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죽은 날,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은 날, 본능에 처음으로 굴복한 날.

올레크는 잠들때마다 늘 악몽속을 누비다 깨어난다. 그러고선 언제나 덤덤한 목소리로 혼자 속삭인다.


"또 꿈을 꿨군."


형언할수 없을정도로 가혹한 삶에 찌든 올레크에겐 그런 악몽들은 더이상 아무 감흥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의 삶이 지옥같음을 알아도, 그는 마음속으로 늘 한 생각을 읊는다.


-'살고 싶어.'


살아남는 것에 대한 엄청난 갈망, 그의 존재 의의.


괴로운 기억도, 물리적인 상처들도 그는 모두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그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고통을 곱씹을 뿐이다.

행복했던 과거는 오늘 살아남아 비참한 내일을 보기 위한 양식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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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러시아와 미국을 시작으로 벌어진 세계 대전쟁으로 인해 모든 나라들은 황폐해졌고, 

정부는 힘이 축소되어 이전처럼 강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 

전쟁의 잔해들은 점차 제모습을 되찾아갔지만, 곳곳엔 수많은 빈민들과 가난이 퍼져나갔으며, 

약해진 정부로 인해 수많은 범죄조직이 사회를 통제하는 세상이었다.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올레크는 매우 유복했다. 

무기 설계자인 아버지, 생물학 박사인 어머니는 전쟁 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무기, 생물병기를 개발하고 팔아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정부, PMC, 심지어 범죄조직까지도 모두 부부의 열성적인 고객들이었다.

그리고 올레크를 갖게된 시점에서, 부부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적하여, 신분을 위장하고 조용한 동네에서 살아갔다. 

그런 부모 밑에서 올레크는 올곧게 자랐다. 

회색빛이 도는 피부에, 은빛 머리칼, 초점없는 퀭한 눈동자, 섬뜩함이 느껴지는 생기없는 외형과는 반대로, 

그래도 꽤 반반한 얼굴, 따뜻한 마음씨, 비상한 머리로 그는 유능한 인재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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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크! 마을 분수대에서 공연을 하고있대! 가서 보자!"


발레리가 내 손을 잡았다.

발레리의 가족은 어린나이에 유럽에서 건너와 힘든 타지에서도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 어느날 병으로 부모님을 일찍 여의게 된 발레리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 위로해준 날, 우린 둘도없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분수대로 갔다. 

물론 물은 진작에 끊긴, 전쟁중에 반쯤 부서진 분수대지만, 아직까지 만남의 광장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곳. 

떠돌이 악사가 낡은 바얀을 들고 "라 캄파넬라"를 한창 연주하고 있었다. 

동전을 몇개 던져준 후, 발레리와 손을잡고 부서져가는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올레크, 너랑 음악 들을 때가 제일 좋아."

"나도 그래...발레리, 학교가 있었다면 우리도 같이 연주할수 있었을 텐데..."





"전쟁같은거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살았을까?"

"글쎄...? 일단  물이 나오는 분수대에 앉아있을거란 확신은 있어...하하..."

"네 농담은 항상 재미없네~그래도 따뜻해서 좋아!"



전쟁전에는 학교라는 곳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전쟁 전에 태어났더라면 고등학교라는 곳에서 한참 음악공부도 하고있지 않았을까.

 지금이 전쟁전의 세상이었다면 우린 뭘 하고 있었을까 늘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래도 그 세상에서 난 언제나 발레리와 함께였을것이다. 내 험악한 외모를 보고도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준 아이.

우린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어가면서, 굳이 사랑을 표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수 있었고, 어느새 사귀게 되었다.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온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목숨이 노려지고 있어."

"우릴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단다."


나를 낳은 이후 모든 거래를 중단하고 잠적한 것으로, 

부모님과 거래하던 군사기업, 범죄조직은 지금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그들의 수많은 제안을 거부해온 부모님이셨기에, 새로운 거래는 못할테니 분명 가지고있는 기술이라도 찾아서 빼앗으려고 찾는 거겠지.

오늘 그들이 이 도시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물론이고 주변사람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당분간은 밖에도 나가지 말고, 발레리의 안전을 위해서도 거리를 두어야 할 것 같다.


"분명 '누군가 우릴 죽이려고 하고있어' 같은 이야기를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


발레리는 겁이 많았다. 분명 이런 섬뜩한 이야기를 하면 그녀에게도 두려운 일이 될것이다.



"..."


"올레크! 문좀 열어줘, 왜 요새 집에서도 안나오고 날 못본체하는거야??"


쉴새없이 노크하는 문 너머로 발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돼, 여기오면...정말 미안해, 발레리...지금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어...말해줄 수는 없지만 날 믿고 기다려줄래...?"

"...나쁜 일은 아닌거지?

"응...단지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다 끝나면 우리 예전처럼 꼭 다시 놀자..."

"알았어! 그럼 대신 이거라도 받아. 힘들게 구한 난초야. 다시 데이트하러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나라고 생각하고 잘 키울 수 있지?"

"그래...널 생각하면서 잘 키울게...우리 조만간 꼭 다시 만나자..."



발레리에게는 절대,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우릴 찾지 못하면 놈들은 다른 곳으로 떠날 거야. 그때까지는 아무도 밖에 나가지 마. 아무도 들이지 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다행히 돈에 여유는 있으니, 사람을 시켜서 생필품을 사오게 하거나, 바깥 동향을 알아볼 수 있을거야. 몇달만 그렇게 참도록 하자꾸나."


부모님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칫하면 발레리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랬기에 나는 발레리를 돌려보낼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기고간 난초를 조심스레 가지고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잘 가꿔서 키운 다음, 그놈들이 도시를 떠나면 바로 나가서 보여줘야지.


그리고 곧바로 말할 것이다. 아무리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다고 해도, 반드시 말로 전해야 하는 것.


청혼.


그리고 예물이 될 작은 난초를 가꾸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달.

두달.

세달.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그날이 오면 잘 자란 만큼 내 마음도 잘 전해질거야.

매일 빵을 파는 힘든 일상에서도 해방시켜 줄거야.


그렇게 나는, 비록 지금 상황을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는 모든걸 이해해줄 수 있는 여자라고, 굳게 믿고있었다.




다음화에 계속