인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을 수령할 무렵, 굳게 닫힌 여왕의 입이 열렸다.


[신기하네요. 보통 ■■은 끝을 암시하는 단어로 채워지기 마련인데 . . . ]


페르세포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빈 그릇에 남은 설화 파편이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혹시 나중에 책을 출간할 계획이 있나요? 가령 자신의 일대기 라던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군요.]


성류게시판에 글 쓰는 건 몰라도, 지금까지 진지하게 책을 집필해 본 적은 없었다. 애당초 이야기를 쓰는 것보단 읽는 게 내 취향에 맞았다. 


글을 잘 쓰냐 못 쓰냐 이전의 문제다.


이야기를 생산하기 위해선 그것을 소비할 때보다 수십 배 이상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니. 매 순간을 스펙타클하게 살아가는 내겐 집필에 필요한 에너지가, 여유가 부족했다. 


모든 게 끝나고 나면 또 모를 일이다만, 그건 결말 이후의 세상 아니던가. ■■은 '결말' 자체를 암시하는 단어다. 고로 내 결말의 한 갈래가 어째서 '작가'로 향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어쩌면 짖꿎은 비유일 수도 있겠네요.]


[비유라면 . . .]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스타스트림이 성좌에게 친절한 세계는 아니니까요. 당장 나만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을 가지고 있어요.]


원작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야기의 맥락을 이어가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알 수 있을까요?]


페르세포네가 어렵지 않게 답했다.


[내 ■■은 '죽음'이에요.]


[으음, 마찬가지로 난해하군요.]


죽은 자를 다스리는 여왕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골 때리는 조합이었다. 


문득 김독자가 받은 예언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는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걸 옆에서 들은 한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 죽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성좌는 자기 설화가 타인에게 잊혀졌을 때 소멸한다. 그러니 김독자를 기억하는 화신들이 전부 죽었을 때 김독자가 사망하는 운명이 실현되리라는 추리였다.


한수영이 말한 것을 제외해도 신체 기능의 정지나 영혼체의 소멸처럼,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죽음이 존재한다. 나는 그중 한 가지를 상상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나요?]


[죽음은 살아숨쉬는 모든 이야기의 종착지랍니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 . . . ]


입을 다문 페르세포네가 어둠을 흘겨봤다. 호박색 눈동자에 담긴 끝모를 애정이 향하는 곳에서 그림자가 요동쳤다. 바닥에 글자가 새겨졌다.


- 버틸 수 없어.


글자를 읽은 페르세포네가 답했다.


[후후, 나도 그래요.]


내가 굳이 이런 예시를 든 까닭은 원작에서 하데스가 죽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


급박한 상황탓에 자세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어쩌면 페르세포네는 하데스를 잃은 당시 자신의 끝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나는 애틋한 분위기 속에서 시선을 교환하는 부부를 온화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저 경광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해.]


[사랑해요.]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이제 다음 단계로 가는 거냐며 흥분합니다!]


그나저나 이놈의 설화는 진짜 . . . 뭐. 설화의 파렴치한 반응과는 별개로 저렇게 꽁냥대는 모습에 손발이 오글거리는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헛기침을 하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크흠! 아무튼, 그런 식의 죽음도 조심하는 게 좋겠군요. 사랑하는 남편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죠 . . . ]


뒷말을 흐리자 페르세포네가 작게 웃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였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그대는 아직도 연애할 생각이 없나요? 분명 천년 전에 내가 그대의 사랑 이야기를 듣기로 - ]


이럴 줄 알았다. 디오니소스도 그렇고, 남의 연애사에 간섭하는 건 올림포스의 종특인 모양이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바쁩니다.]


[거짓말은 나빠요, 아스모데우스. 그대가 틈만 나면 타성운으로 놀러 다닌다는 건 내 낭군님도 알고 있다고요.]


[. . . 그걸 왜 명왕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쁜 건 사실입니다. 내가 마냥 놀러 다녔다면 거대설화를 얻지도 못했겠죠.]


[그 수많은 밀회가 전부 아군을 포섭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 말인가요?]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페르세포네는 억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련은 남았는지 한마디를 덧붙였지만.


[주변에 괜찮은 남자도 많아 보이던데.]


[. . . 네?]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망언이라 효과가 전무했다. 


[도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중2병 용가리, 까마귀 새끼, 4차원 천사, 서열 2위 마왕 . . . 


나열하고 보니 여러모로 가관이었다.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페르세포네가 쓴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서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몸에 힘을 뺀 채, 머리 위로 느껴지는 온기를 만끽했다. 잡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방금 대화 탓인지 태반이 연애와 관련된 문장이었다.


[설화, '동정 사냥꾼'이 투덜거립니다.]


물론 성별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된 지는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내 정욕은 오로지 설화를 향했기에 전부 글러 먹은 가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 찾겠군요.]


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페르세포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자식의 연애 상담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려나?]


[진짜 자식한테 해줘요. 애꿎은 마왕 몰아가지 말고요.]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예언 속 후계자가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허나 페르세포네는 내 기대와는 다르게 다소 미적찌근한 반응을 보였다.


[화신 김독자는 . . . ]


[뭔가 걸리는 게 있나요?]


[ . . . 나는 아직 그 아이를 잘 몰라요. 우리 낭군님께선 마음에 들어하신 것 같지만 . . . ]


페르세포네가 말끝을 흐리며 패널을 띄웠다. 비형이 운영하는 채널에서 언쟁이 한창이었다. 김독자, 유중혁, 한수영, 유상아가 뒤얽혀 있었다. 페르세포네의 시선은 그중 김독자에게 머물렀다.


- "내 말 잘 들어, 유중혁. 이번 회차의 범람의 재앙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 "그 녀석은 내 동료다."

- "동료였지."


아마 페르세포네에겐 '회차'라는 단어가 필터링 되었을 것이다. 유중헉이 회귀자라는 정보는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까. 페르세포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게 많은 아이는 경계심이 강한 법이죠. 저 아이가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별인 이상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그대는 좋아하지 않나요?]


[내가 아니라 내가 주는 코인을 좋아하는 겁니다. 김독자는 그런 화신이죠.]


[아.]


내 완벽한 해석에 페르세포네가 탄성을 흘렸다. 



*


김독자의 발언에 생각이 복잡해진 유중혁은 정희원과 이지혜, 그리고 의선으로 돌아온 이설화를 데리고 서쪽 재앙을 공략하러 떠났다. 


남은 일행들은 재충전 시간을 가졌다. 


성흔을 사용하느라 지친 유상아는 숙면을 취하고, 벌써 대여섯살은 되어 보이는 한다름은 신유승과 이길영을 언니, 오빠라 부르며 따라다녔다.



두 아이들도 그런 한다름과 잘 놀아줬다. 신유승은 제 배후성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한다름을 자주 안고 다녔다. 덕분에 배후성의 시선이 사라질 때마다 엄습하는 불안감이 사라져 좋았다. 


"오늘은 뭐하고 놀래?"


"우웅 . . . 탑쌓기 놀이?"


그 화목한 정경을 한수영은 아니꼽게 바라봤다. 


"야."


괴수종 고기를 굽던 김독자가 한수영의 말을 받았다.


"왜."


"쟤 진짜 저대로 둘거야?"


". . ."


한수영의 시선이 신유승을 향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한수영의 속셈을 어림짐작했다. 


멸살법에 의하면 범람의 재앙, '41회차의 신유승'과 3회차의 신유승은 '끊어진 필름 이론'으로 얽혀 있는 상태. 현재의 신유승을 죽이면 재앙도 죽는다.


이번 시나리오를 가장 평화롭게 해쳐나갈 수 있는 정공법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미래에 재앙이 된다고 지금 잘 살고있는 아이를 죽인다면, 저 혼자 잘난 회귀자와 다를 게 없잖는가.


그래서야 결말을 볼 수 없다. 설사 그런 무자비한 방식으로 결에 닿아봤자 스스로가 만족할 수 없을 터였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한수영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확신이야, 아니면 네 바램이야?"


"둘 다."


"너, 자꾸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 골로 간다?"


". . ."


한수영이 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모든 일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아."


그 말에 동감하면서도 김독자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생각한 전략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어. 신유승의 배후성이 누군지 벌써 잊었냐?"


한수영이 헛숨을 삼켰다. 지난날의 악몽이 떠오른 탓이다. 현상금 시나리오는 정말 . . .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밤하늘의 눈치를 보며 한수영이 김독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걔 원래 저런 놈 아니지 않았냐? 그냥 설화에 미친 사이코패스 아니었냐고."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나 불렀냐고 말합니다.]


"풉!"


간접 메시지에 놀란 한수영이 고기를 뱉었다. 질색하며 피한 김독자가 한수영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 . . . 뭐 하냐?"


"아 사례들렸 - 콜록콜록!"


김독자가 한숨을 내쉬며 한수영의 등을 두드려 줬다. 동시에 허공을 향해 말했다.


"요새 많이 바쁘신 것 같습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승이가 좀 서운해 하더군요."


메시지의 텀이 길어졌다. 신경 쓰고 있구나. 모질지 못한 마왕은 한수영이 말한 것처럼 원작과 거리가 멀었다. 


김독자가 눈동자를 굴려 등을 들썩이는 한수영을 흘겨봤다. 듣자 하니 꽤 심하게 괴롭힌 것 같은데 . . . 그녀가 표절 작가임을 고려하면 동기는 충분했다. 


저 마왕은 tls123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앞으로는 잘 챙길 거라고 말합니다.]


문득 김독자는 평소보다 하늘이 밝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수많은 별들이 김독자 머리 위에 있었다. 허나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지상이 아니었다. 


[성좌, '무저갱의 지배자'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중용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격노와 정욕의 마신'에게 언제 한 번 만나자고 말합니다.]


아직 게티아가 거대설화를 확보했다는 정보를 모르는 김독자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콜록!"


그리고 한수영은 아직도 기침을 하고 있었다.


폭풍이 오기 전, 평화로운 경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